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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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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9절-2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벙어리 귀신이 들어가면 물로도 불로도 뛰어든다. 그러니까 자기가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고 물인지 불인지 구별을 못한다는 것이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물불을 못 가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모르는 어린 교인들에게, 성격도 성질도 고치지 못한 교인들에게 ‘불로 불로, 굴러 굴러’ 하는 이게 다 무슨 병에 걸린 거냐? 간질병이다. ‘성령의 불 받아라’ 하면 그리로 ‘우’ 몰려가고, ‘물질축복이다’ 하면 그리로 또 ‘우’ 몰려가고, 그런 데 가서 팍 엎어지고 저런 데 가서 팍 엎어지고 뒹구는 것은 귀신이 그 사람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다.
부흥강사가 ‘휙’ 하면 이리 넘어지고, ‘휙’ 하면 저리 넘어지고 하는 이건 교인들을 가지고 노는 거다. ‘입을 크게 벌려라’ 하며 하늘을 보고 입을 벌리게 하는 것은 교인들을 갖고 노는 거다. 그러는 장면에서는 자기 옷이 어떻게 되는지? 벗어지는지 그걸 모르는 거다. 이게 다 귀신이 들려서 나오는 장면들이다.
아이가 벌벌 떠는 것은 성령처럼 보이느라고 귀신이 야양을 떠는 것이고, 거품을 흘리는 것은 사람들로 무섭게 해주는 장면이다. 진리이치를 못 알아들으니 귀머거리 귀신이요, 진리이치의 말을 못하니 벙어리 귀신이다. 사람은 못 들으면 말을 못한다. 이치가 그렇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니 즉, 인생의 삶의 노정에서 벙어리 귀신에 붙들려서 방언을 하는 소리가 뜻이 없고 전달할 수 없는 소리이니 그게 벙어리 귀신들린 것이다. 말을 하면 뜻이 분명하게 전달이 돼야 하는데 뜻이 전달이 안 되는 것은 귀머거리다. 뜻을 전달하는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너 귀먹었느냐’ 하고, ‘네가 벙어리냐’ 한다. 또 말을 하는데 뜻을 정확히 전달을 못하면 ‘말 좀 똑바로 하라’ 한다. 이건 벙어리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교인들이 벙어리 귀신이 들려서 자기는 성령이 들린 줄로 착각을 하고 있고, 또 자기 얼굴이 깎이고 자기 인격이 깎이고 있는데도 이걸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말세교회의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오늘날 이게 심각하다. 교회에서 신앙이라고 하는 형태가, 신앙의 양상이 참 심각하다.
22절-24절: 사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른다. 앞에서도 예수님께 선생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볼 때 예수님께서는 만능의 능력자시니까 못하실 일은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 후에 온 인류에게 해당되는 종합적인 세 가지 큰 시험을 마귀로부터 받았지만 당신의 만능의 능력으로 그 시험을 이기지 않고 순전히 인성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의 정신 사상으로 이겨냈고, 죄와 사망을 이긴 분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서 잘 못 믿는다. 잘 알면 믿고 들어가는 건데 모르니까 몰라서 못 믿는다. 그러니까 자기에게는 그 효력이 안 나온다. 이건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 분을 안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으로 나타나 보여주는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당신을 인격적으로 못 믿겠소’ 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주님과의 관계성이 인격적으로 믿고 들어가야 할 텐데 그 면이 부실하니까 인격적으로 안 들어가는 거다. 알고 보면 자기의 아는 것으로 주장하는 고집불통이 그만큼 주님과 안 통하게 만들고 있는 거다. 주님과 안 통하는 것이 가만 보면 자기에게 들어있다.
주님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당시의 누구를 보고 이 말씀을 하는 거냐?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만일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이 있다면 고쳐주시고, 의심을 하고 있다면 믿음 없는 그 마음을 보시고 안 고쳐주신다면 어떤 해석이 될까?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이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셈이 된다.
그러면 이 말은 어떻게 들리느냐? 오늘날 많은 교회의 사역자들이, 많은 교인들이 병자에게 안수를 하니 그 병자가 나으면 누구의 능력이 있다고 하느냐? 안수하는 그 자에게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에게 안수를 해도 안 나으면 안수자는 자기에게 능력이 없다고 하느냐, 병자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느냐? 병자에게 믿음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안수자는 참 종이냐, 거짓된 사기꾼이냐?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없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 주권과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이건 인격적 관계가 들어있다.
아이의 소원대로 예수님이 해주는 것이 믿음이냐, 아이에게 예수님의 소원대로 되기 바라는 것이 믿음이냐? 후자다. 누구의 뜻대로 되는 게 믿음이냐? 내 요구대로 되는 게 믿음이냐, 주님의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내가 믿는 게 믿음이냐? 하나님 말씀대로, 예수님의 소원대로 되는 게 믿음이다.
25절-29절: 무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쫓았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1. 그 무리들이 예수님 당신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2. 무리들이 아이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3. 아니면 무리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4. 무리가 달려오는 걸 보면 귀신이 놀라서 안 나가기 때문에? 5. 무리들이 보는 데서 하면 무리들도 보고 따라하다가 귀신이 안 나간다면 성질이 나서 그 아이를 때려죽일 수도 있어서? 어느 거냐? 무리들이 보는 데서 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을까? 오늘날 교회에서 거짓 인도자들이 예수님의 뭘 보고 능력을 행한다고 하느냐?
무리들을 향해서 비유와 말씀을 많이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해석을 잘 해 주셨다. 율법주의자들에게도 비유로 하시고, 시험을 거는 그들에게는 유구무언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죽 되어진 일을 보면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주님이 제자들에게 빠짐없이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신앙의 높은 차원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 하심이다. 그런데 이걸 보는 자기가 목사라면,
1. 무리와 같은 성격과 성질을 가져야 되는 건지? 2 율법주의 교사들과 같은 성격과 성질을 가져야 되는 건지? 그러면 그들과 같이 움직이게 된다. 3.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지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그런 신앙의 성격 성질을 가져야 하는 건지? 4. 그리고 현재 자기는 어떤 부류들과 모이기만 하면 자지러지도록 재미가 있고, 그들과 같이 있으면 좋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건지? 자기 속에 들어있는 그게 뭐냐? 어떤 사람을 만나면 잘 통하고 있는지 자기의 신앙의 질을 느끼라는 것이다.
자기가 되고 안 된 것만큼이 그게 자기의 수준인고로 여기에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주님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지금 어떤 신앙의 질이 들어가 있는지에 따라서 자기에 대한 주님이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다.
고침을 받은 아이를 무리들과 똑같이 취급을 할 수는 없다. 무리들에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없다. 그러나 나은 아이에게는 나음을 받았으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들어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역사가 아이에게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귀신이 나갔고 고침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는 무리들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은 이 아이를 무리들 속에 같이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은 그 아이를 무리 속에 같이 두게 되면 그 아이가 자라면서 영적 영인성장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아이를 고쳐주심은 ‘벙어리 되고 귀먹고 더러운 귀신이 네 속에 들어가면 좋겠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 묻는 것이고, 또한 ‘낫게 했는데 귀신이 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리들 속에 너를 다시 또 집어넣겠느냐’ 하는 것을 판단적으로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 자기에게 묻는 거고, 정답을 내리라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에게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그 아이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했다. 더럽다고 하는 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덕성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사람의 겉보다 더 더러운 것은 그 사람의 양심이다. 귀신까지 들린 도덕성이니 구역질이 날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성격 성질이 난폭하거나 욕설을 잘하고 변심이 심하면 ‘그 사람 참 더럽다’ 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성경의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방언이나 하고 꿈 자랑이나 하고 미신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자는 신앙이라고 하는 그 도덕성이 하나님 앞에서 더럽다. 그런 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 그런 요소와 감염성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분명하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한 질서정연하지 못한 활동들, 그 언행심사, 그 성격과 성질들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다.
더럽다는 것은 지혜지식 면에서의 말이냐, 도덕성적인 면에서의 말이냐, 능력성적인 면에서의 말이냐? 도덕성적인 면에서 더럽다는 것이다. 영적 도덕성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놓고 보면 그게 더러운 건지, 깨끗한 건지 나오는 것이다.
일반 도덕성은 인간보기에 아무리 좋게 보여도 하나님 앞에 정결한 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고 나온 타락되고 저주받은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도덕성은 영생도 아니다.
그러면 이 일반 도덕성을 가지고 생명의 운동이 되느냐? 안 된다. 영운동이 되느냐? 안 된다. 원리원칙이 이치가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이라야 하나님 앞에 복음운동이 돼 나가는 것이다 .
아이에게 거듭나지 못한 불순하고 불결한 무리들의 정신 사상이 들어가서 아이로 성격 성질이 난폭하게 나오도록 하면 안 되듯이 무리들의 혼합 혼성 혼돈된, 구별 분별되지 못한 즉, 진리이치가 아닌 그곳에서 ‘신앙이 자라겠거니, 믿음이 들겠거니’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벙어리 되고 귀먹고 진리이치를 못 알아듣고 추접을 떠는 교인이 되고 만다. 성경을 통해서 모든 교회를 보아야 하고, 성경의 계시사상 정신을 가지고 신앙의 질을 봐야 한다.
예수님 앞에 오니 귀신이 그 아이로 크게 발작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나쁜 것으로 굳어진 고자세, 그러니까 고차원이 아니고 나쁜 것으로 굳어진 그 고자세를 말하는 것이니 곧, 죽어도 귀신이 안 나가겠다는 발광이기도 하다. 진리 앞에 사람이 안 깨지고 사회적인 신분이나 종교적 신분을 가지고 고자세로 있는 것은 안 나가겠다는 귀신의 그 정신이다.
귀신이 나갈 때에 아이를 넘어뜨린 것은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갈 때는 해를 주고 나간다는 것, 또 하나는 귀신이 나가니까 고자세로 된 그것이 탁 꺾이고 넘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넘어진 이건 주님 앞에 바로 넘어진 거냐, 잘못 넘어진 거냐?
귀신이 나가자 아이가 죽은 것처럼 된 것은 그동안 더러운 귀신이 아이의 속에서 성령인 것처럼 하면서 아이로 하여금 기를 펄펄 살게 했다는 말이 된다. 아이의 그 힘이 귀신의 힘이었다 그 말이다. 그 힘 자체가 귀신의 힘으로 나왔다는 말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 힘이 성령의 힘이라면 그 사람은 지혜롭다.
이렇게 되니 무리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 귀신이 나가면 사람이 죽는 거냐, 이제 정상으로 사는 거냐? 귀신이 나가면 정상적으로 사는 거다.
이걸 보고 자기 속에 비정상적인 성격 성질을 느낄 수 있느냐? 자기가 그걸 붙들고 있어야 사는 거냐, 그거 다 내보내야 사는 거냐? 내보내야 사는 거다. 그런데 왜 안 내보내느냐? 내보내면 자기가 죽을까 싶어서다. 그러니까 이건 만능의 능력자를 인격적으로 못 믿는다는 말이 되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구원 앞에서는 사람이 조용해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 예수님 앞에서 떠들고 있다는 것은 무리들처럼 영적 면이 죽은 건지, 육적 면이 죽은 건지를 판단을 못하는 자들이다. 이런 장면의 그 정신들이, 성격 성질들이 자기에게 하루에 몇 번씩, 아니면 하루 온 종일 나타나고 있는 거냐? 졸면서는 이 말씀을 못 듣는다. 정신을 써야 한다.
그런데 교인들이 귀신이 들려서 팔팔 거리는 그것을 보고 성령을 받았다느니 그런 말을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구원 앞에서는 조용해져야 참 사는 건데 구원의 도리와 이치를 말해주면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무당교회에 가서 신굿을 하면 참 신이 난다.
주님 앞에서 조용해지니까 생명적 역사의 주님의 손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이제는 넘어진 아이가 바로 서게 된다. 정신이 마음이 모든 것이 바로 서게 되더라. 주님의 이 손에 붙잡히면 신앙이 넘어진 어린 교인이 이제 하나님 앞에 정상적으로 바로 서는 거다.
아이가 고침을 받고 주님 앞에 섰는데, 이 아이가 선 것은 무리들이 서 있는 바탕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무리들은 자기들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선 바탕과, 아이가 주님으로부터 나아서 선 바탕과는 근본적으로 바탕이 다르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선 이 아이는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감화가 다르고 정신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이 아이는 성령의 교훈으로 감화 감동으로 자라는 거다. 그러나 무리에게는 그 역사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장면을 보고 그 안에는 자기의 잘못된 성격 성질도 다 들어있으니 이 말씀에서 그걸 깨달아서 구원의 본질에 정확한 의사단일성의 적중성으로 들어간다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신앙적으로 성장되고 장성되는 바탕이 확실한 것이다. 이건 반석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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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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