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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재와 임재의 행간을 보는 눈

에스더 류공석 목사............... 조회 수 816 추천 수 0 2016.03.11 22: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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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4:12-16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의 행간을 보는 눈
2011년 3월 19일(토) 부림절,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에스더 4:12-16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이스라엘 명절이 있다. 무엇인가? 부림절이다. 정확한 발음으로는 ‘하그 푸림’인데, 에스더서와 관련있는 절기이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를 잠시 멈추고 부림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에스더서의 내용은 다들 안다고 생각하기에 부림절과 관련해서 몇 곳만 이야기하자. 에스더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사, 즉 페르시아 시대이다. 바벨론에 이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페르시아 왕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시대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일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크세르크세스(Xerxes) 1세로 나온다. 이는 그리스 음역에 따른 것이다. 주전 486부터 22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니까 바벨론에 의해 남 유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되고 나서 백년쯤 지난 때니까, 이미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온 이후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으면서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그대로 그 땅에 남아 삶을 유지했는데,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모르드개, 에스더 등은 다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최초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말로는 이산, 흩어짐을 뜻하는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끌려가 살게 된 것을 말한다.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바벨론 포로 이후였고,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는 주후 70년과 315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부터이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왕후 아스디가 폐위되고, 대신 나라 안에서 아리따운 처녀들을 선발해서 그 중에서 새 왕후를 뽑게 된다. 그때 유대인 처녀인 하닷사도 선발이 된다. 하닷사는 에스더의 히브리식 본명이다. 그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밝히지 말라 명하여 에스더라는 페르시아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에스더는 별이란 뜻이다. 왕이 에스더를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고, 에스더는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가 된다.

  부림절과 관련 있는 부분은 3장부터인데, 하만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하만이 아각 사람이라는 것에서 나온 유대교 전승이 하만을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대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아말렉 족속은 네게브와 요르단 남쪽 지역에 거주했는데, 그들의 왕을 아각이라고 불렀다. 아멜렉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원수였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의 왕을 지칭하는 아각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대적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들을 진멸할 것을 명하신다. 아말렉 족속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괴롭힌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죄악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각을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길갈에서 직접 아각을 죽이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울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

  에스더의 이야기를 담은 ‘왕과의 하룻밤’이란 영화를 보면 사무엘이 아각을 죽였지만 그의 임신한 아내는 도망쳐서 아들을 낳게 되고 그 후손이 살아남아 자신들의 종족의 원수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으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이는 유대교 전승에 따른 것으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설정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을 총리로 삼게 되는데,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이기에 하만에게 모든 사람들이 꿇어 절을 했다. 한 사람만 빼고. 누구인가? 모르드개(모르데카이)였다. 모르드개 역시 아하수에로의 신하였는데, 하만이 자신에게 절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으로 하나님 외에는 꿇어 절하지 않음을 말했다.

  이에 하만은 분노하여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부림절이다.

‘제비뽑기’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가 ‘푸르’(פור)인데, 우리 성경에는 ‘부르’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제비를 뽑는다는 것보다 일종의 주사위 같은 것을 던져서 날짜를 잡는 미신적인 행위이다. 일종의 길일을 정하는 방식이다. 제비를 뽑는다는 푸르’(פור)에서 나온 말이 바로 푸림(פורים)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부림, 부림절로 부른다. 그러니까 부림절이란 말은 누구 때문에 지어진 이름인가? 하만 때문이다.

  하만이 일종의 주사위를 던졌는데, 12와 13이 나왔다는 것이다. 12는 열두 번째 달, 즉 아달월이고, 13은 아달월 십삼일이 된 것이다. 그날에 유대인들을 멸절하기로 한 것이다.

  하만은 유대인을 멸할 것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낸다. 그래서 각 지방마다 아달월 십삼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를 보내게 된다. 이는 최초의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홀로코스트,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하는데, 최초의 홀로코스트의 위기가 이 때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드개가 알고 에스더에게 알리게 된다.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고하고 우리 민족을 구하라는 것이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더는 자신이 왕후일지라도 왕의 명령 없이는 왕 앞에 나아갈 수 없고, 그랬을 경우 죽을 수 있음을 말하면서, 모르드개와 수산성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에스더 자신을 위해 삼일동안 금식할 것을 요청한다. 자신도 그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갈 것이며 그때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하겠다는 말이다.

  삼일 금식을 하고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는 왕의 은총을 입어 죽임을 면하게 되고, 왕은 에스더에게 이렇게 자신에게 와서 청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자 에스더는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테니 왕과 하만만 오라 청한다. 잔치에 참석한 왕은 기분이 좋아서 에스더의 청을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에스더는 내일 또 다시 잔치를 베풀 테니 왕과 하만만 오라고 청한다.

  둘째 날 잔치에서 에스더의 목숨을 건 용기와 지혜로 인해 유대인들을 멸절하려는 하만의 음모가 밝혀지고 하만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모르드개를 매달고자 준비했던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의 간청에 따라 제비 뽑은 날인 아달월 십삼일에 유대인들을 멸절하고자 했던 이들, 보통 아멜렉 족속의 후손으로 보는데, 이들을 죽이도록 명을 내림으로서 원수를 갚게 한다. 그렇게 해서 최초의 홀로코스트의 음모는 무산되고 유대인들은 생명을 보전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날인 아달월 십사일에 유대인들이 큰 잔치를 벌였는데, 이 날이 바로 부림절이 된 것이다. 반면 수산성에 있는 유대인들은 아말렉 족속의 후손들이 많았는지 이틀 동안 이들을 제거하고 하루 늦은 십오일에 잔치를 벌였는데, 이를 슈샨 푸림, 수산 푸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부림절은 이틀을 지키는 것이다.

  탈무드 등의 규정에 보면 수산은 성이었므로 성으로 둘러싸인 곳은 아달월 십오일에 지키고 다른 곳은 십사일에 지키게 되어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이 있는 예루살렘은 십오일에 지키고, 텔아비브 같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 지역은 십사일에 지키는 것이다. 아달월은 양력으로 2월에서 3월에 걸쳐 있다. 윤달인 경우는 두 번째 달에 지킨다. 실제로 첫 번째 부림절은 윤달이 있는 아달월이었다고 한다.

  이런 유래로 생긴 절기가 부림절인데, 그러다보니 다른 절기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대학살의 음모에서 구원받은 날이기에 매우 즐겁고 활기찬 축제 분위기이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부림절을 앞두고 일주일 동안 행사를 가진다. 욤 하 코바(모자 쓰고 학교 가는 날), 욤 하 쯔바임(학년 별로 다른 색의 옷을 입고 가는 날), 욤 파자마(잠옷 입고 학교 가는 날) 등이 있고, 마지막 날에는 축제를 하는데 두 가지를 준비해서 가야 한다.

  하나는 분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쉴로악 마놋(משלוח מנות)이라고 해서 먹을 것을 담은 선물바구니를 가져가야 한다. 이 둘은 유래가 있다. 에스더 9:22에 보면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부림절 축제를 즐겁게 지키고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다. 서로 선물을 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에 따른 전통이 바로 미쉴로악 마놋(משלוח מנות)이다. ‘먹을 것을 보낸다’라는 뜻인데, 부림절에 먹을 것들을 담은 선물바구니를 이웃과 친구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분장하는 것은 축제의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하고, 자기 주변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생겼다고도 하고, 부림절 연극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부림절에 함께 모여서 에스더서를 토대로 연극을 하는데, 이 때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에스더, 모르드개, 아하수에로, 하만 등으로 분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로마의 가면 무도회 영향을 받으면서 이국적인 분장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서양의 할로윈데이 영향까지 받아서 지금은 귀신 분장도 많이 하고 있다.

  이렇게 분장한 젊은이들을 부림절 당일에 예루살렘 Old city Jewish Quarter나 텔아비브 중심지 등을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갖가지 옷과 가면으로 분장하고 흥겹게 춤과 노래하며 즐기는데 마치 카니발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시끄럽게 소리는 내는 것을 돌린다. 바로 이것이다. 라아샤님(רעשנים)이라고 하는데, 따다닥 소리가 나기도 하고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있다. 원래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플라스틱 제품이 많다.

  이는 신명기 25:19에 있는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너는 아멜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만이 아멜렉 족속의 후손이므로 부림절 때 에스더서를 읽다가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라아샤님으로 시끄럽게 소음을 내어서 아멜렉의 후손 하만이라는 이름이 들리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다.

  부림절 때 먹는 특별한 과자가 있다. 오즈네이 하만이다. 원래의 이름은 몬타셴(Mohntaschen)이었다고 한다. 독일어인데 몬은 양귀비씨고 타셴은 주머니란 뜻으로 양귀비씨가 들어 있는 주머니 모양의 과자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부림절과 연결이 되면서 하만타셴(Hamantaschen)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하만의 주머니라는 뜻이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다 죽인 다음에 재산을 빼앗아 자기의 주머니를 채우고자 했던 탐욕을 뜻한다. 그런 하만과 그의 사악한 탐욕을 깨뜨려 버렸다는 뜻으로 하만의 주머니 모양의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요즘은 이것을 오즈네이 하만(עוזני המן)으로 부른다. 하만의 귀라는 뜻인데, 그 모양이 귀같이 생겼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이 과자를 먹으면서 하만을 씹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전승에는 삼각형 모양이 유대인들의 운명을 결정한 위기의 만찬에 참석했던 세 사람, 에스더, 아하수에로, 하만을 가리키며,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해 먹는다고도 한다.

  이러한 관습들을 지키면서 유대인들은 공동체적으로 부림절을 기념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기에서 살아남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더불어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에스더서의 간략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부림절의 유래에 대해 보았고, 부림절에 지키는 관습들에 대해 보았다. 그렇다면 부림절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유대인들의 축제인가? 그렇지 않다. 매우 중요한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에스더서에 나타난 위기를 최초의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홀로코스트의 원인은 무엇인가? 차별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싫다는 것이다.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 뿌리는 차별이고 차별에서 나온 증오심이 홀로코스트의 원인이다.

  에스더 때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도 수많은 박해의 원인은 차별과 증오심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르냐는 것이다. 너희는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종청소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6백만을 학살한 것 아닌가?

  지금의 안티 세미티즘, 반유대주의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 이스라엘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티를 내냐는 것이다. 왜 그렇게 동화가 되지 않냐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나아가 아랍권과의 갈등의 원인은 차별과 증오심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는 역사적으로 있지도 않았었다.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다. 우리는 이슬람인데 너희는 유대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랍인인데 너희는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놈들이 와서 우리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싫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인정할 수 없으며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차별은 인간의 타락한 죄성에서 나온 죄악이다. 남녀의 차별, 신분의 차별,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별, 인종 차별,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 학력에 따른 차별 등 온갖 차별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고 그 차별이 수많은 사람들을 멍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증오심과 전쟁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차별을 깨뜨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차별 없이 그저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봐야 하고 오직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차별을 깨뜨리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게 멸시했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다가 가셨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차별 당하는 여자들의 인권을 존중하셨고, 죄인이라고 차별받고, 가난하다고 차별 받았던 이들의 친구가 되셨다.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차별하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셨다. 병든 자들, 심지어 천형이라고 벌레 취급받았던 나병 환자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으로 대하셨다. 한 영혼이 천하 보다 귀하시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눈높이라고 하시면서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깨뜨리신 차별이 후에 인류 역사에서 천부인권사상이 되고 노예해방이 되고 남녀평등이 된 것이다.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은 끊임없이 차별하고 차별로 인해 증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그 차별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결코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차별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종교인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병은 차별의 병이다. 지역차별, 학력 차별, 신분 차별, 세대간의 차별이다. 망국의 병이다. 이 병이 교회에도 만연하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병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차별을 거부하는 것이다.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차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깨뜨리신 차별을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다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눈높이는 언제나 주님의 눈높이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 재력, 학력, 출신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친구로 대해야 한다.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우리 역시 차별의 유혹을 받는다. 유대인들, 참 다르다. 독특하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비슷한 점이 참 많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이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라. 그 차별이 결국에는 싫음이 되고 안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안티를 위한 안티가 되고 만다. 싫기 때문에 그냥 다 싫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티이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네가 내가 아닌 이상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그것이 차별이 아니라 주님의 눈높이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시작이고 기초이고 과정이며 끝이다.

  유대인은 다르다.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참 많은 차별을 당해왔고, 증오심으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빅터 솔로몬이라는 유대교 랍비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선민은 그 자체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고난을 당해왔다. 그러기에 선민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고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택함 받은 사람들이다. 택함 받았다는 자체가 다르게 한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차별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대로 된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세상의 비난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르다고 하면서 똑같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 다르게 살아야 하는데 말만 다르고 사는 것은 똑같으니 비난하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달라야 하는데 똑같으니까 비난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것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배타적인 모습으로, 독선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다름은 어느 정도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다름은 이기적인 다름, 배타적인 다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다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살고자 하는 다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다름이어야 한다. 그래서 받는 차별이라면 감사한 것이다.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이런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예수님처럼 차별을 거부하고 깨뜨리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가운데 제대로 된 다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다름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생긴 이후로 변함없는 것이 바로 이 민족을 없애려는 시도였다. 에스더 때부터 중세 유럽과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거쳐 지금까지 유대인들을 제거하려는 악한 의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절대로 멸망시킬 수 없는 유일한 민족이 있다면 바로 유대인들이다. 왠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떠하든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고, 그러기에 결코 멸망할 수 없는 민족이다.

  한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대체신학이다. 이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박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도 버릴 수 있다. 그런 하나님이신가? 아니다. 결코 그러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회복될 그날까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구원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에스더서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 같은 상황,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의 부재의 상황이 바로 에스더 때의 유대인들의 상황이었다. 이미 나라가 이방민족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왔고, 여전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들을 영원히 없애버리려는 악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럴 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재이다.

  더욱이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점이다. 에스더 때의 상황 자체도 하나님의 부재처럼 여겨지고 지고 에스더서에서도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서를 읽어나가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부재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된다. 언 듯 보면 하나님의 부재 같이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 랍비들은 에스더서에 대한 해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이름이지만 그 글자를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에스테르, אסתר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세테르(סתר)라는 동사의 1인칭 미래형이 된다. 히브리어로 סתר는 ‘숨다, 숨기다’라는 뜻이다.

  그럼 에스테르, אסתר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무슨 뜻이 되는가? ‘내가 숨을 것이다’ 혹은 ‘내가 숨길 것이다.’의 뜻이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다, 무슨 뜻인가?

  신명기 31:18을 보자.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며 악행을 일삼을 때 반드시 얼굴을 숨기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수기 6:24-26을 보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인데,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축복, 은혜, 평강,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 얼굴을 숨기시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그 자체로 심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은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얼굴을 숨기시니 그 자체가 하나님의 부재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고 포로 생활을 하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숨으신 까닭이며, 하나님의 숨으심을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으심은 하나님의 부재라기보다는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봐야 한다. 우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다. 그 자체가 심판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그 자체가 심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면 그것은 심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 그 얼굴을 가리시고 숨기실 뿐이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임재 하신다. 그 얼굴을 숨기시는 부재로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을 준비하신다.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에스더서이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은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지는 그런 상황,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그 결과가 바로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한 구원이었던 것이다. 에스더서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그 행간에서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구약과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에서도 그러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죄악과 불순종,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숨기심은 그 자체로 심판이었다. 이방 민족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하나님의 부재로 느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외면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꼈다.

  그러나 어떠했는가? 정말 하나님의 부재였는가? 심판을 선포하시면서도 회복을 선포하셨던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사야를 읽어보고, 예레미야를 읽어보라.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를 읽어보라.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만민을 구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지 않았는가?

  홀로코스트를 하나님의 부재로 말하지만 그 사건 후에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건국이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홀로코스트를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이 멸절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행한 죄악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셨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부재는 아니었다. 그 얼굴을 숨기신 하나님의 임재가 결국에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이천년 만에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되는 놀라운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얼마 전 일본에 대지진이 있어 지금도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황당한 말을 했던 목사들이 있었다. 일본 대지진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나님이 요놈들 봐라 하면서 흔드셨단다.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민다. 너무 부끄럽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큰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그게 할 말인가? 하나님을 알기나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일본이 8백만 귀신을 숭배하는 우상의 나라지만 일본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재앙이나 화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저주니 심판이니 하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긍휼이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돕는 것이다. 그렇게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함부로 하나.

  차라리 하나님의 숨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숨으심은 그 자체가 심판이다. 일본뿐이랴? 우리나라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 죄악과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숨으심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상황은 하나님의 부재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 그 얼굴을 숨기시는 임재 가운데서도 당신의 구원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 사이에서 그 행간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부재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의 상황과 느낌과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실존과 임재를 보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게 한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할 수 있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믿음의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을 소유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을 바라보고 붙들 때 주어지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지난 대림절 때 말씀을 전했듯이 임마누엘의 원형은 ‘에히예 임카’(אהיה עימך)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였고 지금도 함께 하며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라는 뜻인데, 에히예(אהיה)라는 말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에히예 아쉐르 에히예’(אהיה אשר אהיה)시다. ‘나는 나다’란 뜻으로 우리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여호와, 야훼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는 ‘에히예 임카’라는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나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며 장래에도 함께 할 것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걸고 하신 맹세이신 것이다. 그 맹세와 약속이 들어있는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에히예 임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부재가 있었다. 언제인가? 십자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고 죽으셨을 때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재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 그 얼굴을 숨기신 것이다. 그 얼굴을 가리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죄 때문에? 아니!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지고 죽어가는 당신의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 그 얼굴을 가리신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시고 침묵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었다. 부재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길을 여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사람이 되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에히예 임카,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라. 더불어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고 침묵하시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것 같고 침묵하시고 외면하시는 것 같이 여겨지는 상황일지라도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붙드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그 막다른 길에서 기가 막힌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의 행간을 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 기도: 1. 모든 차별을 거부하며 깨뜨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눈높이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하소서.

2. 말만 다르고 실제의 삶에서는 세상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다름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다름이 되어 선한 영향력,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게 하소서.

3. 에히예 임카,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더욱 굳게 거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지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사이의 행간을 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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