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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7:2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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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28절-37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개 취급을 당한 여자의 말이 주님의 말씀 끝에 ‘옳소이다. 하지만 개들도 아이들이 먹는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했다. 이치에 딱 맞는 말이다.
이 말을 얼른 들으면 ‘그렇습니다. 나는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개처럼 살았습니다’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또 건방지게 들으면 ‘그래, 나는 개 같은 사람이다. 어쩔래?’ 하며 오해하고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창조의 목적이 있게 지은 그 분 앞에 엎드린 어머니의 그 심정을 예수님은 다 아신다.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즉, 찌꺼기 은혜라도 주셨으면, 예수님의 그림자만이라도’ 하는 애타는 그 심정을 아시고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
‘돌아가라. 더러운 귀신이 너의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집에 돌아와 본즉 나은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다. 침상에 누었다는 말의 의미는 아이가 병에서 나아 평안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나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기도로 롯이 가까스로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얻었다. 우리 입장에서 이룰구원으로 보면 ‘부끄러운 구원을 얻지 말고 삼촌 아브라함처럼 좋은 기회가 있을 때 가르침을 잘 듣고 그 삼촌의 뒤를 따랐으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치적으로 보면 ‘세상 누림성을 좋아하고 쫓아가면 신앙 믿음 면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밖에 올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이치적으로 볼 수가 있다.
‘더러운 귀신이 너의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선언은 장소 초월이다. 그 자리에 가서 안수를 안 해도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장소 초월이다. 장소 초월은 시간 초월도 들어있다.
‘장소 초월, 시간 초월’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선언하신 그 때의 그 말씀이 그 때의 어머니와 같은 그 신앙의 자녀들도 나음을 얻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개 같은 여자라고 하는 걸 술집여자들만 생각할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보면 건전하게 보이지만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면서 신앙정조를 팔았으면 그거는 개 같은 정신이다. 그 점에서 보면 이 어머니 입장에서 자기 신앙의 질을 안다면, 그리고 귀신들린 딸을 둔 처지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표현적으로 자신을 개처럼 대해준다 해도 예수님의 그 말씀에 마음으로 톡톡 튀기며 입을 삐쭉거리고 눈을 흘기고 그래야 되겠느냐? 그런데 교회에서 보면 이런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 더러운 정신이 못 고쳐진다.
아이가 나은 것을 본 어머니가 이제는 아이를 그 전처럼 악령이 들도록 키울까? 하나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키울까?
여기서 더 생각할 것이 없나? 첫 시간에도 말했지만 사건 상황이 자기가 좋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기도하라. 창조의 목적에 맞춰진 기도는 틀림이 없다. 나음을 얻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고.
딸을 고쳐주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이 있으니 그것이 곧 창조의 목적이다. 거기에는 구원이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고쳐준 것은 우리의 구원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냥 ‘들어라’ 그것보다도 예수 믿는 효력을 자기가 보고 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밥 먹고 살다가 죽는 그 면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믿는 효력을 자기가 보고 가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고 집 지니고 돈 벌고 자가용 굴리고 사니까 하나님의 역사의 효력을 안 봐도 되는 거냐?
31절-37절: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에 들어가신 것은 더러운 귀신들린 여자아이를 고쳐주려고 들어가신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 아이 어머니의 신앙정신적 사상을 바로 잡아주시고 나온 것이다. 그냥 귀신을 나가게 했다고만 보게 되면 일반이 돼버린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 성경을 보고 ‘예수님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었구나’ 그렇게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의 주님의 구원을 보는 거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그 역사도 본다.
성경을 일반으로 보면 자신이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비뚤어졌는지 못 보고 못 고친다. 성경을 표면만 보면 세상기준이 된다. 영적 면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하나님 기준이라야 한다. 본문을 세상기준으로 보면 여기에(예배 장소에) 귀신들린 자가 있느냐? 없다. 귀신들린 자는 정신병원에 있다. 성경을 이렇게 보면 우리가 깨달을 게 없다.
성도가 영적 차원에서 생명과를 먹어야 자기의 이해타산 평가 추구성이 하늘의 것으로 다 들어가는 건데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 먹은 눈으로 보고, 보이는 것은 세상인데 이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성경을 보면 못 깨달아진다.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서 영적 정신적 소원 목적적 차원에서 뭐가 어떻게 얼마나 비뚤어졌는지 알고 고쳐야 한다. 그리고 고침을 받고, 응답을 받고 자기 생활이 어떻게 되어 나가는지 하나님의 역사를 봐라. 우리는 이룰구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봐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어린아이라도 창조목적을 두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니 어린아이에 관한 교육도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의 교훈으로 잘 가르침이 돼 나와야 바로 자란다.
이유는 없다. 모든 교육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중심에 맞추면 부모로부터 자녀 대대로 바로 되는 건데 그만 마귀의 장난에 휘둘려서 ‘제사다. 추도식이다’ 하게 되면 그 집은 귀신들린 집이 돼버린다. 이게 한 번 들으면 도무지 안 빠진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가난에 찌들려도 제사는 한다고 한다. 귀찮다고 하면서도 그런 짓을 한다. 이게 사람이 제 정신이냐? 이제는 그것도 꾀가 나는 건지 제사를 남에게 시켜버린다. 그러면 종이에 조기, 밥 등을 그림으로 그려서 붙여놓고 제사를 한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미련한 거냐? 이거는 정신이 빠진 거다.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에 세상에 속화되고 타락된 부모들의 정신은 세상 소원 목적에 욕심을 품고 자식들을 세상에서 일등이 되라고 말로 매질을 하고 있으니 그 아이의 인생은 세상이라는 우상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된다. 세상을 위해 그 일생을 다 불사른다. 그게 제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으로 들어가는 게 번제다.
세상 모든 면에서 일등으로 살면 행복도 일등, 건강도 일등, 수명도 오래 사는 면에서 일등이 되는 것이냐? 그래, 그렇게 해서 일등을 하면 이등이 가만 두느냐? 또 이등을 하면 삼등이 가만 두느냐? 일등 한 자는 이등으로 안 떨어지려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면 건강해지느냐?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의 신앙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마귀 짓을 하는 설교가 많다. 그 설교란 어떤 거냐? 성경을 들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주장하면 교인들의 신앙 믿음은 다 죽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그 정신이 물질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사람이 진리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면 말씀이 그 사람을 잡고 일을 한다. 말씀이 그 사람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런 사람이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요, 평강의 사람이요,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사람이 불행해지고 멸망을 당하는 것은 생명과를 버리고 선악과를 보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좋은 어머니가 됐을까?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환경에 잘 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옮아오기 마련이다. 인간 자기는 감염성자로 지어진 자이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담배 피는 곳에 잘 가면 담배 피는 것을 배워오게 되고, 쌍스런 욕을 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있으면 역시 그것이 배워지고 옮아온다. 춤추는 곳에 가면 춤을 배워오고, 치고받고 죽이는 오락을 좋아하면 자기 부모에게도 그 행동이 나오기 미련이다. 노래하는 곳에 가면 노래가 옮아오고, 강퍅한 곳에 가면 강퍅성을 배우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얼마든지 그런 요소가 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악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자기 성격 성질도 그렇게 닮아지는 것이다. 무당 흉내 내다가 무당이 되고, 말더듬이 흉내 내다가 말더듬이가 된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이이들이 보는 인터넷에 보니까 친구가 다리가 구부러져서 제대로 못 걸으니까 그 친구가 안쓰러워서 바로 걷던 아이도 그렇게 걷는다. 사실은 자기 다리는 멀쩡한 건데 자기 정신 속에서 그게 돼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가 바로 걸으려면 다리를 원래대로 해 놓으면 되는 거냐, 정신을 돌려놔야 되는 거냐? 정신을 돌려놔야 한다.
자기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방편적으로 무리하게 되면 선한 목적은 달성이 없게 된다. 방편이 위주가 되면 그만 목적달성이 안 된다. 방편은 순간순간 임시방편으로 써야 한다. 자기는 똑똑하다고 하며 완전자처럼 교만을 떨다가 자기 똑똑에 그만 자기가 속아서 넘어진다.
갈릴리 호숫가에 오니 사람들이 귀먹고 말이 어눌한 벙어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두로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길이 아무리 멀어도, 여러 고을 지나쳐서 왔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무엇부터 우선적으로 고쳐줘야겠다는 그 결정은 당신이 주권적으로 하신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교회에 온 사람 중에도 여러 동리(교회)를 거쳐서 온 분도 있다. 저기 서울 삼각산 쪽에서도 오시는데 올 때 몇 동네를 거치겠느냐?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눈에 보이는 교회가 문제가 아니고 ‘어느 곳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있느냐’ 그걸 늘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면을 말하는 거다. 자기가 고쳐야 되고, 자기가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돼야지 무슨 인정정실에 매여 쫓아가는 건 주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은 거다.
두로에서 갈릴리 해변까지 오는데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왔는데 사건이 없다고 해서 계시가 없는 것이냐? 두로에서 시돈을 통과했고, 그리고 데가볼리를 지나왔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모두 선악과 먹은 저주 받고 타락된 세상인데 지나온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픈 사람이 없었을까?
어느 동네에 살았건 사람이 사는 곳에는 모두 예수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인간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인데, 그런데 두로에서 시돈, 시돈에서 데가볼리를 지나왔는데 왜 그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냥 통과하게 내버려 두었을까?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이 다 필요한 거고, 고쳐야 하고 만들어져야 할 입장인데, 잡아야 할 입장인데, 고쳐야 할 입장인데 왜 예수님을 그냥 지나가게 만들었을까? 이건 무관심이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를 지나 갈릴리 호수에 이르니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병든 사람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는 인도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믿음이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이 없는 거짓된 인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말하자면 사람이 안 고쳐진다면(안 만들어진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되겠느냐?
귀먹고 벙어리 되어 어눌한 자에게 예수님은 낫기를 원해서 안수를 했다. 여기서 안수란 어떤 것이냐? 무엇이 안수냐? 오늘날 그냥 손을 얹고 ‘낫게 해 주십시오’ 하면 그게 안수냐?
예를 들면 병원에 가면 의사가 환자의 아픈 데다 손을 얹고 ‘네 병이 나았다’ 하는 의사가 있더냐? 약을 주기도 하고 주사도 놓고 하니까 병자의 몸속에 약기운이 돌아서 병자의 몸이 낫기도 하더라.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질의 것이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뜻으로써 그걸 안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역사가 임하는 뜻으로 안수라고 하는 것이다.
손으로 안수를 안 해도 멀리서도 ‘네 딸이 나았다’ 하는 건 그에게 주님의 안수가 들어간 거다. 즉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손, 세력이 들어갔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 인간 자기 속에 있다면 이것은 주님의 안수가 된 것이다. 무당의 정신이 들어갔다면 그건 무당의 안수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귀신이 옮아온다. 끊어진 전선줄이 이어지니 전기가 흘러서 전등불이 환하게 밝아지듯이 예수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정신이 병자에게 들어가니 고쳐지더라.
인간 자기 속에 무엇이 흐르기를 바라느냐? 무엇이 충만해지기를 바라느냐? 자기 속에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 충만해진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먹은 거다. 이렇게 되어진 것은 예수님의 안수가 된 것이다. 또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안수이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왜 무리를 피하여 데리고 갔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그랬을까?
1. 예수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까봐? 그러니까 무리들로 인해서 너무 시끄러우면 병자가 안 고쳐질 가능성이 있어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능력발휘에 지장이 될까봐?
2. 무리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봐? 말하자면 ‘예수님이 두 손으로 귓구멍을 막고 침을 뱉고 해서 고치더라’ 하고, 또 서로 그렇게 하면서 병자를 고친다고 하면 문제가 될까봐서?
3.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심이다? 영적으로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무리 가운데서 고치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무리들의 오만 잡된 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중하게 못 알아듣는다는 뜻에서 무리들을 피하여 데리고 가신 것인가?
3번이 정답이다.
그런데 ‘따로’ 라는 이 말은 ‘일대 일’이요, 다른 말로 하면 특별이다. 그러니까 무리를 피해서 딴 데로 간 것은 방해받지 말라는 것이 있고, 또 그들이 들을까봐, 볼까봐 그런 것도 있고, 또 특별은혜를 주시려는 것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가락을 벙어리의 양 귓구멍으로 먼저 넣는 것은 당신의 역사가, 세력이, 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귓구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서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려 하심이다.
손에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댄다는 것은 발음을 분명하게 고쳐주심이다. 예수님의 언행심사가 사람 보기에는 이상하게 보여지지만 그 안에는 사람 고쳐짐이 들어있는 것이다.
34절: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셨다. 그렇다면 탄식을 하신 것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야속하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늘의 소리를 못 듣고 있었다는 안타까움에서 이제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소원이다.
성경에서 행동만, 말만 보면 안 된다. 그 성문계시 속에 하나님의 의사성은 따로 있다. 그러니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에바다’ 곧 ‘열려라’ 라고 하심은 그의 귀가 열리라는 것이다. 귀가 열리면 듣고 나서 가치판단 평가가 나온다. 못 들으면 안 나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는 못 들으면 안 된다. 못 들으면 길과 진리와 생명의 이치의 말을 못한다. 하늘의 뜻을 못 들으면 하늘의 뜻을 말을 못한다. 그게 귀머거리요 벙어리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는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가 되어있는지 봐라. 귀먹고 벙어리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못 고치면 그 상태로 영원히 갈 수가 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벙어리이면 천국에 가서도 벙어리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벙어리처럼 진리를 모르고, 몰라서 진리를 말을 못하는 영적인 면의 벙어리를 이 세상에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밥만 먹고 일반소리만 듣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중을 들어야 하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35절에 보면 귀가 열리니 이제는 듣고 가치판단 평가가 나온다. 이렇게 되니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하나님의 뜻을 밝히 말을 하더라. 혼돈이 아니고 분명하더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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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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