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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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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5.5.17 주일설교 희망의교회 http://hopech.kr |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창20:1-7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질 급한 것이 약점이어서 항상 그것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합니다. 그런 사람은 돈 문제만 나오면 벌벌 떠는 좁고 치사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그렇게 낭패를 당하고도, 결정적인 때 또 여지없이 술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이 많아서 항상 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약점은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대한 영웅들을 보면 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완벽주의자였으며,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해야만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교활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큰 소리를 쳤지만, 뒷감당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지식은 많았고 문장력은 뛰어났지만, 말이 어눌하고 인물이 시원치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고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약점은 무엇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와주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점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아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10년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우리는 간혹 별로 잘생기지 못한 남자들이 미인 아내를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남편이 다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경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콤플랙스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다른 남자들이 넘보지는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사는 값을 톡톡히 치루는 셈이지요.
아브라함이 바로 이러한 콤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서 살게 될 때마다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이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1-2절).
이런 일은 20여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었는데, 그 때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 결과 바로가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시지 않았더라면, 사라는 바로의 아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대한 콤플랙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여자는 내 누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라의 나이는 몇 살이었겠습니까? 90세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아가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라가 90세나 되는 할머니였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아내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의 콤플랙스
아브라함은 25년 전에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 때마다 아브라함은 불안감과 두려움과 어색함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특히 자기 아내 사라는 뛰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은 처음 대할 때 대개 무뚝뚝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사라와 자기를 그러한 눈으로 쳐다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불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낯선 곳으로 옮겨갈 때마다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아버님께서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이혼할 때와 가까운 사람이 죽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그 다음에는 이사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집을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다시 사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 이사를 가면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싫고 부담스러웠습니다. 사실 막상 전학을 해서 학교생활을 하면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그렇게 싫고 부담스러웠습니다. 한 번은 5학년 때 전학을 하게 되었는데, 혼자서 학교에 가서 전학 수속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교무실로 들어가질 못하고 오전 내내 화장실 옆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선생님 눈에 띄어서 겨우 전학 수속을 마쳤습니다. 지금도 낯선 곳에 가면 주눅이 듭니다. 낯선 사람들 상대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를 목사로 만드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모를 일입니다.
저의 약점을 말씀드렸는데, 당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거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전도하는 일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나 아니라도 전도 잘하는 다른 사람이 전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전도하지 않으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약점을 과감하게 극복하고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점을 주신 이유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약점을 주셨을까요? 이런 약점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약점들을 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고질적인 병으로 매우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쳐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7-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점을 주신 이유는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약점들이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교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잘 나가다가 꼭 그 대목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넘어지면서 우리는 다시 기억합니다. “그래, 나는 역시 부족해. 나는 죄인이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안 돼!”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교만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중병입니다. 미약하고 죄인인 인간이 교만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고,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교만해지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교만해진 우리를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약점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약점이 들어났을 때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여전히 기세등등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의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때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의 약점을 덮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실수
아브라함은 그가 가지고 있던 약점 때문에 또 다시 큰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랄 지방으로 이주했을 때,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사라는 자기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가고 말았습니다(2절). 90세나 되는 사라를 이렇게 당장에 데려간 것을 보면, 사라가 얼마나 미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는 자기의 아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을까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입니다. 사라가 남편 없는 여자라고 하니까 별 문제 없이 데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여 년 전,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사라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지도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럴 만도 했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더구나 사라는 지금 약속의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내를 지키지 못했고, 누이라고 속인 나머지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더라면, 그리고 이제 곧 사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이 태어나게 될 것을 생각했다면, 어떻게 사라를 그렇게 쉽게 내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지켰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도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은 정말 한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해주셨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이제 곧 약속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지 말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를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목숨을 다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해 싸워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내가 아브라함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큰 은혜를 주셨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취하거나 어려움을 피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번번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유혹을 당할 때 너무나도 쉽게 넘어집니다. 내가 과연 5-60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이며 목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나무랄 형편이 못됩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24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준비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24년 동안, 늘 믿음 없이 주저앉기 일쑤였던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사라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사라는 24년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약속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이렇게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껏 모든 것을 준비해오셨고, 이제 그 일이 이루어지려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단번에 망쳐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건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아내를 빼앗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아들을 낳을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라를 불신자, 이방인의 손에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그 약속을 취소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신 약속이 이방인에게 순결을 짓밟힌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까요?
결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불신앙으로 초래된 실망스런 문제를 가장 선하고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 집안에 어떤 질병을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사라를 가까이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6,17절). 그리하여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일단 사라의 순결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통하여 아비멜렉을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니리 그는 남편 있는 여자임이라”(3절) 아비멜렉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선지자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혼비백산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를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
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보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아비멜렉의 목숨이 아브라함에게 달려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셨고, 사라를 무사히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 집안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선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의 선지자입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이거나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복음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좋아질수록 안 믿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편하고 손해 보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의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약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약점 때문에 번번이 넘어집니다. 때로는 이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교회를 그만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은 우리가 교만하지 못하도록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보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하며,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약점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얼마든지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약점 때문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는 성도, 하나님께 귀하에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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