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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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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5.12.27 여의도순복음교회 |
강한 폭풍이 불어 닥치면 길가의 가로수는 뽑히나 산위에 많은 나무들은 까딱없이 서 있습니다. 그 이유가 산에서 자란 나무는 흙 밑에서 뿌리가 서로 껴안고 붙잡아주기 때문에 폭풍우를 견딜 수가 있지만 가로수는 고독하게 혼자 서 있으니 강한 바람이 불면 뿌리 채 뽑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관용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는 사랑이 없는 율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를 짓고도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이 세상은 비난의 소리로 가득하여 모두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서 자기와 이웃을 비교하고 평가하면 너도 나도 다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1.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향해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많이 사용하는 율법과 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성경에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한 여자를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 쳐놓고 묻는 말이 “이 여자가 간음중에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땅에 쓰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쓰시는 글을 어깨너머로 보았습니다. 무슨 글을 썼다고 생각합니까?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던 이 여자는 불안과 공포에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자마자 한 사람, 두 사람 돌을 두고서 돌아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과 끌려왔던 그 여자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끌고 온 자들이 돌에 맞아 죽을 만한 죄를 전부 들추어내어 적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이 여자를 돌로 쳤다가는 그 다음 자기가 돌 맞아야 될 형편이 되자 모두 돌을 땅에 던지고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하자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살아라”고 하시고 여인을 돌려보내셨습니다.
그것이 율법과 사랑의 비교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서 있는 법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사랑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사랑은 생명이고, 율법은 사망입니다. 율법이 엄히 시행되는 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도 아버지, 어머니가 무섭게 율법적으로 행하면 아이들이 기가 죽어버리고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집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면 생명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도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유대민족을 다스렸지만 율법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를 흘려 “내가 다 이루었다”하셨을 때,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밑에 엎드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 너는 용서 받았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항상 용서와 사랑이 따르나 율법의 곁에 있으면 항상 정죄와 죽음이 따라옵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에서 30절을 보면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나간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주워 먹다가 결국 자기의 비천함을 느끼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매일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뛰어나와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이 자식아. 잘 왔다! 그래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그렇게 되지 않느냐? 이 아이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아들이 된 표적인 반지를 끼워 줘라. 그러고 주인만 신는 신발을 신기어라. 제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도로 찾았으니 즐거워하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형이 밭에서 일하다가 늦게 돌아와 동생이 돌아옴을 기뻐하는 잔치가 열린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나는 안 들어갑니다. 둘째하고 잘 사세요. 나는 아버지를 거역치 아니하고 충실하게 법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동생은 방탕하여 있는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돌아와도 그렇게 좋아합니까?”라고 하자 아버지가 “얘야, 너는 나하고 같이 있으니 이 재산이 다 네 것이다. 내가 다 너에게 줄 생각이다. 그런데 네 동생은 아직 비천한 것이 세상에 나가서 안 죽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들어와서 같이 즐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나는 그런 더러운 죄인하고는 같이 안 합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며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행하지 않는 자와 나는 관계하지 않겠다’라고 사랑이 아무리 권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 들어가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행복이 있으나 율법에는 생명이 없고, 행복이 없고, 심판과 사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나 율법은 걸리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랑제일주의로 나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엔 생명이 있고, 넘치는 은혜와 행복이 있습니다. 최근 ‘비난 게임’이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벤 대트너 박사’는 수많은 기업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했는데, 조직을 와해시키는 최악의 문제들은 모두 비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임 회피와 남 탓하기가 팽배한 조직은 그것이 국가든 회사든 비영리단체든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에너지와 시간의 낭비, 인력의 이탈이 일어나 결국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리학 연구결과를 토대로 ‘인간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비난을 돌리는 것은 우리 유전자에게 새겨져있는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대트너 박사는 “이러한 비난 게임에 승자가 없으며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난 게임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게임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인간안에는 율법과 비난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서로 쳐다보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며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정치가는 또 다른 정치가를 비난합니다. ‘남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하고 자기가 책임을 걸머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쥐꼬리만한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정죄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행복해지는데 진실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정죄하기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사랑을 주어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단체나 교회가 갈라져서 정죄하고 심판하고 물고 찢는 일은 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런 단체는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5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비난은 또 다른 비난을 낳고,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파멸로 몰고 갑니다. 비난 게임을 하면 이긴 사람도 없고 진 사람도 없고, 모두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함께, 율법은 혼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친구가 많아지나 율법으로 나아가면 혼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서로 붙잡아 주는 삶이 사랑이요, 율법은 이웃을 심판하고 멀리하여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율법을 들고 나와서 정죄하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면 전부 다 죄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면 주님이 하나도 없이 책임을 지고 십자가를 걸머지셨기 때문에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용기와 힘이 생기고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기고 생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꿈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강한 바람에 금방 뽑혀 버리는 가로수나 정원에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잘 쓰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껴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거센 풍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뿌리가 서로 엉켜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휘청거리고 너 나 없이 먹고 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숲의 나무들처럼 서로서로 끌어안고 붙들어주면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과 사랑
갈라디아서 3장 21절에서 24절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율법 하에 태어나서 살기 때문에 그들이 보는 것이 율법이요, 듣는 것이 율법이요, 행하는 것이 율법이요, 삶 전체가 율법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도리가 없고, 모두 정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모든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한 이유는 예수님만이 사는 길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ㄱ, ㄴ’을 가르치듯이 율법의 정죄함은 모든 사람에게 “다른 종교에 의지해서 구원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와 사랑과 구원이 있으니 예수께로 가자”라고 하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놓기 위해서 율법 아래에서 정죄를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은 서로 다른 길이의 수십 개 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고 작은 관들이 모여 어우러져서 함께 소리를 내니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같은 말을 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세상에 내고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러기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V자형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날아가는데 신앙도 혼자서 예수님을 믿으면 참 힘들 때가 많습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외로울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병들었을 때 혼자서 이겨나가려 하면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 신앙의 친구가 있어서 서로 힘을 합쳐서 기도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야 멀리 걸어가고, 함께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함께 해결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지치지 않고 멀리멀리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려면 서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사랑을 통해서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 붙들어주고 밀어주고 끌어안아야 잘 가고,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멀고 험한 인생길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주님이시므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율법 아래에서 우리들 지은 죄를 예수님이 다 사랑으로 갚아버리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사람을 죽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어떠한 종교나 윤리나 도덕이나 사랑을 빼버리면 의식과 형식에 불과하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센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통해 값 주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바로 그분이 길이요, 그분이 바로 진리요, 그분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서로 간에 하나됨이 아니라, 분열과 파멸을 가져옵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시든 풀과 같이 생명력이 위축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사랑하며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교수’는 “우리사회는 천리마를 죽이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천리마가 천리를 뛰도록 응원하고 격려하기는 커녕, 천리마에 짐을 지우고 그 무게에 짓눌려 죽게 하는 것이 한국사회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많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악을 뿌리면 악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오늘 심은 것이 우리의 내일이 됩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속 빙점’이라는 책에 “일생을 마친 다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준 것이다. 악착스레 모은 돈이나 재산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남지 않지만, 숨은 적선, 진실한 충고, 따뜻한 격려의 말 같은 것은 언제까지 남는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 놓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하시며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식어가는 세대일수록 더욱 열심히 사랑하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여행 중에 주막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떠나려고 하는데, 주막에 있던 주막집 어린 딸이 톨스토이의 빨간 가방이 가지고 싶어서 아픈 중에서도 빨간 가방을 자꾸 만지고 어머니에게 이 빨간 가방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이 아이에게 빨간 가방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가방을 주려고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데 이런 글을 새겼습니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살면서 생각해봐야 할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입니까?” 둘째, “인생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셋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인생에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톨스토이의 말대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내년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축복해”라는 말 한 마디라도 전달해서 청산하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한해를 돌아보며 은혜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율법의 잣대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누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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