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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22 추천 수 0 2016.04.24 15: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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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40-52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장 40절-52절: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 앞에 보니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길 그곳은 임명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 됐던 실력제라고 하셨다. 타락된 세상은 실력제도 있고, 임명제도 있고, 낙하산제도 있다. 세상은 타락된 세상인 고로 정확하지를 못하다.


‘섬기는 자가 커진다. 크고자 하면 섬겨라.’ 일반적 이치로도 밑에서부터 닦아 올라가야 한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우면서 닦아서 올라가다가 어느 정도가 되면 숙달이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역시 교회에서도 섬기는 자가 커진다. 아무렴 섬기는 자가 점점 숙달이 되니 실력화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딸들이나 아들이 집안일을 할 줄 모르다가 시집가서 한다고? 그만큼 고통이고 고생이다. 돈이 있으면 나가서 사 먹는다고 할지라도 이건 하나님 앞에서 갖춰야 할 자세가 문제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돈이 있으니 손님이 오면 시장에서 사다가 다 해 버린다.


어릴 때부터 부엌에서 숙달되는 교육을 받지 못하면 아닌 말로 부잣집에 시집을 가면 일을 못한다. 일이 무서운 거다. 그러면 눈총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대우를 못 받는다. 그러니 ‘뭘 배워왔느냐’ 하게 되고, 그러는 통에 고통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섬기되 자기가 커질 수 있는 곳에서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곳에서 섬겨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비진리에서 섬기면 안 커진다. 경험적으로 보면 내가 교훈이 없는 곳에서 충성봉사를 많이 했는데, 그렇게 되니 자동적으로 행사위주로 짜야 한다. 그렇게 해서 놀이적으로 교회를 잘 인도할 런지 모르나 성경은 못 가르친다. 나의 이런 경험을 가지고 그렇게 나가는 교회 교인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믿는 거다’ 라고 말을 해도 안 듣는다. 그러니까 이건 안 커진다.


특히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자기가 말씀의 인격으로 커져야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말씀의 종이 된다. 그게 커지는 거다. 계시적으로도 하나를 깨닫고 둘을 깨닫고 나가면 계시확장이 된다. 목사님들의 세계는 성경에 도통이 돼야 한다. 이게 안 된다면 목사로서의 기본정신이 틀렸다. 하나님 앞에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 흔히들 볼 수 있는 게 요즘 아무나 목사가 돼서 이방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하니 무슨 대우가 되겠느냐? 대우를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세가 틀렸다.


이렇게 되니 우선 목사의 가정에서부터 문제가 발생이 된다. 여자목사의 경우는 가정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남편도 자녀도 여자목사의 말을 안 듣는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느냐? 아예 처음부터 발상이 잘못됐다. 이제 와서 잡으려고 하니 문제가 커질 대로 커졌는데 어떻게 잡히겠느냐? 각자 따로 떨어져서 개인주의로 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이 크게 벌어지는구나. 목사의 세계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느냐?


섬긴다는 게 뭐냐? 무슨 일에 섬겨야 하느냐? 섬긴다는 것은 먼저 주종관계에서 그 다음에 횡적 관계가 되는 건데, 이 때 하나님 기준에서 사람을 섬겨야 하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절대로 섬겨지지를 않는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들어가는 거다. 여기서 이웃이란 집안 식구고 나 외에 다른 사람인데, 그런데 이웃을 섬겨지지를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섬겼다는 말이 되는 거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 면에서 같이 들어가는 건데 그게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면 1세대가 지나가고 2세대가 지나가는 것인데, 인간 존재 하나의 영이 그렇게 귀하다고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물질 이해타산으로 따지며 산다면 망할 수밖에 없다.


성경연구를 할 때 계시이치가 하나 발견이 되면 또 발견이 되고 또 발견이 되고 하며 성장적으로 확장이 된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온전을 염두에 두고 섬기며 나가면 자기는 모든 면에서 성장 확장이 된다. 이게 커지는 거다. 지혜지식성에서 커지고, 도덕성에서 커지고, 능력성에서 커진다. 먼저 기준을 그렇게 가지고 섬기면 사람이 깨닫는 면에서 커지고, 신앙성장 면에서 커지고, 활동 면에서 커진다. 바로 커지고 옳게 커진다. 이게 기독교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커지는 사람은 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밑에서부터 종이 되어 섬기면 능수능란하게 되고, 이렇게 밑에서부터 위로 커지면 하나님 집의 청지기가 된다. 종이 될 사람이 잘난 척하고 남의 사정도 모르고 하면 안 된다. 종이 될 사람은 마음도 넓어야 되고, 성격 성질도 좋아야 하고, 많은 사람을 섬기려니 마음도 좋아야 한다. 진리를 안다고 하며 머리로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이 인격화 되면 품행적으로 나오게 돼 있다.


마음 맞는 교인들끼리 모이면 서로 좋아하지만 같은 교인들끼리도 서로가 자기의 마음에 안 들면 다툼이 나온다면 둘 다 고치든지 하나가 고치든지, 어쨌든 모두 주님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 그래야 너도 나도 바로 되는 거지 어떤 한 사람을 기준해서 하면 안 된다.


우리 교인들 모두는 커져야 한다. 그리고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사람이 멍청하면 사회에 나가서 어디에 쓰겠느냐? 이러면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왕따 당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부터 사람이 부지런하고, 눈치가 빠르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만 욕심내지 말고 다른 사람도 생각을 하면서 ‘나 좀 도와다고’ 하면 같이 맞들고, 그러는 가운데 친해지고. 그 얼마나 좋으냐?


사람과의 관계성이 껄끄러워지면 서로가 피곤하고 자기가 축소가 된다. 마음이 넓을수록 모든 면에서 품위가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 자기를 섬겨달라고 한다. 자기는 어찌하든 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병든다. 그 성격 성질상 병이 좋아하도록 되어 있는 성격 성질이다.


46절-52절: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의 이름은 바디매오. 디매오라는 이름의 뜻은 ‘존경’이라는 뜻이다. 아들 바디매오가 자기의 눈을 뜨게 된 신앙심을 가졌으니 이름의 뜻처럼 그 아버지를 존경할만하다. 바디매오가 이 신앙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추측컨대 자기 아버지로부터 여리고에서 되어진 하나님의 일을 많이 들은듯하다.


그러니까 구약으로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목숨을 걸고 살려낸 기생 라합의 얘기나, 여리고성이 무너진 얘기나, 여리고성을 건설하면 저주를 받는다든지 등등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아버지가 바디매오에게 그런 얘기를 해 줄 때에 이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니 아버지의 노력이 존경스럽다는 의미가 된다.


성경에 보면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인 것 같은데 계시적 신앙사상으로 들어가면 그게 연결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바디매오의 아버지 이름이 괜히 디매오 즉, 존경스럽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찬송가에 보면 ‘어머니가 시시 때때로 눈물 흘리며 성경얘기 해 준 게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고 하는 게 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성경얘기 해 주느냐, 돈부터 많이 벌어오라고 하느냐? 성경얘기는 자녀들에게 인격형성이 된다. 즉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간다. 학교에서 배우는 위인전 등은 일반적인 일인데, 그 정신을 가지고는 성경이 들어가지 않는다. 감화성이 다르다. 쉽게 말해서 다윗과 이순신장군의 감화성이 같으냐? 다르다. 얘기를 들려줄 때도, 감화성을 가져도 하나님의 신이 역사할 수 있는 감화성의 얘기를 들려줘야지 그렇지 않고 세상 영웅담은 딴 사람을 죽이고 해야 그런 영웅이 된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그 노력,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잠재돼 있는 부자지간, 혹은 모녀지간 참 복된 가정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녀지간임에도 가나안 여자와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보면 참 슬픈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게 다 교훈과 연결이 돼 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나오고 이름이 나올 때는 교훈의 질적인 면에서 연결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부모님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무리 이방인 자녀들이 훌륭해도 그거 절대로 돋보지 말라. 세상 속화된 믿음을 가진 부모와 자녀들은 이 얘기를 듣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건 세상생각이고 네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게 되면 어른이 돼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효력발생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가정에서 부모자식간의 말들이 감화성이의 말이 아니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는 돈소리 부자소리 재산소리 등 살벌하다. 이건 감화성이 달라진다. 사람이 말을 할 때 어떤 말에는 기분이 좋고 어떤 말에는 기분이 나쁘고 하는 건 말에서 벌써 감화성이 달라진다는 거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속에서 영감이 달라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어떤 분위기나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보거나 또는 코로 냄새를 맡거나 좋은 음악을 귀로 듣거나 하면 자기 신체 내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더운 날씨와 추운 날씨에도 몸에 변화가 온다. 좋은 음악이나 음식이 있을 때 자기 정신에 의해 변화가 온다. 의학적으로도 이런 것에 의해 몸이 고쳐지고 하는 현상이 나온다.


자기는 신앙이라고 하지만 자기 신앙의 성향성이 어느 쪽으로 더 잡혀졌느냐에 따라서 자기 마음의 변화가 상당히 온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영감적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자기 이성도 지배하고, 이성이 지배되면 몸까지 지배가 된다. 성경에 보면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다. 이건 정확하다. 이런 성경말씀 속에는 그런 표현들이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거다.


아들이 눈을 뜨고자 하는 적극성이랄까? 여기에서 그 아버지의 평소의 교훈에 존경성이 가는 거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읍으로 들어가셨다. 여리고는 ‘향기롭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종려나무가 많은 성읍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향기 나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을까?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성읍에서 나가는 길가에 앉아서,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가가 아니라 그 표현이 여리고를 나가는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거지 바디매오가 구약에서 여리고 성 안에서 되어진 그 정신을 알고 그 성을 나가는 길목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미래적으로 희망이 보인다.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며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행:에 있는 앉은뱅이가 성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건 좋은 뜻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앉아있으면서 구걸을 하니 성전 안으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러 갈 때 하나님을 만나려고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꾸 멈추게 만든다. 눈으로 보게 해서 옆을 보게 만든다. 이걸 나쁘게 지금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헌금을 가지고 가는 마음을 노리는 수법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의례히 불쌍한 사람을 보면 뭔가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앉아있으니 이걸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되게 걸그작거리는 존재다. 이게 바로 세상 소원성을 갖고 예수 믿는 자를 말하는 거다. 그 정신을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하려면 쑥 들어가야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것을 구걸하고 있으니, 그런 교인들이 예배한다고 예배당에 앉아있어도 그 신앙의 정신은 어디에 앉은 거냐? 길가에, 성전 문 앞에 앉은 정신이다. 궁극교회 교인들은 그런 신앙의 수준에 있으면 안 된다.


영의 눈으로 보면 영적 소경이 된 채 그대로 있으면, 영의 눈이 열리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길가에 앉게 마련이고,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다면 이건 누구든지 소경이다. 목사도 소경이고 전도사 장로도 소경이고, 예수 믿으면서 영의 눈이 뜨이지 못했다면 목사고 장로고 간에 소경에 불과하다.


소경은 또 귀가 밟아야 남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 ‘어디로, 어느 장소로 가면 돈을 많이 번다더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 주머니의 돈소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사업성의 대화에서 돈을 볼 줄 알아야 되겠고, 신발소리만 듣고도 ‘아, 저 구두소리를 들으니 재산이 얼마짜리가 지나가는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은 자기 돈바구니를 키울 목적으로 살고 있고, 그러면서 돈바구니가 여러 개다. 요즘은 카드로 돼 있다. 이게 돈바구니다. 사람이 그렇게 ‘돈 돈’ 하게 되면 붕 뜬다. 그러다가 그 돈이 날아가면 자기도 날아간다. 돈이 날아갈 때 날아가는 그 바람이 그 돈을 어느 구석에 처박을지 모른다. 너도 그와 같이 돈을 잡으려다가는 어느 구석에 쳐박힐지 모른다. 말하자면 사는 목적을 그렇게 두면 안 된다. 그래서는 예수 바로 못 믿는다. 사람 꼴이 안 된다. 돈은 예수 믿는 일에 이용물 사용물 활용물이다.


소경 바디매오는 좋은 아버지를 두었는데, 그가 과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돈바구니를 키울 목적으로 살고 있을까?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일까? 겉으로 보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 같으나 그건 생계유지 정도였고 삶의 생애목적을 거기에 두지는 않았다고 본다. 내가 볼 때는 소경 바디매오를 좋게 보고 싶다. 왜냐?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봐도 그걸 알 수 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기 때문에 길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를 듣고 있다. 바리새교인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 서기관 율법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 평민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와 대화를 다 듣고 있다. 마차소리, 군마소리, 개 짖는 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돈 바구니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 때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치고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예수님을 보는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할 텐데 돈 떨어지는 소리를 제일 듣기 좋아한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렇지 않았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길가에 앉아있는데 허다한 무리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사이로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린다. 오늘날도 나에게 그런 소리들이 수없이 많이 들려오는데 그 많은 소리 가운데서 나는 유난히 무슨 소리에 자극이 되느냐? 수많은 소리 가운데서 ‘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답다’하는 소리도 들리고, ‘저게 목사냐’ 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 가운데서 색다른 소리도 들린다.


47절-48절: 그 색다른 소리는 ‘나사렛 예수님의 행렬이 지나간다’ 하는 소리다. 이게 누구의 소리였을까? 어찌 됐든 이 소리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 한다. 그의 속에서 부르짖기를 ‘이때다’ 한다. 그래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다.


바디매오가 그동안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겠느냐? 오늘날 자기도 예수 믿으면서 영의 눈이 밝았는지 안 밝았는지 그것도 모른다면 바디매오와 같은 그런 기도가 어떻게 나오겠느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그 의도는 ‘많은 무리들과 제자들이 헌금을 했으니 그 돈 좀 나에게 뿌리고 가십시오’ 그런 뜻이냐? 아니다. 구걸을 하는 그 모습이 불쌍한가, 눈이 감겼다는 게 더 불쌍한가? ‘나사렛 예수여’ 하고 부를 때에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어떤 심성을 가지고 부르느냐에 따라 존경이 되는 말도 되고 무시하는 말도 된다.


나사렛 예수는 거룩한 분이시요, 우리로 구별 분별케 하는 분이시요, 신령한 영의 눈을 열어주는 분이시다. 이 분이 소경 바디매오의 곁을 지나가실 때 그의 소원성이 가슴에서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래서 ‘내가 눈을 뜰 기회는 이때뿐이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가시면 나는 죽을 때까지 눈을 못 뜬다.’ 그 때의 바디매오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에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다. 눈이 뜨이기를 소원하는 소경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소경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께로 인도는 못할망정 예수님으로부터 눈이 뜨기를 바라는 그를 조용히 하라고 잡아 앉힌다.


신령한 눈이 뜨이길 바라는 오늘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릴 때 어떻게 하겠느냐? 구별되고 분별되는 거룩한 말씀이 자기에게 들려올 때, 또는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본문은 육적 소경을 들고 와서 바디매오의 심정을 보여주는 거지만 오늘날 자기는 성경을 봐도 뜻을 모른다면 이게 바로 영적 소경인데 이런 자기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소경의 부르짖음에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라는 이 말속에는 자기의 식구도 들어있고, 친구와 동료들도 들어있고, 종교적 단체도 들어있고, 노회원도 총회원도 총장도 다 들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창조의 목적대로 되는 교훈을 모르는 모든 교인들, 세상적인 신앙을 갖고 세상을 구걸하는 모든 교인들을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이에 소경은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한다. 자기 속에서 부르짖는 그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영의 자녀는 영적 눈이 다 뜨여져야 한다. 그런데 눈 뜨이기를 바라는 그런 교인들을 잡아 앉히는 자를 내가 많이 봤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북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안식일 날에 북조 백성들이 남조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북조의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다. 이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한 거다. 이는 교인의 마음을 도적질한 거다. 또 민심이 다윗에게로 못 가도록 중간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해서 자기에게 끌어당긴 일도 있다.


세상 마지막 때 거짓 목자가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해서 자기 패거리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영적 눈이 뜨여지지 못한 채 멸망 길 사망 길 넓은 길로 가게 하는 마귀의 역사다.


성경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씀인데 이 성경을 들고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은 교인 쪽 안 믿는 쪽으로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육신의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마치 신령한 영적인 눈까지 뜨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착각한 것과 같은 거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의 중심을 알고 계신다. 그 소경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하시는 말씀이 ‘저를 부르라’ 했다. 이 말씀을 받은 자들이 소경에게 가서 ‘안심하고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한 사람은 참 귀한 자인데, 이 말을 한 자가 누구며 그 앞에서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자는 누굴까? 그리고 지금 자기는 어느 쪽에 가서 있느냐? 그 자기의 위치를 생각을 해야 한다.


‘너를 말리지 않는다. 너를 죽이지 않는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라. 일어나라.’ 바디매오가 이 말을 듣자마자 누구의 인도를 바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예수님께 달려갔다. 여기서 겉옷이란 헤어진 옷, 떨어진 옷, 때 묻은 옷, 거지 행세를 하던 옷을 말한다.


헤어진 옷, 떨어진 옷, 거지 행세를 하던 옷, 그 정신 사상을 둘러쓰고 예수님께로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이 겉옷도 벗어버리고, 돈바구니도 버리고, 그 정신도 버리고 예수님께로 달려가니 예수님께서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길 원하느냐’ 라고 하신다.


소경이 눈 뜨길 원하는 것은 빤한 건데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슨 뜻일까? 그 물음에 소경은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소경의 입장에서 이건 정확하게 구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니 적중성이 맞는다. 단일이다. 소경의 소원과 예수님의 소원이 단일이고 적중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는 영적 소경이면서 돈바구니를 몇 개나 갖다 놨느냐? 여러 개를 갖다 놓으면 그게 다 채워지느냐?


본문의 이 말씀은 이런 비유를 들고 와서 지금 나의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자기는 예수를 믿으면서 지금 뭘 외치고 있느냐? 뭘 구하고 있느냐? 자기의 존귀영광성이 돈바구니에서 나오는 거냐, 눈이 뜬 자라야 자기의 존귀영광성이 나오는 거냐?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알면 사람이 지혜롭고 영특해진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물질초월이 된다. 고상한 사람이 된다. 물질초월을 한다고 해서 못 먹고 못 사느냐? 아니다. 세상을 구할 때보다 더 잘 살 수도 있다. 왜냐? 세상을 누가 가졌던 하나님께서 물질초월을 하고 사는 사람을 위해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쉬운 예를 든다면 돈은 기술자를 위해 있는 거냐, 돈을 찾는 사람을 위해 있는 거냐? 기술이 있으면 돈은 들어오게 돼 있는 거다. 지혜롭게 생각을 하라. 이치를 어기고 살면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다.


만일 바디매오가 세상에 속한 존귀와 부와 영광을 소원한다고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셨을까? 오늘날 우리들을 보고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하겠느냐? 처녀들은 ‘신랑감을 구합니다’ 할 거고, 청년들은 ‘신부감을 구합니다’ 할 거다. 일억을 줄까, 백억을 줄까?


예배당에 탁구대도 있어야 하고, 농구대 축구대 수영장 골프장 헬스장 영화관 방송실 커피숍 기도실 안수실은 필히 있어야 하고, 이걸 모두 갖추려면 얼마나 들겠느냐? 이 정도의 예배당 시설을 가지면 영의 눈을 못 뜨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느냐?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에게 ‘내가 너에게 몇 조를 줄께’ 라고 했다면 ‘아멘’ 했을까? 오늘날 자기는 ‘아멘’ 안 할까? 영의 눈을 뜬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인데 이게 돈을 가지고 따질 일이냐? 그런데 육신의 눈만 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물음에 ‘아멘’ 하게 된다. ‘아멘’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왜?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다. 뭘 보기를 원하느냐? 땅의 것? 아래 것? ‘위의 것,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 뜻이다. ‘인간창조의 목적에 관한 것,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 것이다.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고 했다. 여기 ‘네 믿음’이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보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믿음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걸 믿음이라고 인정을 해 주시는구나.


바디매오는 그 전에는 땅의 소리만 듣고 땅의 것으로만 살았는데, 보기 흉한 겉옷을 걸치고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을 보게 됐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좇으니라.’ 눈이 뜨여지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주님이 보인다.


눈이 보이는 그 즉시로 그 길로 구원의 주님을 따랐다. 구원의 주님이 나가시는 길에서 고침을 받았으니 이 바디매오는 그 길로 여리고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리고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마지막 인사를 할 새가 없다. 머뭇거림도 없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듯이 여리고의 건설도 버리고, 여리고의 인정정실도 버리고, 여리고의 돈바구니도 버리고, 여리고의 겉옷도 버리고, 여리고의 정신 사상을 다 버렸다.


여리고성은 어차피 무너지고 멸망당할 여리고성이다. 이런 여리고성에 살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시 보는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는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여리고의 멸망과 함께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될 뻔 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이 지나가신다’ 할 때 자기가 영적 소경임을 모른다면 어찌 여리고를 탈출할 수 있겠는가? 영의 눈을 뜬 자는 여리고를 탈출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간다. 이제 영이 눈이 떴으니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영적 구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인도대로 온전해지며 따라간다. 이것이 눈 뜬 자의 믿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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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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