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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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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1년 1월 23일 주일설교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20779108 |
성경말씀 : 출애굽기 20장 3절~4절
설교제목 : “무(無)의 하느님을 알자”
<책 이야기>
요즘 얼마 전에 읽은 짧은 글, 『유영모의 신(神) 이해 : ‘무존지존(無存之存)의 하나님’을 중심으로(김명수 교수)』을 찬찬히 곱씹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글에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思考)에 따르면,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면 참이 되지만,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이 된다. 그러나 동양전통의 사유방식인 도가(道家)철학에서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양도논법(兩刀論法)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유를 지양(止揚)한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관계를 한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근거가 되고, 존재하는 것은 일정한 형(形)을 갖추지 않은 존재의 역동적 활동과정이 된다. …
우리는 흔히 ‘없음’을 ‘있음의 부재(不在)’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유영모는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 절대적 지평에서 본 없음을 말한다. 이를 그는 ‘가이 없음’이라고 한다. 그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를 여읜 ‘가이 없음’에서 실재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보았다. 유영모는 ‘없’(無)이 없다는 데서 서양사상의 한계를 보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있음의 영역 안에서 유적(有的) 존재로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허공(虛空)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나님을 한계 지우는 서양의 유신론적 하나님에 대해서 유영모는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유영모가 보았을 때, 절대무(絶對無)야말로 절대유(絶對有)인 것이다. …
유영모의 ‘없이 계시는 하나님’은 일체의 하나님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관념화를 거부한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없이 보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없이 듣는다. 없이 계신 하나님은 고정된 상(相)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모든 상으로 체험하게 된다. 유영모는 없이 계시는 하나님을 모름으로 표현했다. 유영모가 말하는 모름은 무엇인가? 주객(主客) 이분법적 인식의 해체, 곧 대상적 인식의 해체이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은 모름이며, 인식작용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분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며, 오직 믿을 뿐”이다. 모름을 모름으로 지킬 때, 우리는 대상적 신(神) 인식을 넘어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약간 딱딱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중요한 진리를 일깨워주시는 ‘말숨’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땅에 전해진 기독교>
히브리 땅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서양의 땅을 거쳐서 우리 땅에 전해지면서, ‘무’(無)의 기독교는 삭제되고, ‘유’(有)의 기독교만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비극이었고, 엄청난 잘못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의 기독교를 모른 채, 유의 기독교에만 얽매여 있는 동안에 우리의 ‘신앙과 영성’은 왜곡되었고, 뒤틀려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비판해야할 기독교는 ‘유’(有)의 기독교인 것이며, 또 오늘날 우리가 회복시켜야할 기독교는 ‘무’(無)의 기독교인 것입니다. 유의 기독교를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무의 기독교를 회복시키는 일, 그것이 2000년대를 보내는 우리들의 중차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온전한 기독교가 이 땅에 건강하게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출애 20:3~4)】
오늘 성경말씀은 우상숭배에 대한 분명한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무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섬김의 메시지로 읽고자 합니다. 즉 ‘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의 하나님’이십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없이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본 뜰 수 있을까요? 그릴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없이 계시는 하나님’을 뭔가 그럴듯하게 있는(有) 것처럼그리려는 순간, 그것은 우상(偶像)이 되고 맙니다. 우스꽝스러운, 즉 본질에서 벗어나 버리는 거짓된 하느님의 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에 대한 일깨움입니다.
<은사 이야기>
우리 한국교회에서 ‘은사’(방언, 병치유, 기적 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전통적인 견해는 유일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선물로서 놀라운 신비적 선물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인자하신 할아버지가 그 손자들에게 맛 있는 알사탕을 나눠주는 차원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의 이야기는 ‘유의 하나님’만 알고, ‘무의 하나님’은 모르는 차원에서 나오는 이야기일뿐입니다. 하나님은 없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없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 개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동일한 은혜의 비를 내려주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편애(偏愛)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없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은사도 그냥 모든 인간에게 적과 아군의 구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내려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무(無)의 하느님을 알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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