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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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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51411 |
마리아 찬송
눅 1:46-55, 대림절 넷째 주일, 2015년 12월20일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는 성경에 흔하게 나오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이름이 마리아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분에 대한 이야기가 예상보다 적게 나옵니다. 복음서에만 몇몇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기로 법적으로는 결정되었지만 아직 동거하기 전에 임신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미혼모, 또는 속도위반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마리아는 이런 일로 인해서 구설수에 시달렸을 겁니다. 당시 결혼 적령기가 초경이 시작되는 13세 이후라는 걸 감안하면 대략 15세 전후에 예수를 출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에 마리아의 나이는 사십대 후반이었겠지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어머니가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무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습니다. 행 1:14절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요한의 집 다락방에 모인 사람 중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평소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이모저모 했겠지요. 예수를 임신했을 때에 자신의 느낌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마리아의 이런 말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정리한 텍스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눅 1:46-55절의 ‘마리아 찬송’입니다.
누가복음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 잉태 고지를 받고 친족 간인 엘리사벳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엘리사벳은 가임기간이 지난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주보 표지에 실린 사진이 바로 임신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랫말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내용을 알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1. 찬송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46-50절)
마리아는 46절과 47절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 구주를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마리아 찬송은 기쁨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찬송과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뒤이어 나옵니다. 첫째는 ‘여종의 비천함’(48절)을 돌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여종은 자기를 낮추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실제로 그런 처지였습니다. 공주나 여왕이나 귀족의 딸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딸입니다. 더구나 당시에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훨씬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아무도 비천한 여종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그런 평가를 받을까 해서 늘 조바심을 느낍니다. 사람들에게 품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 수고를 폄훼할 거는 없지만, 그런 방식으로 일정한 정도의 품위를 얻었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 비천한 여종과 같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품위가 있어 보일 뿐이지 안으로는 별 것이 없습니다. 품위에 치우치다보면 오히려 천박해질 뿐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태도입니다. 이것은 열등감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실존을 정확하게 뚫어보았고, 그제야 그는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쳤다는 말씀처럼(롬 5:20)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자리매김할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큰일을(49절)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큰일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이 인류 구원의 결정적인 통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주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로마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 기도를 바치는 것은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는 마리아 찬송을 반복해서 불렀고 그 크고 놀라운 사실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메시야를 보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모두 마리아와 똑같은 심정으로,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신앙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구원 행위를 기뻐하고 노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다닐 수는 있습니다. 마치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종교 전문가 행세를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에만 마음을 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해일이 밀려오는데도 노름에 빠진 사람처럼 지금 눈앞에 벌어진 것에만 몰두함으로써 더 중요한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즉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머리로는 알아들어도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여도 그것을 실제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경험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경험에 가까이 갔고, 어떤 분들은 중간쯤 머물고, 어떤 분들은 정말 거리가 멀기도 할 겁니다. 테니스 실력에도 차이가 많은 것처럼 하나님 경험에도 차이가 많습니다. 어떻게 마리아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더 근본적으로 성경이 그 중심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 49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마리아는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가시덤불 앞에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는 말씀을 듣고 신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이상한 빛, 또는 이상한 소리를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약간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2015년 12월20일입니다. 1월1일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금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은 다 어디 간 것일까요? 내년에도 다시 그런 세월이 지나갈 것입니다. 마리아 이야기는 2천 년 전에 일어난 것이고, 지금 우리는 2천년이 지나서 그 이야기를 읽었고, 또 뒤로 2천년이 지나면 우리의 후손들이 4천 년 전의 마리아 이야기를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득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세상의 비밀이요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모든 현상들을 성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런 일을 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무한히 축소되어 무(無)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거룩한 사건에 들어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도 느끼시지요?
2. 하나님이 행하신 일(51-55)
바로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서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설명합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것들입니다. 누가복음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는 사실입니다. 51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교만하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에 둔다는 것이며, 더 나가서 자기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다수가 교만한 방식으로 삽니다.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재산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교만합니다. 고급의 정치와 법조계도 교만한 사람들이 많고, 육체노동 현장에도 교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기회만 되면 교만합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의 한계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피조물은 뭔가를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의 소유가 없으면 허전해서 견뎌내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이 휘브리스, 즉 교만을 죄라고 규정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교만으로 인해서 내면이 불일치에 이릅니다. 참된 만족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는 말은 아무리 겉멋을 부려도 교만한 사람은 내면세계의 황폐화를 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교만하지 않은 사람은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52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 곧 정의의 실현입니다. 권세는 다른 이를 강제로 억압하는 힘, 즉 권력입니다. 성경시대에 권력은 주로 왕, 귀족, 장군, 고급관리에게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도 권력이 있었습니다. 권력이라고 해서 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법은 무용지물이 될 겁니다. 군대나 경찰에도 일정한 권력이 있어야 치안 유지가 가능합니다. 본문은 그런 권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의 바벨론 제국과 신약의 로마 제국이 행사하던 폭력적인 권력을 말합니다. 이들의 권력은 사회와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질서도 여전히 그들 제국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들리시는지요. 예수님이 당시 최고 권력인 로마 제국의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해서 척결할 것은 척결하고 세울 것은 세우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요? 일단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들이 결국 망했다는 사실을 본다면 정의가 세워진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권력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렁과 같은 인생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는 제가 설교 시간에 일일이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일상에서 늘 경험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지금 어떻게 운용되고 있을까요? 며칠 전 정의화 국회의장은 지금 대한민국에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원칙이 흔들린다고 일갈했습니다. 정부가 권력을 잘못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국제 질서에서도 여전히 권력이 압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신 걸까요? 불평등한 세상을 왜 두고 보시는 걸까요? 왜 힘과 힘의 대결로만 세상이 치닫도록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무기력한 것처럼 모입니다. 이 대답은 다음의 세 번째 항목의 설명에서 저절로 주어질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빈부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두 번째 항목이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경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6:21절과 25절에서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을 터인데, 배부름을 얻을 것이며, 부요한 자는 화가 있을 터인데, 그들은 주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현실과 동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은 빈부로 여전히 나뉘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차이는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집니다. 우리나라의 빈부격차 문제는 좀더 유별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차이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조어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부와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리는 자를 배불리셨다는 본문은 뭔가 착각한 것일까요? 그 말씀을 우리가 계속 붙들고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말씀은 말씀이고 세상살이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행위를 우리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일을 이루셨다고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비천한 자리는 없고, 이것보다 더 저주스런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을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비천한 자리에서 구원받은 것이며, 굶주림에서 배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말이 공허하게 들리시는지요? 지금 당장 실제 삶이 힘겨운 상황에서 그런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런 주장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민중의 아편’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여기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는 그런 분은 없을 겁니다. 공허하다기보다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운명이 안타까워서 하루빨리 세상이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그래서 본문이 말하는 일들이 현실화되기를 간절히 바랄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그런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전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이 질적으로 변합니다. 이런 기다림에서만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구약 전체 신앙의 요체라 할 기다림의 절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예수 재림, 즉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 찬송이 말하는 세상이 예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는 대림절 신앙은 두 가지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영적인 상상력입니다. 그런 상상력은 이미 구약부터 내려온 것들입니다. 사자가 풀을 뜯게 되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되는 세상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세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날에 벌어질 일들을 이 현실에서 구현해보겠다는 의지와 결단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 변혁의 근원적 에너지입니다. 처음부터 실제로 노예와 여자를 똑같은 신자들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의 시대정신인 로마제국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혁명적 에너지라고 해야 옳습니다. 앞에서 짚은 것처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게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믿습니다. 마리아 찬송이 말하듯이 그를 통해서 세상이 전적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력자를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를 높이고, 주리는 자를 배부르게 하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저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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