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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3: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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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12강) 세례의 의미
본문 : 눅3:15-22
2012-05-27
<본문>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설교>
◉ 공평한 세상 ◉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을 하지만 따져 보면 무척 공평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없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공기를 생각해 보면 공기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공기가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공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만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주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것도 공평하고, 세월이 흐르면 늙는다는 것도 공평합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늙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돈이 있다고 해서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만 먹으며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장 공평한 것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되는 일이나 삶의 수준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는 힘들게 일해도 가난하게 살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부자여서 놀면서도 편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한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제아무리 안락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인간은 죽는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한 채 인생을 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고 잊고 산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가 덮쳐 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이 죽고 육신이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이 종결된다면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니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는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망이라는 문제가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문제이며 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 물세례의 한계 ◉
하지만 사람들은 영혼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현재적이고 실재적이며 사실적인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지만 영혼은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적이지도 않고 사실적이지도 않는 문제로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문제, 즉 믿음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되고 이해되는 이야기가 바로 생명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두게 하고,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들을 때는 말 같지도 않는 내용들이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전혀 새로운 영적인 세상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는 진리와 빛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 말씀은 생명의 문제에 마음을 둘 때에만 들릴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인가 심중에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같이 증거합니다.“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6,17절)
요한의 물세례는 요단강에서 베풀어 진 것으로 세례자를 요단강 물속에 잠기게 하였다가 다시 나오게 하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침례의 방식으로 치러진 의식이었습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죽음에서 건짐 받은 새로운 생명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요한의 물세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죽음과 생명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식일 뿐이지 실제로 죽음에 처한 인간을 건지는 구원의 사건은 아닙니다. 만약 요한의 물세례가 실제적인 구원의 사건이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는 없을 것이고, 세례의식만 행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세례가 능력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 능력은 물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에 속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 성령 세례 ◉
백성들이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요한의 설교가 당시 백성들에게 마음 깊이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5,6절)고 말하면서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요한의 말처럼 된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사라지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강탈하는 일도 없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한이 자기들에게 그처럼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온 그리스도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생존을 위한 그리스도를 생각했던 것이지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만이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 오신 참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무리들과 세리와 군인들이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은 것을 보면 요한의 설교로 인해서 심적인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적인 변화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 현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심적인 변화로 인한 표면적인 행동의 개선과 변화가 생명현상이라면 굳이 세례를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동의 변화가 아닌 존재의 변화입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죄이며 죄의 삯인 사망입니다. 이 같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으로도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의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말한 존재의 변화는 죄를 이기는 자가 되어서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가능한 존재의 변화이며 신앙 세계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공평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존재적 문제로 파고 들어가면 모든 인간은 공평합니다. 누가가 각하라고 부르는 데오빌로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를 비교하면 표면적으로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상반된 위치에 있고 행복과 불행으로 선명히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론적 문제로 들어가면 모두가 죄의 삯인 사망의 세력에 붙들린 존재일 뿐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이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고, 인간을 이 문제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한 성령 세례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표면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문제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표면적인 것이 아닌 본질적인 문제에 마음을 두게 되면 삶의 참된 의미와 그 깊이를 알아갈 수 있고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도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것에 마음을 두게 되면 결국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는 것으로 울고 웃는 기존의 삶의 방식 그대로 나아갈 뿐입니다.
가령 100평짜리 고급 빌라에 사는 사람이 있고 단칸 월세 방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100평짜리 고급 빌라에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만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급 빌라에 살든 월세 방에 살든 그것은 영혼의 문제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되면 ‘누가 그리스도를 믿는가?’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쭉정이는 불에 태움 ◉
다시 말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향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말이 아마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고 바쁜데 영혼이 살고 죽는 문제에 어떻게 마음을 둘 수 있느냐라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믿음의 본질 또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세상 마지막이 하나님이 행하실 심판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심판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안은 쭉정이로 가득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태우시며 알곡만 남게 하셔서 곳간에 들이시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베푸신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우리 속의 쭉정이가 태워지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는 구원 사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이르면 신자는 생명의 알곡으로 드러나 곳간에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속으로 받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신자가 성령세례에 담긴 이 약속을 알고 믿는다면 표면적인 문제가 마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문제가 가장 중요함을 알고 모든 인생을 생명의 길을 가는 데에 집중하겠다는 분명한 결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의 신자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항상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공평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러한 세상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가신 길이 곧 생명의 길임을 알고 그 길로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살든 신자는 그리스도만 바라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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