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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고난을 받는다

빌립보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38 추천 수 0 2016.04.27 23: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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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6-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하나님도 고난을 받는다.
빌립보서 2:6-7
 2016.3월20일 설교 11시 설교 원고입니다.


고난이라든가 격정(pathai)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땅에 사는 존재들, 특히 신에 대비되는 사람의 영역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고난이나 고통, 감정, 충동, 열정 등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서 파생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에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한다든가,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게 싫어서 그를 죽이려고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인간에게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하나님 곧 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헬라적이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흥분도 하나님은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은, 하나님은 ‘고난에 대해 무관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고대 헬레니즘의 신 표상이었습니다. 헬레니즘적 신 표상에서는, 하나님은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기원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불사 말입니다.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고난을 당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무감각하고 초월적인 존재의 하나님으로 믿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시대에나 가능한 믿음 체계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겁니다. 이게 왜 영적 분열인지 아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뭐라고 하는 가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으셨으며, 그 죽음으로 인해 내 죄가 홀딱 벗겨져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인 거죠. 그 하나님은 고난을 받고, 배고파하고, 슬퍼하고, 화도 냈는데, 그런 하나님의 그런 행동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고난을 받을 수 없는 분’이라는 믿음을 고수한다는 겁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배고픔과 목마름, 피로와 매질, 고통, 하나님에게 버림받음 그리고 죽음의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 즉 그가 사랑과 분노를 느꼈다는 사실이 증언되고 있지요? 하지만 교부철학에서는 가능한 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공리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심지어 그리스도가 음식을 실제로 소화시키고 배설한 사실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무관한 하나님 표상에서는 고난의 원인을 인간에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염병, 전쟁 그리고 다른 곤궁들이 있는 것은 이를 통해 우리 죄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은 형벌이요 시험이거나 교육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얻으려는 하나님의 시도라는 것입니다. 죌레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고난의 원인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는 신학을 그리스도교적 매저키즘이라고 부르며, 그런 신학의 근거가 되는 신 이해를 신학적 새디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러한 신학은 죄 없는 예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고난은 신자에게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스런 마음과 끝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의 진정한 의미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껴서 납작 엎드리게 하려고 그가 일부러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고통 속에 죽었느냐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초대교회의 찬송가로 보이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6-7)

이 찬가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 즉 모든 면에서 완전한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고 종의 모습을 취하고 인간이 되는 데서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7절). 이것은 예수께서 온갖 고난을 거쳐 십자가형을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 구절에서, 한글 번역은 마치 “자기를 비워서”가 분사구이고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과 같이 되었다”가 주문장인 것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를 비운 것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이 되기 위한 겸손의 행동인 것처럼 해석됩니다. 하지만 헬라어 성경은 한글 번역과는 정반대로 “모습을 취하고”와 “사람과 같이 되었다”가 분사구로 되어 있고 “자기를 비웠다”가 주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의 모습을 취하는 것과 사람이 되는 것은 부수적 설명일 뿐이며, “자기를 비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거죠. 자기를 비우는 행동은 도덕적 겸손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조금 ‘덜어내는 게’ 아니라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정치가들이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말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대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인데 대개는 상대방을 궁지로 몰기 위한 말장난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 찬가의 구절은 마음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운 것입니다. 이를테면, 노약자가 지하철을 탔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시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노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든지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죠. 하지만 겸손한지 어떤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일어나서 자기 자리를 내준다면 그것은 그 노약자에게 도움이 됩니다.

예수의 고난이야말로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에게 빈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비어있음이요 결핍이었습니다. 내가 결핍되지 않고는 상대방에게 자리를 내 줄 수 없습니다. 당시의 바리새파 율법학자 사두개인 헤롯왕가와 총독들 대제사장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들 자기 욕심과 경쟁심으로 가득차서 어디에도 빈 곳이나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의지할 데를 찾을 수 없었고 숨 쉴 공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매도하여 사람들이 질식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덜어 틈을 내주는 분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죄 많은 여인들이 가서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었고 의지하고 밥상을 같이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면서(막 2:17) 몸소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사랑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몸소 결핍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자, 예수께서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덜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겪는 고통이나 문제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워주심이 되고 결핍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조금은 허술하고 비어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습니다. 내게 어려운 일이 닥치고, 고통이 일어날 때 그건 ‘너도 예수처럼 네 자신을 비워 남이 너의 구멍 난 곳으로 깔보기 쉬운 사람들이 들어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고 그런 건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틈을 좀 내주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틈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감정적인 틈, 환경적인 틈, 기회의 틈, 경제적인 틈, 이런 게 깊어져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남을 위해 슬그머니 내 놓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죠.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은 나 때문에 죄 없이 죽은 예수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숨 막히는 욕망의 숫자판에 좀 빈 칸을 만들어서 생명의 놀이판을 만드신 예수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빈 칸 같은 사람으로 살고  빈자리가 많은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으로 마련된 잔치 자리로 신부가 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자리를 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도 내 생애에서 누군가 내게로 맘 놓고 들어와 감정도 나누고, 돈도 나누고, 목숨까지 나누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맘 놓고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나로 인하여 그가 잔치를 즐기도록 해야 합니다.

고난 주간이라고 억지로 슬픔을 지어내면서 청승을 떨 게 아니라, 나를 덜어 다른 사람이 내 삶의 자리로 들어오게 해야 맞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고난을 맞는 믿음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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