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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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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3.3설교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아인슈타인’ 같은 어른이 되라.
고후3:3
2016.3.3.
17세기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이라는 과학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냅니다. 세상은 이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20세기에 또 한명의 과학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상대성원리를 들고 나온 아인슈타인입니다.
열흘간 스위스에 있었습니다. 손녀들이 스키 방학을 해서 같이 놀아주려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갖다온 딸이 밤이 되면 한국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열을 내는 게 아니겠어요. 뭘 보고 그러는가 싶어 어깨너머로 보았더니 ‘테러방지법’을 지연하려는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는 스위스에 살면서 뭐 하러 한국 T.V, 그것도 정치를 보면서 열을 내느냐’했더니 그 애가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아빠는 걱정도 되지 않으세요? 아빠 인생만 사시면 그걸로 다는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이미 꼰대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지 않고 행동하고 결단하죠. 이게 꼰대 짓입니다.
우리는 오늘 몇 명 되지 않지만 교회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교우들이 새로운 학년으로 넘어가고, 새로운 학층으로 올라서는 것을 격려하고 축복하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는 두 층위를 아울러야 합니다. 하나는 격려와 축복을 하는 어른들의 입장과, 다른 하나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살 게 될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는 설교가 되어야 하겠기에, 저는 아인슈타인의 생애를 통해 격려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그러면 오로지 과학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아인슈타인 뿐 만이 아니라 세계의 위대한 위인 가운데는 그 사람됨이 반만 알려진 경우가 꽤 있습니다. 헬렌 켈러, 챨리 채플린, 시몬느 베유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데,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평화운동가 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평화운동가라는 말은 그가 과학실에 들어앉아 세상 돌아가는 것 하고는 담을 쌓고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보다 그는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왜 세상은 아인슈타인을 과학자로만 소개하고 사회운동가로는 말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사회운동가로 말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격려와 축하를 받는 아린이 교우들에게 ‘아인슈타인의 편지’라는 책을 한 권씩 선물했습니다. 이 아인슈타인의 편지에는 그가 사는 동안 각양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와, 각양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아인슈타인이 과연 단순한 천재과학자만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과학자 그 이상의 사회운동가, 사회 변혁가,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높인 분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이 넓습니다. 오로지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꼰대’가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헨리 조지를 읽고 베블렌을 연구했습니다. 헨리조지는 1800년대 미국의 경제학자입니다. 토지가치세(토지공유제)를 주장한 사람입니다. 베블렌은 수학자인데 ‘유한계급론’이라는 경제이론서를 펴 낸 사람입니다. 이런 공부를 아인슈타인이 합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웬만한 학자만큼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식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주의가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을 통해 소비에트 공산주의 비판, 흑인 차별 금지등을 공개적으로 거론합니다. 1950년 대 흑인 해방론을 공개화 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후에는 유태인인 그는 이스라엘 건설에 적극 동참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등동한 권리를 주창하면서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배신자가 됩니다.
이런 내용들이 그의 편지에 담겨 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자가 아니라 억울하고 눌린 사람들의 편에서 살았던 그의 순진무구한 영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위대한 천재 과학자도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 살았구나’하는 위로와 힘이 솟구칩니다. 아인슈타인은 겉멋을 싫어하고, 자신의 명성을 약자들이 용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약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파는 걸 마구 허용했다는 겁니다.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는 이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격려하고, 쫓아가 응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약자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아인슈타인을 세상이 가만뒀겠어요? 그는 혹독한 댓가를 치룹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를 박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미국은 그런 아인슈타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유배를 시킵니다. 사회적으로 가둬두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죽을 때까지 감시당하고 감청당하다가 끝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주눅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그렇게 해맑은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 많은 말을 한 건 교육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학교교육의 실패자였습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학교교육에서 창의성이 살아남는다면 그건 기적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학교가 살아남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몽땅 까먹기 때문”에 학교가 계속 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과 교육관으로 교육에 대한 많은 글을 남깁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가령, “지식이란 죽은 것이고, 교육이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아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교육이란, 사고하는 능력과 공동체 정심의 함양이라고 헸습니다. 교육은 이걸 위해 있는 거지 출세, 신분 상승, 지식의 축적, 타자의 지배에 목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수 백 년 전에, 천제 과학자가 요즘에나 나올 법한 교육론을 피력한 겁니다. 이게 모두 사람, 약한 사람들이 이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인슈타인이 이런 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래서 교사들에게 특별한 격려를 합니다. 독재적이거나 관료적인 국가로부터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선생님만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외친 한 마디가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힘을!” 이는 필시 제도교육의 교사들만을 향한 외침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부모, 선배, 어른을 향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각종 교사 행사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교사들의 봉급문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은 내적 만족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노예는 아니다. 교사들이라고 해서 내적 만족감으로 자기아이들의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사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자랑 스러워 하라고만 말하지 말고 임금을 충분히 주라는 겁니다. 그 자랑스러움으로만 교육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1950년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조셉 메카시라는 이가 공산당 명단을 휘드르며 시작 된 이른바 ‘메카시 마녀사냥’ 이 일어납니다. 교육도 이 공산주의 사냥에 예외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회적인 언사를 쓰는 교사를 공산당으로 몰아 잡아들이는 겁니다. 메카시 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져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마치 국보위 같은 거였습니다. 윌리엄 프라우덴 글라스라는 교사가 이 위원회의 소환을 받았을 때 이를 거부합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친히 그에데 편지를 보냅니다. 이 엄혹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결국은 간디의 불복종 운동을 공격적으로 해나가자고 말입니다. 투옥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메카시 위원회에 협조하지 말라고 독려하는 편지였던 겁니다. 이런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어린이 교우 여러분, 아인슈타인을 반쪽만 알아서 ‘나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위인이 되어 그 명성을 떨쳐야 겠다.’이런 꿈을 꾸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배운 아인슈타인은 세상이 선전하는 반쪽입니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그 반쪽,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약자들을 위해 온갖 박해를 당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맑은 영혼을 소유했던 사회 변혁가가 아인슈타인입니다. 이게 여러분이 살아야 할 미래의 사람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해 냈기 때문에 위대한 게 아닙니다. 어른들과 교사들은 신앙인 그리고 지식인이 해야 되는 삶이 뭔지를 아인슈타인을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행동 옆에 아이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걸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쳐야 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은 부귀영달의 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늘 주지시켜야 합니다.
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봄 같은 어린 교우들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읽으며 행동하는 신념으로 빛났던 그의 얼굴을 봅니다. 저 얼굴에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아른거립니다. 아마 지금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이 시대의 어떤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까요? 그 편지가 이 시대의 약자들에게도 당도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편지가 되어라.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라.” 우리의 어린 교우들을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도록, 어른들도 교사도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고 가르쳐 우리 모두 누군가의 힘이 되고 생명이 되고 영혼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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