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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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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2016. 1. 31 주일 오전 설교 http://cafe.daum.net/st888 |
성경 : 눅19:1-9
제목 : 고백과 실천
눅19:1-9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아멘.
한국교회 성장과정을 보면 1900년 교인 수는 2만, 1960년 62만여 명, 1990년 일천 여만 명, 지금은 절반 수준으로 추락했습니다. 초기의 성장은 하나님을 간절히 섬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보였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나중에 급성장하게 된 것은 진리로 성장한 것이라기보다 문화번영주의로 컸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거품이 많이 빠진 상태이지만 여전히 인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숙제는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느냐’ 하는 반성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고백과 실천>의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교회에서의 신앙고백
본문은 당시 세관장으로 상당한 재력가인 키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 구원을 확증 받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 본문 눅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과 길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1)앞으로 달려가서
2)키가 작기 때문에 나무 위에 올라가 보기 원했습니다.
그처럼 은혜 받고자 하는 자는 예배 할 때 달려오듯이 빨리 오고 앞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 받는 자의 발은 붕붕 뜹니다.
*저가 해안 초소 근무할 때 마침 고향에서 먼 곳에 유명하신 목사님의 집회가 있어 꼭 가야 하기에 너무도 간절히 바닷가 큰 바위에 붙어서 기도했더니 갑자기 둥둥둥 하는 뱃소리가 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예상치 못하게 큰 배로 어업을 하는 친구가 그날 그 시간에 찾아와 근무 마칠 시간이니 같이 가자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무난히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주를 만나고 은혜를 받는 사람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삭개오의 태도를 아시는 예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니 삭개오는 머뭇거림 없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3)신앙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집으로 모시고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물질을 나눠주라든가 남의 것 도둑질 한 것은 4배 갚으라든가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 자신이 자원하여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본문 앞 누가복음 18장에는 한 부자 청년은 예수께 와서 물질과 함께 영생하는 방법을 알고자 왔다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라 하시니 그는 근심하고 떠났습니다. 이 부자는 삭개오와 대조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께 와서 예배하고 교회생활을 해도 여전히 재물에 목숨을 걸면 영생 구원은 없습니다.
(1)예수를 뭐 때문에 믿고 (2)어떤 예수로 믿는다고 고백할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보통 교회가 세례 대상자에게 세례 받게 하기 위해 먼저 기본적 교리 문답을 하고 ‘예’ 라고 답해야 할 사항을 가르쳐서 세례를 받게 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믿는 것은 자신의 양심이지 교육으로 주입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를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을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마16:13-15 ‘13. ..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주관식으로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관식으로 답했습니다. 마16:16 ‘..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또한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아닌 자신의 신앙 양심적 고백을 했습니다.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개인이 가진 양심의 언어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신학수업이 된 지도자가 잘 가르쳐서 교정할 일이지만 신앙고백은 자기 믿음에 대해 자기 식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고백은 소릴 질러 하는데 그 말대로 사생활이 직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성하건데 고백도 절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에서의 신앙고백이 이제 세상에서 그게 진정한 양심이고 신앙심인지를 보여야 합니다. 실천적 삶의 태도에서 자기 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좋은 삶은 없고 고백의 소리만, 기도와 찬양의 소리가 세상에 소음이 된다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2. 세상에서 실천적 신앙 증거
회개하여 속죄 받았다면서 내가 죄지은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받는 것은 부끄럽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회개하는 맘이 진실했기에 당장 잘못한 자기 삶을 드러내고 남의 것은 갚겠다 하고 예수님과 함께 선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맘을 아시기에(요6:64, 요21:17) 그의 진실된 변화를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진정 회개하여 속죄 받은 기쁨을 얻으면 내가 죄를 진 사람에게 미리 찾아가서 죄를 사함 받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회개하고 보니 어릴 때 수박 서리 한 것이 생각나서 찾아가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행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회개했다 하면서 내가 잘못한 자에게 찾아가서 회개를 못한다면 스스로 회개했다는 생각은 자기 최면화입니다. 소위 긍정주의로 자기 죄를 처리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1)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용서 받은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죄 사함 받았다면 남의 죄를 용서할 맘까지 얻게 되는 양심적 회복이 있습니다. 남의 죄를 용서 못하면서 내 죄를 용서 받겠다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마6:14-15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아직도 착각하고 사는 신자가 많습니다. 남은 용서 안하면서 자기는 용서 받는 줄 착각합니다. 남을 용서 않으면서 하나님께 사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2)진정으로 죄 사함 받은 후에는 진실하게 삽니다
신앙고백은 건전하게 보이는데 이웃과의 현실적인 문화생활에 있어서는 사기치고 적당히 세속인들의 처세대로 사는 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 아닙니다.
슥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엡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세상 밖에서 진실하게 사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객관적으로 마7:20 ‘..그들의 열매(행동;현대인의 성경)로 그들을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교인이 그것도 중직자의 직분을 가진 자가 불신자같이 혹은 더 못한 욕심으로 정직하지 못하고 사기를 치고 사는 걸 봅니다. 사랑은 고사하고 남의 것을 보호도 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서 아예 불법을 자행하면서 자기 돈만 벌겠다는 행위는 악한 범죄입니다.
교회에 오면 반겨주니 하나님의 사랑인 줄 착각하고 그렇게 교회생활하기를 수십 년간씩 합니다. 그러다 한국교회는 엉망이 되어 지금은 현실적으로 사회로부터 욕을 듣는 지경입니다.
엡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변화를 입은 자들은, 행2:44-45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자원하는 심령의 사랑 운동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맘이 그랬습니다.
이 시대는 초대 한국교회 신비주의 같은 이단들도 잔여하나 그보다 교회 내부에서 이기주의가 팽창하면서 동시에 자기 영광을 반영하려는 개인주의가 판을 칩니다.
자기영광주의의 마귀 술책에 빠진 정신으로 목회자는 큰 교회주의에 빠졌고 교인들은 불법적이고 세속적으로 살아도 돈만 벌어 잘살기만 하면 축복이라고 치부하고 교회가 그렇게 봐주고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삭개오는 그가 육신적으로도 아브라함의 후예이겠지만 진정으로 변화를 받았기에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즉 구원받았음을 확증 받았습니다.
본문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신앙은 교회에서 고백했으면 이제 밖에서 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고백의 열매입니다. 맨날 교회 안에서 아멘 하고 노래 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 생활에서 바로 살아야 하고 공의롭게 살아서 참된 열매로 주님께 인증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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