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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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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60911 |
유예된 심판
눅 13:1-9, 사순절 셋째 주일, 2016년 2월28일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성경에는 아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에 관한 여러 이야기입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읽어서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있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가능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지만 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력에 따라서 성경을 택하다보니 그렇기도 하고, 불편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재앙과 죄
오늘 제3 독서인 눅 13:1-9절이 그런 말씀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에 왔다가 우연하게 그랬는지 아니면 계획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이들을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생겼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피를 이들이 성전 제단에 바치려면 동물의 피와 섞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기서 거론되는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한 사람들이라서 자신들을 식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압력에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하던 시절에 조선 사람들이 암살단을 조직해서 일본 고위 관리들이나 조선의 대표적인 친일분자들을 암살하던 것처럼 2천 년 전 유대인들도 그렇게 저항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훨씬 거칠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폭동과 테러를 일으켰고, 치안 유지를 가장 중요한 업무로 생각하던 빌라도 총독은 이들을 강력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요즘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만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2,3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에 근거하면 예수님에게 테러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진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4,5절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고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큰 게 아니라 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런 일을 당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입니다.
작년 5월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공부하는 <욥기>의 주제가 재앙의 원인에 대한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집니다. 재산을 다 잃고 알거지가 됩니다. 자식들도 모두 죽어 참척의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재앙이 욥에게 떨어진 겁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욥이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자 아내는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불평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로 인해서 이런 운명에 떨어진 거니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욥은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진다면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까요?
우리 주변에 재앙을 당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불치병에 걸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도 많고,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거의 세계 최고입니다. 가족 살해 사건도 종종 일어납니다. 장애로 태어나기도 하고, 나이 들 때까지 취업을 못해서 백수로 지내기도하고, 어떤 경우에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런 이들을 볼 때 안타까운 생각이 들 겁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서로 도와가면서 그런 어려움을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기 삶을 바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게 돌아가는 거 같아도 어려운 이웃을 희생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유지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형편에 맞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을 겁니다. 우리 교회도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재앙과 재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나 태도는 여전히 건강하지 못합니다. 죄로 인한 결과라는 주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1) 하나는 재앙을 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낙오된 사람들을 향해서 ‘네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네 책임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성적 마이너리티들을 향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건 죄야, 그러니 심판받을 거야.’라고 비판합니다. 그런 태도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죄라고 여기는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2) 다른 하나는 나에게 재난이 닥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큰 참사에 관한 소식을 들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할 겁니다.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까 하여 늘 노심초사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런 태도는 다 재난과 불행을 죄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과 비슷한 겁니다. 예수님에게 빌라도 사건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재앙과 불행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도 역시 죄와 연결해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끔찍한 사건과 실로암 망대의 재난을 거론하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3,5절)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죄를 회개해야만 이런 재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과연 그런가요? 본문을 더 따라가 봅시다. 예수님은 눅 13:6-9절에서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어떤 사람이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수확 때가 되어 포도원에 왔는데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삼년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관리인에게 아무 소득이 없으니 이제 무화과나무를 뽑아내고 다른 걸 심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관리인이 한 해만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면서 돌볼 테니, 그래도 1년 후에 열매가 없으면 그때 뽑아버리자는 겁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본다면 이 포도원 이야기도 역시 죄를 회개하라, 삶의 열매를 맺으라, 그렇지 않으면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직설적으로 질문해봅시다. 회개하면, 그리고 믿음생활 잘하면 재난과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요? 회개와 믿음이 간접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둘 사이에는 상관성이 없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햇빛과 비가 착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것처럼 재앙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나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재앙이나 어려운 일은 일어나고, 거꾸로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도 행운이 찾아옵니다. 지금 시리아 난민들 틈에 끼어 있는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거기서 태어나고 싶어서 내어난 거는 아닙니다. 죄로 인해서 재앙이 임한다는 말은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요 9:1절 이하에는 나면서부터 시각장인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이 이런 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회개와 열매 운운하신 것은 죄로 인해서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죄와 재앙을 연결시킴으로써 그런 죄와 재앙으로부터 모면되었다고 여기고, 자기의 삶에 안주하는 태도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죽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재앙의 보편성
빌라도의 칼에 의해서 죽은 갈릴리 사람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의 운명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재앙입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건강한 편에 속하지만, 언제 어떻게 큰 병에 걸릴지 모릅니다. 우리교회에 일주일에 하루 호스피스 병원에서 자원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간혹 거기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던 판넨베르크 선생은 말년에 수년 동안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남편과 아들을 거의 동시에 잃은 후 식음 전폐하면서 수녀원에서 몇 달을 보냈다고 합니다.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시냐고 하나님께 따졌다고 합니다.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재앙이 자기만 피해가야만할 이유는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가능하면 큰 어려움 없었으면 합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신자들의 구성이 주로 중산층이 많은 까닭인지 크게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앙생활을 절박하게 하지 않는 건지도 모릅니다. 간혹 어려운 일을 당한 분들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잘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인생이라고 해서 그게 무조건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삶이 추상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재앙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앙을 실존으로가 아니라 자기와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재앙을 만납니다. 무슨 말인가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칼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에 깔린 사람은 좀 일찍 죽은 것이고, 이 소식을 예수님에게 전하는 사람들은 약간 뒤에 죽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지진 현장에서 죽고, 또 어떤 이는 내전을 취재하던 자리에서 총 맞아 죽고, 또 어떤 이는 난민으로 떠돌다가 죽고, 병들거나 늙어서 병실에서 죽습니다. 운 좋게 재앙을 겪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해도 마지막에는 결국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이런 마당에 저 사람의 재앙과 불행이 죄 때문이라고, 저 사람의 불행한 삶이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주제 파악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재앙, 불행, 죽음이라는 상황은 인간의 가장 분명한 깊고 어두운 실존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비관적이라는 뜻으로, 결국 죽음이라는 재앙을 피할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살아도 좋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설교는 복음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설교하고 싶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모든 재앙의 결국인 죽음과의 싸움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이미 진 싸움입니다. 아무리 건강식품을 많이 먹고, 건강관리를 잘하고, 의학의 도움을 많이 받아도 약간의 시간을 늘릴 수 있을 뿐이지 죽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승리자입니다. 종말론적인 승리자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를 믿기에 죽음으로부터의 승리가 담보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열매는 믿음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다시 보십시오. 3년 동안이나 키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자 주인은 그걸 뽑아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관리인이 주인을 말렸습니다. 자기가 1년만 더 노력해보겠다고, 1년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뽑아버려도 좋다고 말입니다. 무화과나무는 1년 유예 선고를 받은 겁니다. 그 사이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받아들였을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뽑히지 않기 위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게 그들에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죄와 죽음이 극복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열매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없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무작정 교회를 키우는 열매가 아니라 예수를 옮게 믿는 열매를 맺으려고 나름으로 노력합니다. 1년의 유예만을 보장받은 사람처럼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런 믿음이 초기 기독교 당시의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저주스러운 삶을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전 1:23-25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교양을 갖추고, 적당한 문화생활을 하면서 고상한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수준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들은 1년이라는 시간만 보장받은 무화과나무의 운명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깨어 있는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믿음 문제를 절박한 심정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과도하게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사이비이단들처럼 믿음 문제를 닦달하듯이 밀어붙이는 게 능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사를 팽개치고 교회생활에만 열광적으로 매달려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에 몰입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거룩한 몰입입니다. 왜냐하면 그 몰입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외면하고 있는 재앙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유를 통해서만 여러분의 삶은 추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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