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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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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27270099 |
2011년 5월 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누가복음 24장 32절
설교제목 : 믿음의 길, 탐구의 길
<기도 시>
구세주
/ 헤르만 헤세
매번 다시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경건한 귀에다 말하고, 귀먹은 귀에다 말하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다시금 우리에게서 잊혀진다.
매번 다시 그는 외로이 일어나야만 하고,
모든 형제의 고통과 동경을 짊어져야만 하며,
항상 그는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매번 다시 하느님은 예고하려 하고,
천국의 것은 죄인들의 계곡 속으로,
정신은, 영원한 것은 육체 속으로 스며들고자 한다.
매번 다시, 오늘날에도,
구세주는 축복을 주려고 오고 있다,
우리의 걱정과, 눈물과, 질문과, 한탄을
조용한 시선으로 맞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선 우리는 감히 대하지 못하니,
오직 어린이의 눈만이 그 시선 감당하기 때문이라.
<성경 이야기>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던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길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그곳에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침통한 마음’(누가 24:17)으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척이나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리라는, 즉 그들 자신의 불쌍한 삶의 현실을 바꿔주리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예수는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통한 마음으로 ‘엠마오로 난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죠. 삶은 ‘침통한 것’입니다. 비통합니다. 가끔 때때로 삶이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늘처럼 믿고 따르던 것들이 어이 없이 무너지는 것이 삶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이 삶입니다. 그렇게 허망한 것이 삶이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일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가끔 자주 ‘침통한 마음’으로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처럼.
그런데 때로 그 비통한 인생 길에서 가끔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누가 24:32)를 만납니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건이기도 하고, 상황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튼 절망과 공포 속에서 엠마오로 난 길을 걷던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누가 24:32)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일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앎의 사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침통한 마음’, 즉 절망과 공포의 마음을 걷어내 버리고, 다시금 삶에의 용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앎의 사건 경험’, 즉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누가 24:32)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차원입니다.
<책 이야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은 책 중에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를 찾아서』(이진우, 책세상)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니체는 처음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소망을 따른다. 독일의 본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지만 한 학기도 안 되어 신학을 중단하고 고전 문헌학에 전념한다. 기독교 분위기에서 성장한 니체는 기독교를 버릴 수는 없었지만, 부활과 은총 그리고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니체는 ‘믿음’을 포기하고 학문의 ‘진리’를 선택했다.
니체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믿는 것은 편안하고 쉽지만, 진리를 좇는 것은 어렵고 험난하다”고 누이동생에게 털어놓았다. “네가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믿어라. 네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한다면, 탐구해라” 니체는 그렇게 말했다.
믿음은 편안하지만, 진리는 불편하다. “극도로 혐오스럽고 추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편한 진리 앞에서 눈을 돌려 자기 편한 대로 믿으려 한다. 니체는 진리와 진실성을 끝까지 몰고 갔기 때문에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믿을 것인가, 탐구할 것인가. 믿으면 편안하지만, 탐구하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믿으면 ‘거짓 신(神)의 노예자’로 살지만, 탐구하면 ‘참 신(神)의 해방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이는 탐구자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는 탐구함으로서 해방자로 산 이였습니다. 그 자신이 그렇다보니,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누가 24:32)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
우리 한국교회가 가고 있는 길은 ‘믿음의 길’일 뿐입니다. ‘탐구의 길’이 아닙니다. 쉽고 편한 길, 그래서 ‘참된 신의 해방자’와는 무관한 길, 즉 ‘거짓 신의 노예자’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원래 인간이 세워놓은 제도라는 것이 그렇게 ‘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의 현실 속에서 교회라는 제도는 어쩔 수 없기 “믿음의 길을 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지상의 어떤 교회도 “탐구의 길을 가라”고 말할 수 없었고, 또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탐구의 길을 가라”고 말하는 순간, 그 자체의 언설이 교회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혁명적이라는 것은, 그 언설이 갖고 있는 내면적 폭발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예전부터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믿음의 길, 탐구의 길’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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