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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3: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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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53906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주현 후 첫째 주일, 2016년 1월10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오늘 제3 독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던 인물은 요한입니다.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앞부분에 많이 나옵니다. 그의 출생이나 그가 출가하여 광야에서 살아가던 모습도 특이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장면이 눅 3:21-22절에 간략하지만 의미가 풍부한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자 하늘이 열려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강림했고,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와 비슷한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일명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순간에 용모가 변했고, 옷에서 빛이 났습니다. 구약에서 영웅적인 면모가 가장 강했던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세례 받는 장면과 산에 올랐던 장면에서 똑같이 하늘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는 소리가 난 것으로 복음서 기자가 말합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게 무엇을 가리킬까요? 천둥소리인가요? 어떤 환청 비슷한 걸까요? 시인들의 문학적인 표현일까요? 아니면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에서 베토벤이 ‘사람들이 나를 귀가 먹었다고 하지만 내 귀에는 끊임없이 음악소리가 들려.’라고 한 것처럼 어떤 예술적인 경험을 저런 식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인데, 이런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어린 사무엘도 자다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즘도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소리로 들은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입니다.
‘하늘의 소리’에서 우선 하늘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 시대의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비밀 가득한 영역이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따르면 하늘에는 물이 가득했습니다. 비는 하늘의 문이 열려서 물이 쏟아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낮하늘과 밤하늘이 완전히 다릅니다. 태양의 기울기에 따라서 계절도 바뀌고 계절에 따라서 낮과 밤의 길이도 달라집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땅과 거기서 살아가는 모든 동식물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는 말은 그 소리가 궁극적인 진리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울린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일단 어색한 게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신(神)입니다. 신이 아들을 둔다, 자녀를 둔다는 것은 헬라 로마 신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성서의 세계에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신은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아내 헤라와 다른 여신과 인간 여자를 통해서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그런 신화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자식을 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사람처럼 정말 아들을 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에 대한 또 다른 오해도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본질에 대한 근거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이라는 사실이 이 문구에 들어있다고 말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입장에 정서적으로는 공감할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많이 행하신 것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합니다. 불치병 환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거나 심지어는 호수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분이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옳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너는 내 아들이라.”는 구약 시편 2:7절을 인용한 겁니다. 시편 2편은 유대 왕 즉위식 때 불리던 찬송입니다. 늙은 왕이 죽고 새 젊은 왕이 즉위할 때 왕권이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변 여러 나라가 유대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경고하는 말씀이 바로 시 2편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의 왕을 직접 세우셨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즉위식을 통해서 유대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됩니다. 시편은 단지 유대의 왕권을 강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유대의 왕이 온 세계를 다스리는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계를 심판하고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편의 선포인 그 메시아사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의 메시아사상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은 원래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사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에 따르면 메시아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단칼에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2편은 유대의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8절과 9절에서 메시아의 능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메시아가 오면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다윗 왕조인 유대를 우두머리 국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아라고 한다면 무소불위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이나 장군으로 등장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메시아사상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을 제압할 만한 외적인 카리스마가 없었습니다.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고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었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출가하기 전까지 당연히 목수로 살았을 테니, 당시 엘리트 집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을 빗대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요 1:46)도 있었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낸다는 소문(마 11:19)도 있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마 13:53-58). 한 마디로 예수님은 아주 평범해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생명을 완성할 재림주로 믿지만 당시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거부한 게 아니라 아무런 근거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다고 해서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방조 내지 동조했습니다.
우리가 2천 년 전 당시를 살았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거부하고 더 나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겁니다. 그 일이 정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이 자기들로서는 하나님의 뜻이나 로마 실정법의 차원에서 옳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의였습니다. 이런 불의는 인격적으로 병든 사람에게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시대가 악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히틀러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자기들 나름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IS(이슬람국가)의 끔찍한 테러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순교자적 행위라고 여길 겁니다. 왜곡된 메시아니즘의 한 전형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종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도 왜곡된 메시아니즘이 아닐까요? 인간 구원을 명분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파멸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왜 그런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느 시대에나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을 열어두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투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소수의 추종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도자 집단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남이 부러워할만한 지위에 오르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영적인 눈이 밝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산헤드린 회원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나가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경험은 예수 부활입니다.
부활경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선의의 거짓말일까요? 어떤 환상을 보고 착각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몇 개 나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입니다. 이들과 예수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또 죽었지만, 예수님은 승천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살아난 다음에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일부의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이 경험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 총독이나 자신을 고발한 제사장 가야바에게,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되는 계기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참 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부활, 영생,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상투적인 생명 경험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작동되는 생명 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상투적인 생명 원리가 뭔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겁니다. 돈 잘 벌어서 배불리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도 만족이 안 되니 사회적인 지위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대상이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생명을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것에 묶여 있는 한 예수부활 경험은 어렵습니다. 왕이나 장군처럼 승리자 메시아사상에 묶여 있어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가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궁극적인 생명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을 부활 생명의 실체로 경험했다는 말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했다는 말은 똑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시편 2:7절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주의 현현(Epiphany of the Lord)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를 기리는 절기가 주현절입니다. 금년에는 1월6일이 주현절이었고, 오늘 1월10일이 주현 후 첫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최초 설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먼 하늘이 아니라 가까이 왔으니 그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통치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숨을 쉬듯이 하나님의 통치와 그 생명은 우리와 함께 합니다.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 경험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이 세상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해왕성으로부터 박테리아까지, 우주 저 끝에서부터 바로 눈앞의 나무와 친구들까지, 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통치라니, 이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요?
마 6:24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신 이유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에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소유와 사회적 지위와 명망가 친구들이나 세계를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이 아니라 함께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와 계십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에서, 결정적으로는 부활을 통해서 이 모든 궁극적인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굽니까? 그를 어떤 분으로 경험하십니까? 그는 도덕교사가 아닙니다. 그는 액땜을 대신 맡아주는 무당도 아닙니다. 율법 선생도 아닙니다. 마술사도 아닙니다. 강력한 힘으로 세상의 악을 척결하는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닙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상담가도 아니고 멘토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실체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십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실질적으로(real)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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