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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7-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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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5강) 요한의 출생
본문 : 눅1:57-66
2012-04-01
<본문>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설교>
◉ 내 위주가 아닌 하나님 위주로 ◉
우리는 인생을 내 위주로만 생각합니다. 때문에 항상 내 문제가 중요하고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인생이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많은 분들이 목회가 무거운 짐이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목회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목회가 잘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리게 되어 목회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말씀에서 찾지를 못하고 자기 육신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내가 잘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잘되어야 할 당위성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물론 저도 제 인생이 잘 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목회라는 것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잘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담임하고 있는 이 교회가 잘 되어야 할 이유를 묻는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들은 성경에 근거를 둔 말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잘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부터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내 위주로 생각하게 되면 인생이 잘된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말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이 곧 인생이 잘되는 것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성공과 잘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의 전부입니다. 오로지 날 위한 인생일 뿐이며, 내가 잘 되지 못하면 잘못 산 것으로 간주되는 인생입니다.
지만 신자 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생을 내 위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신자로써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의 전부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시작하게 하시고 마치게 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는 인생이라면 인생을 내 위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있게 하신 그 분, 즉 하나님 위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위주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새롭게 방향이 바뀐다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이 잘되어야 할 이유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저 세상에 붙들린 나의 사욕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 하나님께 주관된 인생 ◉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의 출생을 통해서 이 같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요한은 엘리사벳에게 잉태된 것부터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15-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이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출생하며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미 하나님의 뜻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에 의해서 예수님보다 먼저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잉태와 출생의 시작부터 죽음이라는 끝의 순간까지 요한의 인생은 요한 개인의 뜻과 목적과 목표에 의해서 흘러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흘러갔습니다. 요한 자기 위주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위주로만 흘러간 인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인생에 ‘잘되어야 한다’는 개인의 사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요한의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에 의해서 인생의 전부가 붙들려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인생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주관되면서 내가 원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인생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에 순종하는 마음보다는 여전히 내 위주의 인생을 원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으로써 그 같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을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식의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 자식의 인생을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 주신다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겠지만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반갑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부모 역시 자식을 자기 위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 요한이라 고집한 이유 ◉
그런데 요한의 출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자식을 향한 시선은 자기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위주였습니다. 요한을 자신들의 자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신들을 통해서 세상에 오게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낳자 이웃과 친족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다면서 함께 즐거워합니다. 아이가 없는 집안에 아이가 생겼으니 당연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팔일이 되자 유대인이 규례를 따라 아이를 할례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하자고 합니다.
당시 문화는 아이의 이름을 그 가문의 가족이나 친족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가문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하자는 것도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 받을 정도로 그 신앙이 훌륭했기 때문에 요한도 부친을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이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요한이라고 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 한 이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사가랴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쓰자 다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천사가 전하여 준 이름입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고집한 것은 요한이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출생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적 혈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특별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알려준 ‘그가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뜻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고집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아이를 낳았고, 비로소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웃과 친족들처럼 아이를 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면서 아이 이름을 사가랴라고 부르는 것이 아이에 대한 보편적인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만을 바라봤다면 이처럼 부모 위주로 아이를 생각했을 것이고, 천사가 전해준 요한이란 이름은 잊어버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을 통해서 약속하신 대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봤고, 요한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쓰여질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아이를 잉태하기 전에는 인간적 조건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루시는 것에 대해 믿지를 않았지만 아이가 잉태하고 출생하게 되자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아이를 요한으로 부르는 것이고, 그리고 사가랴는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사가랴가 요한으로 인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한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요한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 없는 집안에 기적적으로 태어난 소중한 아이로만 바라보면서 훌륭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부모 역시 태어난 자식을 바라보면서 ‘넌 장차 큰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부모로서의 기대와 꿈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와 꿈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인생의 가치 기준 ◉
말을 하게 된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먼저 ‘요한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속량하시기 위해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일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의 뿔을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임을 알았고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한 사가랴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주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 대해서도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해 보냄 받은 것으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가랴의 찬양에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꿈과 기대가 없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기대대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자라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자신이 벙어리가 되고 다시 말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인생 역시 하나님이 주관하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부모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욕심으로 자식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식의 미래를 연결하여 바라보면서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인생을 내 위주로 생각하게 되면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고 수고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공부하고 고생했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게 되면 나를 이 자리까지 끌고 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끌어 오신 인생이었음을 안다면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올라 있느냐로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일하셨음을 고백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하나님 위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하나님 위주로 생각한다면 인생이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되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알고 용서 받은 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으로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못한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죄 사함을 아는 가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구원의 뿔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 가치가 평가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아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생 또한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그 잘됨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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