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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크게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58 추천 수 0 2016.01.10 15: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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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31-8: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7장 31절-8장 10절.


7장 31절-37절: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8장 1절-10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7장 31절: ‘예수님께서 어디를 지나셨다, 어디를 통과했다’고 하면 교훈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이 자기를 만나고 가는 건지, 자기가 붙잡고 가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 곁으로 지나가게 하는 건지 그걸 생각해야 한다. 지나간다 하는 건 기회가 있다 그 말이다. 이 말씀 속에서 그게 척 하고 들어와야 자기가 구원을 잡을 수가 있다.


32절: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오는 것은 벌써 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무엇을 하는 분이시고,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해 주시길 원하는 분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비교해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온전한지? 자기가 부족한 것이 많고, 미련한 것이 많고, 못 고친 것도 많고 해서 ‘아, 이걸 고쳐야 하겠다’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없이, 그 인식을 하지 못한 채 ‘내 마음이 어때서, 내 성격이 어때서, 내 가치판단이 어때서’ 하며 자기가 똑똑하고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돼 있으니까 예수 믿을 필요가 없고, 교회에 올 필요가 없는 거다.


일반 도덕성적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자기가 완전한 자처럼 보인다. 자기가 성격 성질을 팍팍 낼 때도 자기가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일반개념에서는 그러는 자기가 옳게 보여진다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이냐’ 할 때는 그건 꼬부라지고 비뚤어지고 임시성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니 그 질이 옳은 게 아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교훈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고쳐야 한다. 먼저 지식을 고처야 하는데, 하늘의 지식은 임시성이 아니고 죽 늘어뜨리면 죽음 저 너머까지 영원히 가는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도 영원히 가는 것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해타산도 영원히 가는 것이고, 모든 것이 영원히 가는 것으로 다 들어있다. 교인으로서 이 지식을 가지게 되면 참 옳은 지식이고, 참 옳은 지혜를 가진 것이다.


지식에는 영원히 가는 지식이 있고 임시성적인 지식이 있는데, 임시성적인 지식은 영원 궁극적인 지식과 비교를 하면 시간적으로 효력적으로 짧다. 그러면 자기가 가진 지식이 100년 안쪽의 지식인지, 10년이나 갈 수 있는 지식인지, 아니면 내일 모레가 되면 금방 바꾸어질 지식인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죽음 저 너머까지 자기의 이해타산이 들어있지 않은 지식은 임시성에서 다 끝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소년시절에 상대방을 생각하는 생각이 있고, 좀 더 자라서 청년시절로 올라와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생각이 있다. 또 어른이 되어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생각이 있고, 노년에 이르러서 생각하는 생각이 있는데 이게 다 다르다. 지식을 가졌던 그 가치가 각기 다르다. 그런데 성장을 한 후에는 자라면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 가졌던 지식이 옳은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그 경험 자체를 무시하면 참 미련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성장이 있을 수 없고, 사람 중에 못난 사람이다.


그래서 말씀의 깊이를 아는 당신의 종들의 소리를 듣고 자기 입장에서 그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억지로 하게 되면 남의 자유를 꺾는 거고, 억지로 하게 되면 사람이 자라지를 못한다.


자라면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분별을 못할 때는, 자기감정만 있을 때는 좀 강압을 쓸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 살려야 되니까.


33절-34절: 33절의 내용이 34절에서 되어 나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왜 이런 모습을 하실까? 귀먹고 벙어리 된 그 병자를 보는 주님의 마음이 아프시다는 것이다.


35절-37절: ‘그의 귀가 열리고.’ 귀가 열리니 듣게 되고, 들을 때에 가치판단 평가가 나온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귀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그냥 ‘소리만 들린다’가 아니라 들음으로써 가치판단이 나오는 귀문이 열리더라. 사람은 영의 귀가 열려서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말속에 말이 있다. 자기를 바보라고 하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흉을 보는 건지 말속에 말이 있다. 그 말속의 말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사기꾼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기꾼의 말은 무슨 말이냐? 거짓말이요 그 말 속에는 사기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뉴스를 보면 달콤한 말에 이끌려 따라가서 얻어맞고 끌려 다니고 협박 공갈을 당한 것이 나온다. 이는 말속의 말을 못 느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핸드폰에 상품 세일광고가 뜨면 싸다고 해서 막 몰려가야 하는 거냐? 아무리 싸도 필요가 없으면 사지 말고, 필요하다면 비싸더라도 사라. 그게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다.


귀가 열리니까 가치판단 평가가 나온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귀가 그 말씀을 들었느냐? 들었다면 가치판단 평가가 나와야 한다.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러니까 가치판단 평가가 나오는 진리의 적중성의 말씀을 들으니 귀로 들어가서 녹음이 된 그 말이 자기 입으로부터 표현이 되어 나오는 거다. ‘분명하게 나오더라.’ 그게 귀가 열린 것이고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진리이치를 못 들어서 진리이치의 말을 못한다. 이건 하나님 앞에서 볼 때 귀먹고 벙어리 된 자이다. 그러면 이 병이 일반병원에 가면 고쳐지느냐? 아니다. 영에 속한 병은 일반병원에서는 못 고친다. 육신에 관한 거라야 만이 고칠 수도 있고 그런 거다.


그러면 성경은 왜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등용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주느냐 하면, 그 밑에 깔려 숨어있는 말은 이 성경을 보는 우리에게 ‘너는 영적인 면에서 귀먹고 벙어리 된 자다’ 하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옳은 이치의 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건 벙어리다.


기독교회 안에 무리에 속하는 혼란스런 가르침들이 참 많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치 않은 가르침이 많다. 구별 분별이 안 되는 그런 소리 들어봤댔자 영적으로 귀먹고 벙어리가 된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게 뭔지 바로 알아라.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게 뭔지 알아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귀먹고 벙어리가 된다. 육신의 귀로는 사람소리 짐승소리를 다 듣는데 영의 귀가 어두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못 알아들으니 교회 안의 거짓 종들, 이단자들, 사기꾼들의 말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느냐? 못한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거다.


우리교인들이 주일날 한 번 각자 원하는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봐라. 그 설교가 밝히 들린다면 거기에 안착을 하라. 영분별 정신분별 사상분별이 잘 되면 거기에 안착을 하라.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을 영적인 면의 귀먹고 벙어리 된 그 병을 고쳐주려고 하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구원의 주님이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지 않더냐?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그 병자의 귀를 쑤셨고, 그 다음에 손에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댔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안 하고 말씀 한 마디로도 다 할 수 있는데 만능의 그 분이 왜 침을 뱉어서 혀에 댈까? 그 의미가 뭘까? 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분이 언행심사를 하시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역사가 병자에게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교회에서 세상 소원 목적을 가르친다면 그건 천국복음이 아니다. 그건 하늘나라 말씀도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종도 아니다. 아무리 학박사라고 해도 아닌 거면 아닌 거다. 목사라는 그 이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나와서 역사가 되어 들어가는 거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그건 복음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뭘 구하라’ 하는 것은 땅의 복음이지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복음 하늘나라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 믿어 부자 된다.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 된다’ 하는 건 복음이 아니다.


그런 소리 듣지 말라. 그런 소리를 들으면 자기 마음속에 그 말이 녹음이 되고, 녹음이 되면 녹음이 된 그대로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된다. 그런 잘못된 지식이 들어서 녹음이 돼 놓으면 정말 안 고쳐진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들어도 들었던 그 세상 것이 속에서 나와서 딴 소리를 한다. 이건 말이 분명치 못하고 깨끗지 못한 거다. 흐리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요, 영적인 말씀이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귀를 고치는 것은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고, 말이 분명해졌다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 평가성, 인간창조의 소원 목적성을 분명히 말을 할 수 있게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가 왜 팔팔 뛰느냐? 예수님 앞에 팔팔 뛰는 사람을 봤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쳐지니 펄펄 뛰는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이건 자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서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 ‘예배당을 지었다’ 그게 아니고 자기가 고쳐진 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36절에 무리들에게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지만 경계할수록 더욱 널리 전파를 했다. 되게도 말을 안 듣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를 시킨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친 것을 세상 일반적인 자기 기준대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더욱 널리 전파를 한다는 것은 말이 자꾸 건너간다는 뜻도 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말이 막 부풀려서 나온다는 의미도 된다. 이러면 이치에도 안 맞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황당한 말이 되기 일쑤다.


37절에 듣는 자들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심히 놀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또 하는 말은 ‘예수가 잘 하였도다’ 했다고 했는데 무리들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적인 선행의 개념으로 ‘예수란 분이 참 선하고 좋은 일을 하는구나’ 그러는 것이다.


예수님의 언행심사 모든 것은 영인성장 면을 위해서 영의 이치를 넣어서 보여주는 건데 사람들은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그 마음은 모르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말을 하게 되니 이렇게 되면 영적인 뜻이 없어져 버린다.


오늘날 성경구절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을 말하지 않으니, 숨은 것을 말하지 않으니 교회가 하는 일은 그만 외식운동이 되고 만다. 결과가 그렇게 돼버린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그 일을 하시는 궁극적 결과가 신령한 천국의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목적으로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와서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려는 것인데 그건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자꾸 왈가왈부하니 그 사람의 영적인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예수 믿기는 믿는데도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의 평소의 이해타산을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믿어오면서 어떻게 믿어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그만큼 사람이 고쳐져야 하는데 성격도 안 고쳐지고 성질도 안 고쳐지면 믿는 효력이 뭐냐? 성경은 사람을 보고 하시는 말씀인데 그 성경을 보고도 사람이 안 고쳐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성경은 계시가 맞느냐? 성경은 특별계시가 맞느냐? 그런데 교회에서 성경을 보면서도 특별계시가 안 나오면 교인들은 귀먹고 벙어리가 다 된다. 그러니까 주님이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실 때 하늘을 우러러 보신 것은 영적인 면에서의 귀먹고 벙어리 된 자의 상태를 보는 당신의 심정이 어떤 것인가가 나오는 거다.


8장 1절-10절: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데려다가 떡을 먹이는 걸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무슨 떡을 가지고 있었느냐? 열두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리고 또 무리들이 예수님과 3일째 같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리들이 3일 동안 뭘 먹고 마시고 어떻게 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사건을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이 된다. 그러나 지금 이건 계시의 말씀이니까 이렇게 돼 있는 거다.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 서북쪽 지중해 연안 두로 근방에서 수로보니게 족속 중의 한 여인의 딸의 더러운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셨고, 여기서도 소문이 나갔고, 또 갈릴리 바다의 동쪽 데가볼리 지경으로 와서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었더니 여기서도 소문이 많이 나가서 큰 무리가 형성이 되어서 소문에 소문이 퍼져서 멀리서도 오고 가끼운 데서도 온 이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사흘 동안이나 따라다녔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침을 받았으면 얼른 집에 가야 할 텐데 무리들이 사흘 동안이나 따라다녔다. 그러니 사흘 동안 먹을거리를 배낭이 짊어지고 다닌 것도 아닐 테니 집에서 갖고 온 먹을 것도 다 떨어졌다.


그렇다면 인간을 만드신 주님이 이 무리들의 형편과 사정을 모르실까? 다 아신다. 누가 가까운 데서 왔고 누가 멀리서 왔고 하는 것을 다 아신다. 오늘날 우리들을 보시고도 다 아신다. 어떤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무슨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도 주님은 다 아신다.


소문이 나가서 무리들이 많이 왔는데, 그러면 오늘날 자기 교회에서는 무슨 소문이 나갔을까? 오늘날 교회들이 무슨 소문이 나갔기에 교인들이 꽉꽉 찰까? ‘어느 교회는 늙고 젊고 간에 한 사람씩 데려가면 천 원씩 준단다. 어느 교회는 안수만 하면 자기 이빨이 금이빨로 변한다고 한다’ 그런 소문을 듣고 모였느냐?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갈까? 그게 있는 거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 위주, 자기만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신실한 인도자는 무리들의 형편을 지혜롭게 살피는구나. 참 목자는 성령의 눈으로 양들을 살핀다. 성령의 눈으로 살핀다는 것은 그 성도의 영적 상태를 살핀다는 말이다. 거짓 목자는 그 사람의 생활을 쓱 보며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다 뺏어간다.


참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따른다. 딴 사람이 ‘내가 너희들의 목자다’ 그래도 참 양은 안 따라간다. 단순히 목소리가 굵고 가늘고 그걸 듣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참 목자는 예수님이신데 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분명한 교훈을 하면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인도자의 말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분명하면 주님의 양이 따른다. 그러나 세상 양은 안 따른다.


양도 양 나름이다. 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다. 성경으로 보면 어린양이 있고, 새끼양이 있다. 어린양은 주님을 상징하는 거고, 새끼양은 거짓된 교회들을 향해서 말하는 거다.


그런데 어린양과 새끼양은 겉으로 볼 때는 구별 분별을 못한다. 똑같이 보인다. 같이 성경 들고 가지, 같이 예수 믿지 하니까 다 같이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새끼양은 땅에서 나는 건데, 이 새끼양은 땅의 소리를 듣고 따라간다. 소원 목적이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잘 된다’ 하는 것은 새끼양이다. 새끼양은 땅에서 나는 거다. 땅의 소산이다. 그러나 어린양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생명의 말씀의 소산으로 교인들을 신령한 성품을 갖도록 인도한다.


새끼양은 땅에서 올라오는 거짓된 짐승이니, 쉽게 말하면 예수를 믿되 짐승처럼 본능성적으로 살고자 하고, 즉흥적으로 살고자 하고, 눈에 보이는 그 면으로 보고 살고자 하는 자들은 전부가 땅의 짐승이요 새끼양이다.


이들이 땅에서 올라와서 누구를 광고하고 누구를 소개하느냐 하면 바다의 짐승을 소개한다. 예수 안 믿는 세계의 그 자랑을 한다. 교회 안에서도 거짓된 인도자는 땅에서 나온 짐승과 같아서 그의 정신 사상 전부는 땅의 것이요, 세상에 속한 것으로 말을 하고, ‘세상 것을 이루라’ 하고, 세상 것이 잘 이루어지면 영광을 받으라고 한다. 이건 마귀가 예수님을 꾀이는 그 정신과 똑같구나. 예수님을 꾀인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 믿는 사람을 꾀인다는 것도 같이 들어가는 거다. 이치가 같이 들어가는 거다.


하나님의 양들은 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른다. 분별 구별되는 음성,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그 말씀의 이치를 잘 따른다. 양들의 영적인 형편을 모르는 목자는 양들을 억압과 강압을 해서 자기의 밥으로 삼는다. ‘네가 그렇게 해서 세상 복을 받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겠느냐?’ 하는 게 전부 억압 강압적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에서 보면 그게 전부는 사람을 공갈 협박을 하는 거다.


‘너 내 말대로 안 하면 죽인다’ 하는 건 깡패들 세계의 말이다. 그런데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하면 너는 지옥에 가고, 이 세상에서 너는 어떤 사업을 해도 망한다. 너는 멸망한다’ 하는 건 깡패들이나 하는 공갈 협박이다. 질이 그렇다.


본문의 장면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여 내시는 그 장면이 슬며시 밑에 깔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의 목적대로 영원히 존귀 영광자 행복한 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따라가면서, 모세를 따라가면서 훈련과 연단을 시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교회에서 훈련과 연단을 단단히 받는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지는 훈련장이요 연병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연병장에서 실력을 닦는 것처럼 세상을 이용 활용 선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로 적용을 시켜서 자기 속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아져야 한다.


영화 같은 데 보면 소림사에서 무술 하는 게 있는데, 이제 신출내기들은 이래 이래 쌓는데 오래 오래 단련을 해서 내공이 쌓인 사람은 이렇게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 버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이 자기 자체화 성품화 인격화 되어 내공이 충만해야 하는데 그게 없는 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이런 저런 바람이 불면 다 날아간다. 그 사람을 어떻게 믿겠느냐?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못 믿고, 교인들끼리도 그런 사람은 못 믿는다. 그런 사람 믿었다가는 큰일 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이는 육적인 형편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훈련과 연단을 시키는 거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광야교회로서 말씀의 정신을 받는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훈관과 연단을 주시는데 이걸 안 받으려고 한다. 그러니 교인들이 모여서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다 가인의 사상이요, 에서의 사상이요, 예수님 당시 때의 헤롯의 사상이다. 마귀가 사람을 꾀이는 정신이 그렇다.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들은 진리본질을 따르는 오늘날 교회의 축소판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의 인도를 따랐던 것처럼 교회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구원 바로 그 분을 따라야 한다. 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의사성 뜻 소원 목적 취미성 가치판단 모든 면에서 예수를 닮는다는 것이 같이 들어있다.


목사님들 세계에 보면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었고 목사인데도 예수냄새가 안 나고 무슨 세상 잡배들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게 어디 예수 믿는 목사라 할 수 있겠느냐? 이건 교회가 아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사람이 고쳐져야 한다. 그 신앙양심이, 도덕성이나 지혜지식성이 모두 예수님의 모습으로 고쳐져야 하는데 그게 안 고쳐지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서 사람노릇이 되며, 사회에서도 사람노릇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먹을 것이 떨어질 때까지 3일 동안이나 광야에 두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강하고 더 좋은 표적의 떡을 먹여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심도 광야생활의 훈련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이 배고픈 것도 참을 줄도 알고, 아픈 것도 참을 줄도 알고, 말하자면 기다릴 줄도 알고, 하나님 앞에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하겠는데 그만 즉흥적으로 제 마음대로 놀면 그 사람은 훈련이 안 된다. 평소에 훈련이 안 되면 싸울 때가 되면 되느냐? 안 된다. 그건 안 되는 사람으로 질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께서 만일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진 줄을 모르고 계시다가 갑자기 그 사실을 알고 그 때서야 떡을 먹이신 것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역사의 주권자가 안 된다. 당신의 주권섭리 하에서 지금 그 장면이 돼 나가는 것이다. 창조의 만능의 능력자에게는, 역사의 승리자에게는 알지 못하는 돌발적인 상황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는 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 주권이 인정이 되느냐?


그리고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가 현재 당하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게 있겠느냐? 모두는 다 아시고 자기의 신앙 믿음 차원에서 그게 허락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주님 당신이 허락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사람의 차원에서 그 사건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그 주권의 뜻을 모르니 자기 마음대로 한다.


자기의 됨됨이가 안 되면 안 됨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현실이, 모든 언행심사 도덕성이 현재 됐으면 된 것만큼 나올 거고, 안 됐으면 안 된 만큼 안 나오는 거다. 안 된다는 것은 즉, 적용이 안 된다는 거다. 이건 자기 축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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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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