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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2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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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21절-25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쁜 생각을 안 하려고 하지만 시시때때로 미움도 나오고 시기도 나오고 음욕도 나오고 욕심도 나오고 거짓말도 하고 고집도 피우고 한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 속에 들었던 것이 나오는 거냐, 누가 억지로 내 속에 집어넣어서 나오는 거냐? 자기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나오는 거다. 그런 원리원칙을 무시하면 안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애를 먹일 때 내 속에서 미움이 나오는 것은 누가 내 속에 그 미움을 집어넣어서가 내 속에 이미 들었던 것이 나오는 것이다. 자기 속에 들었던 것은 언젠가고 나오게 돼 있다. 그런 원리원칙을 무시하면 안 된다.
21절: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그리고 네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다. 영생을 얻으려면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했다.
‘사랑하사’라고 한 것은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부모의 깊은 마음은 몰라도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잘하면 사랑을 받는 것과 같다. 부모의 깊은 마음은 몰라도 부모의 말씀대로 꼬박꼬박 순종을 하면 부모가 사랑을 한다. 처음 믿는 교인이 예배시간을 잘 지키면 사랑스럽게 보이듯이.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켰다는 말이 꼭 계명의 뜻을 알고 지켰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지키느냐? 모른다. 그러나 어릴 때는 뜻은 몰라도 말씀하는 것에 꼬박꼬박 순종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자식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씀의 뜻은 몰라도 그 말씀에 순종을 하다 보면 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부모가 말씀을 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된다. 이건 다 큰 자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가 말을 하면 안 듣고 불순종을 하면 이건 안 컸구나.
‘너에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다.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에게 하늘의 보화가 있다. 그리고 나를 좇으라’ 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릴 때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그 부자청년의 마음에 자극적인 지적이 됐다. 이 말을 듣고 부자의 마음에 그만 근심의 구름이 드리워졌다. 부자는 아마도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고 아울러 부자인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계명도 지키고 그 연속으로 부자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한듯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는데, 사두개인들은 신령계를 안 믿는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은 단짝이다. 참 희한하다. 사두개인들은 현세주의다. 내세를 안 믿는다. 그러니까 이 부자청년도 이들처럼 이 땅에서 부자로 살면서 연속적으로 천국에서까지 부자로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이는 마치 안 믿는 사람이 워낙 행복하게 잘 살면 ‘평생 오늘만 같아여라’ 하는 그런 생각과 비슷한 것이다.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방세상 사람들도 물질에 가난한 자가 있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것은 가난한 이방인들을 위해서 물질을 쓰라는 그 말인지, 성도들의 가난을 말하는 건지? 이방세상의 가난한 자들은 대부분 세상 물질적 욕심이 들어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 믿는 성도는 아무리 가난해도 세상의 욕심이 없이 부지런히 산다. 이런 가난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대로 다 팔아서 나누어 줘라.
없는 자에게 준다는 것은 자연스런 마음이다. 길을 가다가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으면 어른으로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자연스런 마음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그냥 지나간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아니다. 이건 어른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게 많이 있다. 타락된 후로 그 모양이 돼버렸다.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배고픈 자를 옆에 두고 어떻게 자기만 꾸역꾸역 먹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부지런히 살면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영적 면도 주고 물질적인 면도 주고 해야 한다.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평생을 남에게 못 준다. 이건 손이 마른 사람이다. 정신면에 손이 굳은 것이다.
성도에게 하는 것이 하늘세계에서 보화가 있는 것이다. 즉 그게 하늘창고에 쌓아놓는 것이다. 이건 자기의 보화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헛일이 아니다 그 말이다. 물질에 매여 있고, 그대로 가지고 있고, 쓸 줄도 모른다면 자기의 보화는 없다.
천국의 큰 부자로 만들어 주고 싶은 게 예수님의 마음이므로 부자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영생이다. 영생 쪽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영능의 실력자가 된다. 그런 자로 만들어 주고 싶은 주님의 심정이다.
이것은 천국의 부자요, 천국의 실력자요, 말하자면 천국의 주인공인데, 이것은 부자가 갖는 생각보다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소득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유익이고 이익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재물을 팔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해도 따를까 말까인데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따르라고 하니 그만 맥이 빠진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이 없이 부자도 되고 영생도 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예수가 바로 믿어지겠느냐? 이런 사람이 영생이 얻어지겠느냐? 여기서 영생은 이룰구원에서의 말이요 교훈적인 말이다. ‘지옥 간다. 천국 간다’ 그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이 없이 재산 재물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영생까지 얻고 싶은 그 마음은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부자 자기는 몸으로 간음을 안했다고 하지만 재물과 간음을 한 셈이다. 마음을 그쪽으로 주고 사랑을 한 것이다. 재물에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람보다 재물을 더 사랑을 했다.
남의 물건을 도적질을 안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창조한 물질을 자기 집에다 쌓아놓고, 그 재산을 모으느라고 남의 시간을 다 빼앗았으니 도둑질이다. 남의 물건을 빼앗는 건 도둑질이다. 거짓 교회가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게 많다.
사람을 위해서 물질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가 부모공경을 제대로 했을까?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지만 마음속에 세상 물질우상이 그 사람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인간--> 물질’의 순서가 정확한 건데 이 부자는 ‘물질-->인간-->하나님’, 또는 ‘물질-->하나님-->인간’의 순서로 살았다. 이건 타락이다. 순서가 어그러지면 타락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학박사라도 소원 목적에서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가 바뀌었으면 그 사람은 타락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걸 알까?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특히 자녀들을 여위 때는 이게 바꿔져 있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이건 타락의 성질이다. 며느리나 사위를 볼 때 첫째는 믿음, 그 다음에 일반정신, 그 다음에 신체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다.
22절-23절: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가 아니라 ‘심히 어렵다’고 하셨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능히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에게 조건이 붙어있는 말이다.
재물이 있는 자라고 할 때 몸 밖의 소유적으로 있는 물질로 된 재물이 있고, 이것은 자타의 구원에 쓰임이 되는 물질이다. 그 다음에 몸 안에서 재물을 탐하는 탐욕성이 큰 문제다. 이 탐욕성은 버려야 한다. 이건 자타의 구원에 아무 유익이 안 되고 해만 될 뿐이다.
재물이 있는 자나 탐욕자나 둘 다 탐욕을 가졌다면 둘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물질성의 사고방식은 영적 신령성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룰구원의 차원의 도덕성은 신적 도덕성이다. 일반 도덕성은 신적 도덕성이 아닌 타락되고 저주받은 도덕성이요,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가 뒤바뀐 도덕성이다. 이룰구원이 있는 도덕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적중성으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룰구원으로 나가고 있는 도덕성과 일반 도덕성과는 비슷하게 보여도, 때로는 반대로도 보이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질적으로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걸 구별을 잘 못해서, 이걸 같은 걸로 봐서 자기에게 불편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물질성의 사고방식과 영적 신령성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소원성과 세상 사람들의 소원성과는 그 사고방식이 근원적으로 다르고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거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근본적 근원적으로 다른 거다.
그리고 ‘재물’이라고 할 때는 물질 자체이지만 ‘재산’이라고 할 때는 물질 자체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물질적인 요소로 되어있는 여러 가지 지적재산도 재물로 들어갈 수 있다. 자기가 젊고 힘 있고 패기가 있다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근본적 재산이 자기에게 있는 거다. 그걸 가지고 재물을 모을 수 있고 키울 수 있는 거다. ‘재물’ 하면 물질 자체이지만 그 물질을 모을 수 있는 자기 속의 힘 노력 지적인 지식 지능 등등이 다 자기의 재산이다. 젊음도 자기의 재산이다.
세상요소의 것을 얼마나 가져야, 얼마나 배워야 자기의 구원이 잘 이뤄질 수 있을까? 세상요소의 지적인 것을 얼마나 가져야 구원을 잘 이룰 수가 있을까? 우리는 세상 요소적인 지적재산은 자기의 이룰구원을 충분히 이뤄갈 수 있는 정도로 소유하면 된다. 구원을 이루는 데는 성경을 근본적으로 배제하면 구원을 이룰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 사용성이다.
우리가 자타를 경험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공부는 배우지 못했어도 사람이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진실하면 그 사람은 얼마든지 구원을 잘 이뤄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부자 못지않게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가더라. 성경에 가난한 자를 부요자로 만들고,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자로 만들고,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부요자와 그런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말씀도 있다.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세상 것을 얼마나 배우면 구원을 잘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안 된다. 세상적인 그런 수준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느냐? 그건 안 된다. 왜 안 되느냐? 사도바울을 봐라. 그거 다 내버렸다. 티끌처럼 다 내버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다시 받았다.
세상 것은 많이 알면 알수록 번민이고, 세상은 마지막 그날까지 마지막을 향해 계속 진보 발전이다. 그러니 공부를 한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자꾸 해야 한다. 그러니 이룰구원 면에서 보면 그만큼 자기 인생은 낭비의 일생이구나. 그런데 세상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그렇게 갖고 살고 있다.
우리 입장으로서는 세상이 아무리 진보 발전을 해도 자기는 그 때마다 기거하는 그곳에서 과학적으로 발전 진보한 그 지식을 좀 알면 되고, 어떤 생계분야에 종사하면 세 끼 밥 먹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이룰구원 면에서 자타와 관계성으로 들어가면 훨씬 부자가 된다. 세상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사는 게 힘들 것이다. 그 사고가 안 돌아가기 때문에 힘이 든 것이다.
세상 것은 다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마다 변해지는 세상인데 어떻게 그걸 다 쫓아가느냐? 여자 분들을 보면 해마다 옷의 유행이 달라진다. 구두도 해마다 유행이 달라진다. 머리도 해마다 유행이 달라진다. 그러면 봄에 입는 옷이 하나만 있으면 되느냐? 누구 만나러 갈 때 입는 옷, 들로 산으로 갈 때 입는 옷, 운동할 때 입는 옷, 비올 때 입는 옷, 날씨 좋을 때 입는 옷, 또 색깔도 그 때 그 때마다 맞춰서 입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한 해 동안 입고 신고 하는 이걸 옷으로 말하자면 몇 가지가 될까? 그것만이 아니라 떨어졌다고 못 신고, 유행 지났다고 못 신고, 그리고 얼굴도 뜯어고치지, 다음엔 손발은 안 뜯어 고치나? 어디까지 진보 발전을 할런지?
24절-25절: 우리가 세상 것을 다 알았다고 해도 아직도 알지 못한 것이 참 많다. 세상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채워지지를 못한다. 자기 마음에 얼마나 채워져야 만족하게 채워지는 거냐? 한이 없다. 옛날 속담에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입 딱 벌리고 있는 게 뭐냐? 아궁이다. 그런 것처럼 세상 것을 다 안다고 해도 한이 없다. 또한 잘 산다고 해도 그걸 그대로 영원히 누리라는 법도 없다. 항상 건강하고 병들지 말라는 법도 없고,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보다 오래 살라는 법도 없다. 이룰구원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평생을 병자로 지옥처럼 살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 구원을 두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자타의 구원에 복된 자로 살아야 한다. 자기의 삶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다면 자기의 존재목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나온 것인데 현재 자기의 삶을 그 목적에 두고 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볼 때 자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서는 인간의 존재목적의 귀중성을 못 찾는다. 아무 의미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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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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