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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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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10절-26절: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달마누다로 가셨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서 표적을 보여주지 않고 배를 타고 그들을 떠나가셨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헛걸음을 하신 것이냐? 헛걸음을 하신 게 아니라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 주심인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 함을 알게 하심이다. 떠나가신다 함은 이룰구원은 없다는 말이다. 자라고 성장되고 장성되는 구원은 없다.
14절-21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남은 떡이 몇 광주리였느냐? 남은 떡이 일곱 광주리였는데 왜 하나만 들고 왔을까? 서로가 짐이 되니까 가져오기를 꺼려한 건지?
떡 가져가기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좋은 해석으로 하면 어떤 해석이 될까? 떡 가져가기를 서로 잊어버렸는데 이걸 좋게 해석하려면? 한 덩어리만 있어도 주님이 다 먹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에? 표적의 떡 이적의 떡은 사람의 수에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 들어있는 게 아니다.
주님의 계획은 인간 자기의 계획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또 자기 집의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주님의 구원이라는 속에 자기의 이룰구원의 계획이 들어가야 한다. 이게 뒤집어지면 타락이다. 그걸 바로 잡는 게 믿음이고 신앙이다. 모든 생각의 사고방식이 이해타산이 바로 들어가야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가, 목사님들이 ‘교회 비전, 발전’ 하면서 거기에 예수를 집어넣는데 그건 신앙이 아니다. 주님은 ‘일이 잘 된다. 안 된다’ 그걸 보는 게 아니라 ‘네 속에서 성령님의 일, 하나님의 일, 주님의 일이 잘 돼 가느냐? 네 속에서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바로 만들어져 가느냐?’ 그걸 가지고 따진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에 밝아야 한다.
떡 가져가기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해석을 하자면 예수님 따르기를 그만큼 열심히 했구나. 따르는 면으로 열심히 하면 다른 먹고 마시는 게 좀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다. 서로가 미루다가 놓친 게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의 순종에 열중하다 보니 먹을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제자들은 떡 광주리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걱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떡을 가져왔느냐, 안 가져왔느냐’ 그 차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다.
누룩은 부풀게 하는 것이다. 진리의 사람은 진리이치로서 다져지고 사람이 알차게 여물면 그 성장성이 아주 강한 건데, 그런데 부푼다고 할 때는 푹 꺼진다는 게 전제가 돼 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외식운동 껍데기 운동을 하며 눈으로 보이는 것을 좇는 신앙이다. 제도 예배순서 의식이 거창하게 보이는 그 위주로 나가며, 그래야 만이 신앙이라고 한다.
우리교회는 예배순서가 없다. 나쁘게 말하면 목사 제 생각대로 하는 거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하나라도 더 깨닫게 해 주려니 말씀선포에 주력하는 것이다. 예배순서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여자와 말 몇 마디하고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이 때니라’ 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냐? 우물가에서 대화한 그 때다. 그러면 그 때 예배순서가 있었느냐? 그 때로 말하자면 물동이 든 여인이 교인이요, 이 때 예배순서라고 한다면 이 여자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서 물 한 모금만 달라고 한 것이 예배순서다.
그러면 이렇게 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예수님이 우물가에 먼저 가서 앉아있었고, 그 후에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여자를 만나서 ‘여자여, 물 한 모금만 먹읍시다’ 하니까 여자가 마음속으로 ‘이상한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네’ 하면서 ‘줄까 말까’ 했는데, 이 모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물을 줬습니다’ 하고 말할 때까지 한 10분은 흘렀을까?
그리고 이 여자가 우물가에서 예수님께 영생수(말씀)를 받은 건데, 그 후에 마을로 뛰어가서 사람을 전도해서 데리고 왔는데, 이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시간이 한 반나절이 걸렸을까?
이 여자가 점심때쯤 되어서 물 길러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몇 마디 듣고 마음에 불이 붙어서 동네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올 때까지 동네사람들이 한 집 마당에 모여 있었겠느냐? 그게 아니라 각자 자기 집에 있었을 텐데, 이 여자가 집집마다 들러서 ‘내가 예수를 만났으니 빨리 나오라’고 한 그 시간이 몇 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걸린 그 장면을 글자로 만들어서 성경에 딱 담아놓았는데 이것을 우리가 읽을 때는 몇 분이 걸리느냐? 즉 이 사건을 축소시켜서 글자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읽을 때는 몇 분이나 걸리느냐?
그 사건을 읽는데 1분이 걸린다면 우리는 그 사건을 1분에 다 보는 건데, 그러면 그 1분 안에 글자만 있는 거냐? 아니다. 그 속에 여자의 마음도 들어있고,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주고 싶은 거 받고 싶은 게 다 들어있는 것이다.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목사님이 해석을 어떻게 하는구나’ 그렇게 보지 말고 그 해석 속에 들어있는 영적인 느낌성을 캐치해야 한다. 은밀계시는 글자적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신령적인 인격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신령성의 느낌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느껴야 된다. 그래야 인격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못 느끼면 말소리만 귀에 들어간 거지 인격적으로 못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속에서 예수님의 맥박이 뛰어야 한다. 그게 예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무슨 말을 하면 ‘그게 성경구절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면 그 차원이 어느 정도인가? 말속에 말이 있는데 이걸 알아듣는 자는 귀가 밝은 자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있고 헤롯의 누룩이 있는데, 헤롯의 누룩은 뭐냐? 헤롯이 생일 잔칫날에 세례요한을 죽였다. 그러니까 헤롯의 누룩이라고 할 때는 세상 제일주의, 누림성의 사상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성에 관한 것 전부를 말한다. 이 사상이란 교회 안에서 교회 인도자들로 통해서 나오는 메시지, 또는 믿는 이웃들로부터 오는 여러 이설들도 다 포함해서 말하는 거다. 그런 걸 주의하라.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성과 제자들의 생각이 빗나가고 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거다. 질과 질은 통하는 건데 통하지 않으니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은 교훈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는데 제자들은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맞을 리가 없는 거다. 제자들은 먹는 음식에 대해 걱정이고 예수님은 교훈에 신경을 쓰라는 것이다.
누룩은 부풀어 오르게 하는 성질이 들어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외식, 껍데기 교훈으로 세상적인 성질의 외형 외모로 부풀어 오르게 한다. 그런 가르침에 사람의 마음이 막 붕붕 뜬다.
우리 집회는 늘 ‘진리 진리’ 이러니까 졸음이 잘 오는데 세상을 가르치는 집회에는 부풀게 하는 약을 잘 쓰니까 잠이 안 오고 마음이 붕붕 뜬다. 붕붕 뜨니까 기분이 정신이 살고 막 올라간다. 그러나 나중에 푹 꺼지니까 김이 다 새버린다.
헤롯의 사상은 세상 정치적으로 부풀게 한다. 바리새인의 사상은 종교적인 외식운동이다. 이 두 사상이 서로 결탁되어서 예수님께 시험을 걸어서 책잡아서 죽이려는 무리들로 성질이 형성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일 때 유대 종교인들의 외식운동과 헤롯의 로마를 등에 업은 정치색을 띤 그 권세가 합세를 한 거다. 교권과 세권이 합세를 하는 거다.
헤롯의 권세는 세권이고 유대인들의 권세는 교권인데 우리의 권은 진리권 생명권이다. 그 권을 잃어버리면 힘없다. 힘 못 쓴다. 자기 속에 순전히 예수님의 것으로 자라고 성장하고 그 정신으로 생활하고 그 사상으로 돼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호도 하고 붙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역사를 하신다.
그런 사람은 또 원망불평이 없다. 왜냐? 하나님의 주권 섭리적 역사를 알기 때문에. 그러나 외모 외형 외식적인 신앙은 그 목적이 자기 몸 밖의 것으로 된 것인 고로 사건이나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자동적으로 자기 속에 안 된 것이 막 튀어나온다. 아니다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지기를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종교요 비진리의 가르침에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로 만들어 놓는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교회 다니면 다 믿음 있다’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게 귀신 집으로 돼 있느냐, 마귀 집으로 돼 있느냐, 사단 집으로 돼 있느냐? 믿는다고 하는 그 정신이 누구 안에서 살고 있느냐 그 말이다. 믿는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신 성령님이 살고 있어야 거룩하고 옳고 정상적인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세상 영이 들어있고 마귀 집으로 돼 있고 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사람이 정상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예수님께 오신 것은 이런 자들을 고쳐주고 바르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눈 열게 해주고 귀 열어주고 그 성격 성질 고쳐주는 것이다.
17절-21절: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알고, 떡이 열두 광주리 남은 것도 알고, 사천 명을 먹인 것도 안다. 그러면 아는 우리는 여기서 뭘 깨달았느냐? 지극히 적은 것을 가지고 다 먹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했는데 여기서 뭘 깨달았느냐? 그게 나와야 한다. 안 그러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 소리를 또 듣게 된다.
떡 다섯와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해도 5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고, 또 그 이후에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머리를 가지고 남자만 4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기억했느냐?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왜 그렇게 둔하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날 마지막 교회들은 이 장면들을 어떻게 보고 듣고 기억하고 있을까?
1.물질적 사회 구제사업을 하라는 것으로 깨달았다?
2. 세상 물질적 축복이다?
3. 영의 양식이다?
정답은 3번이다.
만일 육신위주 세상위주로 생각을 한다면 그들의 누룩 즉,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망적 형벌과 심판을 받는 부풀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알아듣고 그 일을 하고 있는지를 봐라.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정신과 헤롯의 정신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 사회적 봉사적인 일을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정신이 나에게 들어와야 하는데 그게 그만 정신이 아닌 행동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사람이 깨달음이 어디 있느냐?
19절-20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라’ 그 말인지, 아니면 ‘그 일을 하신 분을 기억하라’ 그 말인지? 그 일이 아닌 그 일을 하신 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자칫하면 옆으로 빗나간다. 사람에게 댈 말을 일에 대면 큰일 날 짓이다.
22절-26절: 벳새다에 도착을 하니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손대시기를 구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방법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고는 ‘무엇이 보이느냐’ 하셨다. 이에 그 소경이 우러러 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했다.
그 후에 그 눈에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재차 안수가 들어가는 것은 처음 안수를 열심히 했는데 약해서 두 번째 또 하는 거냐? 그러니까 두 번 안수를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하신 안수가 실수가 있어서 재차 안수를 하신 거냐? 실수라고 말하기보다도 그런 정도로 보이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완전하게 똑똑하게 보여져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눈에 다시 안수를 하니 저가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더니.’ 첫 번째 안수 때는 예수님을 주목한 게 아니라 사람들을 봤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주목하여 봤다. 그렇게 되니까 만물을 밝히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를 먼저 밝히 보아야 명확해지는 것이냐? 예수님. 사람을 보지 말아라. 사람을 보면 안 된다. 사람을 보면 본다고 해도 명확하지를 못하고 똑똑하지를 못하고 어설프다. 그런 차원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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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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