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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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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58860 |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주현 후 다섯째 주일, 2016년 2월7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경험을 꼽으라 하면 무엇을 꼽겠습니까? 형편에 따라서 각자 다르겠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을 아껴서 집을 샀을 때라든지, 큰 병에 걸렸다가 치료되었을 때 느낌은 특별합니다. 여행에서 그런 경험을 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첫사랑의 경험을 손에 꼽겠지요. 아이를 낳았을 때, 또는 손자손녀를 보았을 때를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많을수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종교경험은 이와 다른 차원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라는 실존 인물을 하나님으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서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믿기 힘듭니다.
변화 산에서의 이야기
오늘의 제3 독서인 눅 9:28-36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한 이야기 중에서도 더 유별나게 특별한 경험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다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중에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옷이 희어졌고 예수님에게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했던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세의 책으로 불릴 정도로 구약에서는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 카리스마가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서 죽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메시아가 등장하기에 앞서 올 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고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 이런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이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지금 꿈을 꾸는 건지, 환상을 보는 건지, 실제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건지 헷갈렸을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를 피할 낌새를 보이자 베드로는 돌연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그 상황을 누가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9:33).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구름이 몰려와서 그들을 다 덮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상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서 크게 두려워했고, 그때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자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텐데, 이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사건은 말해봐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세 명의 제자들이 당시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다음에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교회에 전승되다가 복음서에 기록되었고, 오늘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그 사건을 다시 접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경험의 절대성
여러분들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서로 생각이 각각 다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오니까 무조건 사실로 믿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동화라면 모를까, 실제 사건으로 믿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무조건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황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연봉 많이 받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일상적 사건과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사람들을 속이는 허황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람의 언어와 문자로 직접적으로 표현해닐 수 없는 종교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아버지와 딸이 있다고 합시다. 어린 딸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기의 손을 잡고 기도해준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천둥과 번개가 칠 때도 있습니다.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딸을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포근하게 안아줍니다. 그때 딸이 느꼈을 아버지는 무한한 평화와 안식의 대상입니다. 그 외에도 딸에게는 아버지를 절대적인 대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이 가능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딸에게 묻습니다. 얘야, 아빠 사랑해? 딸이 답합니다. 예! 다시 아버지가 재미있으라고, 얼마나 사랑해, 하고 묻습니다. 어린 딸은 양팔을 벌리면서 하늘 끝까지, 땅 끝까지 사랑해요, 한다. 하늘 끝까지와 땅 끝까지 사랑한다는 딸의 말을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딸이 아버지를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경험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절대적인 진리의 대상으로, 즉 하나님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났다기보다는 긴 과정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대략 3년 동안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걷고, 산에 오르고, 시장에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노래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도 하고, 그를 통해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들로 인해서 크게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3년 동안 그렇게 지냈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자리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경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경험은 화룡정점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부활경험의 빛으로 예수님과의 3년에 걸친 공동생활을 비쳐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건들이 새로운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도 새로운 기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인간의 역사경험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그것의 정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해석해 냅니다. 이게 역사의 비밀이자 신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이해와 해석에는 어떤 준비가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진리를 깨달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구약 사건에 대한 이해가 그런 준비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제1 독서인 출 34:29-35절에 나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의 요약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든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자 모세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모세는 단순히 이스라엘을 이끈 정치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신적인 아우라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 34장에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보도가 나옵니다. 그 구절에 따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신 34:10). 신에게 가까이 간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광채가 모세를 휩싸고 있었습니다. 이 광채는 하나님의 현현과 같습니다. 이 빛은 절대 생명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시내 산의 모세에게 나타났던 이 광채가 변화 산의 예수에게 나타난 것으로 경험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빛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즉 하나님 경험을 우리가 얼마나 할까요?
바울은 오늘 제3 독서인 고후 3:12-18절에서 이 사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린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수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수건이 없어지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후 3: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위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아주 과감한 발언입니다. 과감하다 못해 과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말이 우리의 생김새가 예수와 똑같아진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능력에 우리가 휩싸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변모의 두 관점
이런 이야기가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을 전투하듯이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도대체 오늘 먹고살기 바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하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이라도 성경말씀을 대충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지 말고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의 변모라는 게 무엇입니까? 옷이 희어져서 빛을 낸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영광스러운 상태로 들어간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핵심은 변모, 즉 예수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는 변모, 또는 변화의 근원적인 관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바뀝니다. 지구는 45억 년 전에 불덩어리였습니다. 그런 지구가 지금은 생명이 풍성한 행성으로 변했습니다. 생명의 진화는 본질이 변화입니다. 지금도 계속 변화되고 있습니다.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십시오. 아직 젊은 분들은 어느 정도 연결이 되겠지만 나이가 좀 든 분들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변했을 겁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죽습니다. 모든 것이 해체됩니다. 세상은 다 변화 중에 놓여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변모, 또는 변화의 실존적인 관점입니다. 변모는 시간이 지나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같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식당 겸 거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남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조금 넘었습니다. 바람이 약하게 불고 있었고 날은 맑았습니다. 그곳에 늘 내가 보던 대나무가 약한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푸른 잎에 반사되는 햇살이 보석처럼 빛을 냈습니다. 그 순간의 대나무는 단순한 대나무가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값진 보석이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소개한 책 『연금술사』에서 저자는 연금술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온 세상을 금으로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을 바탕에 놓고 오늘 본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광채가 나는 장면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절대 생명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신들과 똑같이 밥 먹고, 떠들고, 노래하고, 걷고 뛰던 예수님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완전히 다른 존재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히 다른 존재는 곧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더구나 바울의 증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영광의 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창조의 완성에 고유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나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아니 이런 사람만이 야만적이고 영악하고 광적이고 허무한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어떤 즐거운 일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빛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은 전조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변모’ 주일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변모 주일을 지켰으며, 앞으로도 지킬 것입니다. 그 경험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끝내면서 한 가지 아쉬움, 또는 걱정이 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변모 순간에 제자들이 졸았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면서도 다른 것에 한눈을 판다는 뜻입니다. 생리적인 졸음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졸음도 자연적인 현상이라서 피하려야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까지 제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성경이 가리키는 사실을 선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크게 들리면 깨어 있는 시간이 길 것이며, 자장가로 들리면 조는 시간이 길 것입니다. 선포는 이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해서 빛으로 경험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빛을 받아 영광의 빛, 구원의 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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