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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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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60034 |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사순절 둘째 주일, 2016년 2월21일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타의도 있고, 자의도 있습니다. 소위 모태신앙이라서 교회 나오는 게 몸에 밴 사람도 있고, 교회의 분위기 등이 마음에 들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이 허무해서, 또는 병들어서, 복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리고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길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기독교 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를 가능한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다. 최소한 세례를 받을 때 배운 교리만이라 단순히 정보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저는 핵심적인 교리 중에서 하나를 여러분에게 설명하겠습니다.
할례파 비판
바울은 오늘 제2 독서인 빌 3:17-4:1절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20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말이 뭔지 느낌이 오긴 하겠지만, 막상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쉽지 않을 겁니다. 21절에는 좀더 멀게 느껴질 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구절은 이해하려면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는 기원전 358/357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2세에 의해서 세워졌고, 기원전 30년경에는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직할 도시라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에게 미국 시민권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빌립보에서 출생한 사람은 자동으로 로마 시민권자가 되는 겁니다. 바울은 기원후 49/50년경에 이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중추 역할을 한 사람이 여성 사업가 루디아입니다. 루디아가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한 탓인지 빌립보 교회는 오랫동안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빌 4:15, 16절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후원금을 받았고,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소식 중의 하나는 빌립보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당장 달려가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만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힌 신세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단 편지로나마 자신의 생각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에 ‘기쁨의 성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아픔의 성경이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특히 빌립보서 3장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 즉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개’라고 지칭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심한 욕설처럼 들립니다. 바울이 여기서 개라고 부른 이들은 파렴치하고 몰상식하고 저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빌 3:3절에 따르면 그들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는 말 그대로 할례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태어나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초기의 대다수 기독교인들도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할례전통과 전혀 관계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할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볼 때는 정말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할례파입니다. 이들과 대척점에 서서 가장 적극적으로 투쟁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빌 3:18절에서 바울은, 앞에서 개라고 비판한 그 할례파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규정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할례 유무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18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어 19절에서는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이며,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땅)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겁니다. 이런 표현만으로 보면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할례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교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게 기독교의 생존과 선교활동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볼 때 할례파들은 유대교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멀리하라고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
이런 정황을 전제하고 앞에서 읽은 빌 3:20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자들입니다. 그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본질이 로마 시민권이 아니라 하늘 시민권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할례파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종교적으로 완성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이 이 땅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소위 구원파 유의 신앙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구원은 땅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하늘은 단순히 우주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은폐된 근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하늘나라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땅에서 자신을 성취하는 것에 몰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이 가장 크고 뜨겁습니다. 인생에서 뒤처지면 뭔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외면하는 행태입니다.
그렇다면 땅에서의 일은 모두 잘못된 것이니까 오직 하늘의 것만 찾으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도 바울의 생각을 오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어느 한 순간에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생활에 성실해야 하고, 목사는 목회를 진정성 있게 해야 합니다. 정치도 필요하고 사업도 필요하고 문화 예술도 다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핑계로 땅에서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역사를 외면하는 건 결코 건강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들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그런 것의 마지막은 멸망이고 신은 배이며, 영광을 부끄러움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유명 가수가 되는 걸 목표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 목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은 뭘까요? 더 유명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돈을 더 버는 것일까요? 계속 해서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야만 할까요? 그것 자체로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어서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운명과 그 과학적 발견도 다 지나가고 맙니다. 남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그 모든 것들은 무상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것만을 목표로 산다면 삶이 끝날 때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을 겁니다. 이걸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인생인데, 어쩌란 말이냐, 대안이 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허무하니까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을 제가 옳다 그르다 하고 이 자리에서 판단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설교하는 목사로서,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진리이기 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쁨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감으로써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그 대답니다. 그 기다림이 기독교의 재림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의 실존은 기다림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해보십시오. 구원자를, 구원을 실제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혹은 거기에 너무 지쳐버려서 재림신앙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를 기다린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잘 몰라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종말론적 변화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할지에 대해서 21절에서 설명합니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여기서 변화가 그 핵심입니다. 바울은 고전 15:35절 이하에서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51, 5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부활의 핵심 개념도 변화입니다. 단지 모양만 변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몸인지를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영광의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광의 몸은 곧 ‘죽음이 더 이상 개입되지 않는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53절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의 몸이라는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는 시간만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전 15:52절에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했는데, 썩지 아니할 것은 곧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말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직접 신(神)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리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은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입니다. 창조는 21절이 묘사하듯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빅뱅이 첫 창조였다면 예수 재림은 첫 창조의 완성이자 재창조입니다. 첫 창조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면 재창조는 유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재창조의 능력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늘로부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변화의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설명이 막연하거나 멀게 느껴지십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지금도 제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63년 동안 살면서 내 몸을 구성하던 모든 세포가 계속해서 변화되었습니다. 언젠가 죽음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현재와 같은 몸으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런 믿음 안에서 어려운 시절을 잘 버텨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단들과의 진리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바울이 할례파들과 논쟁 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혀 새로운 몸으로, 즉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는 게 분명하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잘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온천에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서 얼굴에 먼지가 많다거나, 화장이 잘 됐다 못 됐다 하는 말로 서로 논쟁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런 것들은 벌거벗고 온천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순간은 바로 온천물에 들어가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만 한다면 땅의 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혀 새로운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바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한 다음에 한 마디 덧붙인 빌 4:1절을 저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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