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12 추천 수 0 2016.05.01 16:00:24
.........
성경본문 : 막11:1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장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성전 안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


‘때가 이미 저물매.’ 둘러보시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그 말인지?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서 나가사다.’ 그리고 베다니로 나가셨다.

이 속에서 현재적으로 자기에게 이룰구원의 교훈으로 주시는 뜻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인들은 지금이 세상 마지막 때라고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분이 성전에 들어가사 성령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둘러보신다고 하셨으니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눈을 가지고 예수 믿는 세계적인 기독교계를 둘러보아야 하겠는지를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라고 하시는 것은 물론 구약성경에도 있지만 이방 불신자들의 악한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해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계의 교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인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는데 이 때 이방인들에게 외쳤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과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특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감람산에서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린 거냐, 하나님을 믿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린 거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예수 믿는 기독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예수님과 같은 눈물을 흘려야 하겠는데 이방세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지, 아니면 지구상 전체의 기독교계의 신앙정신을 놓고 눈물을 흘리는 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해 달라고, 병 고쳐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건지? 그게 뜻이 있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는 걸 보면 안 믿는 이방인들이 악해서 심판을 하시는 건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많아서 꼴 보기 싫다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건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정신도 쌩쌩하고 율법대로 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닮는 게 없어서 심판을 하는 건지? 어느 거냐?


예수님 당시 바리새교인들이 율법대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더 잘 믿어보자고 자기 몸에 해가 되는 데도 ‘이래야 믿음이다’ 하며 이레에 두 번씩 기도를 한다거나, 안식일 날은 십리 이상 가면 안 된다고 하며 10리를 갈 일이 있어도 5리만 가는 등 자기가 스스로에게 성경구절을 달고 제재를 했다.


그러면 주님은 안식일 날 5리만 갔을까?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옮기려면 5리 길도 있을 것이고 십리 길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왜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성전 안에서 양 잡아 제사 드리지 않고 밖으로 다니면서 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미친 자를 위해 귀신을 내쫓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했느냐? 그러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식자들아. 마귀의 지식이다’ 그랬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면 주님께서 왜 율법을 어기는 것 같은 행동을 하셨는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건 ‘말세에는 교회에 다니는 자가 적다’ 그게 아니다. ‘주일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성경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기록영감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기록케 한 것인데,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온전, 성품, 인격, 하나님의 속성을 위해 세상의 모든 사건 환경 존재를 동원하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심히 적다는 말씀이다.


믿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덧입은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은 부활 때 그대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건 질이 신령성이요 천국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도 그렇고, 세상 모든 것을 보는 것도 그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봐야 하겠는데, 설교를 듣던 기도를 하던 집회를 하던 그 중심을 가지고 봐야 되겠는데 그게 없다면 그게 어째서 믿음이냐? 기준이 없는데 뭘 가지고 믿음을 따질 거냐?


교회 안에서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사회적 윤리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경을 보고 그 기준을 가지고 따질 거냐? 그건 성경이 아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보면 기독교가 이방종교와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그런 자들이 이방종교와 손을 잡는 거다. 이방인들이 부르짖는 것을 교회에서 받아들이자? 하나님에게 그런 말을 해 봐라. 성경에 있지 않느냐? 우상을 섬기는 그 가정 그 나라는 하나님의 형벌이 들어간다. 이방종교와 손을 잡는 그 자들이 이단 삼단 백단도 되는 거다.


어느 교회에 보니까 ‘우리교회에는 신 천지는 못 들어옵니다’ 라고 출입구 앞에 붙여 놨다. 신 천지가 이마에 표를 붙였느냐? 도둑이 표가 있느냐? 거짓 종이 표가 있느냐? 참으로 어리석다. 너부터다. 주님 앞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바리새교인들, 주님의 헐뜯는 자들 등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교회 안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들어온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된 기준을 가지고 구별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걸 붙여놨다는 자체가 너부터 신 천지보다 실력이 없다는 증거다.


신 천지는 들어오지 말아라? 말이 될 말이냐? 그것보다는 ‘우리교회는 사단 마귀 죄는 안 받아들입니다’ 라고 해야 더 옳지 않느냐? 사단 마귀가 눈에 보이느냐? 어찌 그리 어리석고 어린애만도 못한 소리를 할까? 이치를 아는 거냐? 참으로 한심스럽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믿음의 이치가 없구나. 선포하는 말씀 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없구나’ 라는 것이다. 이건 죽은 말이고, 사역이고, 이런 곳에서는 ‘건물 크게 짓자’ 하게 되고, ‘교인 배가운동하자’ 하게 된다. 이건 신앙운동이 아닌 종교운동일 뿐이다. 주님은 종교운동을 하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 기독교 안에 종교운동이 많으니, 신비주의 구국주의 은둔주의 극기 극복주의 등 참으로 많다.


그런데 교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그래도 그런 사람들보다는 사회 윤리 도덕적 개념으로 가르치는 교회는 조금 낫다’ 하는데,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인 개념으로 가르치는 데가 신비주의나 구국주의자들보다 조금 낫다고 한다면 그러면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인 교훈이 계시냐? 그게 하나님의 뜻이냐? 그거나 저거나 선악과 따먹고 나온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 개념인데 그게 성경의 계시냐? 하나님의 뜻이 그걸 먹으라는 거냐? 하나님 말씀은 ‘생명과를 먹어라. 안 죽는 거 먹어라. 안 죽는 정신을 가져라’ 하신다.


예수님은 영원히 안 죽는 것을 교훈하셨다. 천국복음은 안 죽는다. ‘하늘나라를 말씀 하시더라’ 라고 했는데 하늘나라도 안 죽는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든다는 증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왜 의사들이 병자를 고치는 개념으로 알고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니 교인들이 그런 데 얼마나 잘 속겠느냐? 성경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냐?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성전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만나자는 약속의 장소다. 그걸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끌고 와서 보면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고 ‘그 모임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성전 안에서 나오는 거냐’ 이게 중요한 것이다.


계:에 보면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이 있는데, 목사가 하나님이 아니고, ‘목사가 설교 잘 한다’ 그게 아니고 ‘그 메시지 속에서 하나님의 의사가 나오느냐’ 그게 중요한 거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의사와 뜻이 나오는 거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 목사를 신격화 시키지 말라. 목사도 사람이다. 우상화 시킨다면 이방종교의 교주와 다른 게 뭐냐?


‘때가 이미 저물매.’ 교회의 설교말씀을 들어보면 벌써 ‘아, 이거 때가 저물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설교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로 들어가면 ‘아, 이 교회 교인들은 내리막길이다’ 그렇게만 보지 말고 자기의 신앙의 질도 살펴봐야 한다. 자신이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본질을 안다고 할지라도 기도가 세상 소원 목적의 기도라면 이건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과 똑같은 거다. 누가 여리고로 내려갔느냐? 제사장도 내려갔고 레위인도 내려갔고 종교지도자들이 다 내려갔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설교를 하면서 그 사상 소원 목적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아닌지?


여리고를 건설하는 자는, 내려가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건 계시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성경을 역사로만 붙이면 틀리는 게 많다. 계시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뜻을, 영적인 정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령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때가 저물매’ 하는 이 말이 성전 안이 너무나도 넓어서 아침에 들어가서 때가 저물 때까지 계셨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신을 말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의 신앙정신이 밝은 건지? 세상을 구하는 자는 이건 이미 때가 저문 것이다. 때가 저물면 박쥐도 나오고, 캄캄해지면 이리나 늑대나 들쥐나 올빼미 등이 많이 나온다. 이치가 그렇다.


성도들의 신앙이 밝지 못하고 어두우면 잠자는 신앙이고, 잠자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 게으른 쪽으로 들어가 있다. 깨달음이 밝지 못한 것은 다 잠자는 신앙이다. 이건 정신 사상적 신앙 영적 면에서의 얘기다. 철야기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과 사상적으로 신앙 영적 면에서의 얘기다.


지금 때가 저문 것이 확실한 거냐? 주님이 가까이 오신 게 맞느냐? 때를 보고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고, 또한 자기 신앙이 하나님의 재앙에 가까이 가까이 가는 건지, 내리막길인지 오르막길인지, 차원을 높이려고 하는 것인지 때를 보고 살펴야 한다.


올라가는 것은 힘을 써야 되지만 내려가는 건 가만있으면 내려간다. 이치가 그렇다. 산 고기는 냇물을 거슬러서 자기 고향을 찾아서 올라간다. 일반자연을 들어서 신앙계시적으로 이치를 알려주는 거다. 자기 신앙을 점검해 봐라. 금방 나온다. 누가 말하기 전에 이치만 갖다 대면 자기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다. 그게 진리이치다. 이치만 바로 갖다 대면 자기가 틀린 답을 가지고 있는지 옳은 답을 가지고 있는지 나온다.


예수 믿는 건 감정이 아니다. 교회 다닌 경력이 아니다. 예수 믿는 건 이치대로 사는 거다. 진리이치대로 살지 못하면서 경력을 자랑하는 것은 외식이다. 외모 모양 경력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외식이다. 왜? 그런 것들은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므로, 부활 때 다 빠지므로. 그래서 부활을 시키는 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나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실 때 때가 이미 저물었다고 하시는 것은? 1.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저물었다? 2. 종교적 정치가 썩었다? 3.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그 신앙정신이 썩었다? 3번이다.


썩었다는 게 뭐냐? 신앙사상이 정신이 물질성적으로 들어간 것은 그 신앙정신이 썩은 거다. 물질은 썩는다. 이러면 그 사람은 시간 따라 변질되고 시대 따라 변질 변동이 된다. 종교적 유행을 가지지 말아라. 그건 물질성적인 신앙사상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적으로도 영원히 동일하시다.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대적 과학적 역사의 진행이나 진보성을 몰라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거냐? 무엇에 대해서 언제나 같다는 거냐? 구약시대도 하나님의 온전, 신약시대도 하나님의 온전, 마지막 시대도 마찬가지, 에덴동산 안에서도 마찬가지. 그 뜻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인간 자기 눈으로 보기에 ‘상황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하니까 예수 믿는 것도 달라야지’ 하는 건 네가 뭘 잘 모르는 거다. 그렇게 되면 누가 기준이 되는 거냐? 시대적으로 장소적으로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다르다면 누가 기준이냐? 이치가 인간이 기준이 되는 거다.


성경은 인간이 기준이 된 것이냐? 세상을 만드신 분이 인간이냐? 마지막 세상을 끝내는 그 분이 인간 뜻대로 해주는 거냐? 출생할 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나왔느냐? 죽을 때 제 마음대로 죽느냐? 네가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을 못하는구나. 그러면서 의례히 말은 잘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 라고 하면서 한 입을 가지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 이치를 모르면 그렇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보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기 쉽게 말을 하자면 ‘번제단을 치워버렸는지, 떡상은 그대로 있는 건지, 일곱 금촛대는 안 팔아먹었는지, 물두멍은 어디에 두었는지, 법궤는 도둑을 안 맞았는지 내버렸는지, 성전 주위에 개구멍은 없는지’ 하는 걸 다 보셨다. 이게 지금 뭘 말하는 거냐?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대로 지은 솔로몬 성전을 헤롯왕이 46년간을 리모델링을 했다.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그 성전은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로 통해 지은 장막성전이 확대된 거다. 장막성전도 하나님의 설계로 된 것이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하나님의 설계로 된 거다. 오늘날 ‘제 1 성전, 제 2 성전’ 하는데 그 예배당이 하나님의 설계냐? 하나님의 설계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설계는 번제단 물두멍이 있고, 그 다음에 성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떡상 왼쪽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다음에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에 법궤가 있다. 이게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는 순서다. 이걸 오늘날 그대로 갖고 와서 보면 우리 신앙의 순서가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의 정신을 영의 눈으로 보면 그 정신이 없다.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세상 소원 욕구적인 기도를 하면 그게 살아남겠느냐? 금대접에 올려진 기도가 뭔 줄 아느냐? 오늘날 보면 그게 다 치워졌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제 자유세상이 된 것처럼 믿는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성경은 왜 보느냐? 종교적인 활동을 하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이름을 날리려고 한다. 이건 자기 비석 세우려는 거고, 자기 기념비 세우려는 거다. 이건 거라사인의 두 사람이 군대귀신이 들린 것과 같다. 귀신이 들리면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을 줄을 모른다. 성품을 입을 줄을 모른다.


계:의 일곱 교회에서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는 눈이 있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라고 했지만 그런데 주님이 보시니 헐벗고 눈멀었다. 그런 자기를 쳐다볼 수 있느냐?


오늘날은 구약시대는 지나갔다? 아니다. 신약시대에 오신 그 주님은 33년 동안 율법이 요구하는 은밀한 뜻까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 이뤄드린 걸음걸이의 삶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형식의 그 사상이 당신의 33년의 삶의 걸음걸이 속에 다 들어있다. 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제사장도 되고 제물도 되고 진행자도 되시는 거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주님이 어떤 정신으로 사셨는지 그걸 보는 거다. 어떤 정신으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지 그걸 보는 거다. 그래서 우리도 그 정신을 가져야 되겠는데 그게 없다.


신앙의 이치가 우리의 신앙은 죽었다가 살아나져야 되는 건데, 살리는 건 주님의 능력이다. 우리 신앙으로 말하자면 신앙이 이룰구원으로 들어가려면 자기의 육적 세상적인 소원 목적은 다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속에서 주님이 사신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가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믿는다면 말은 예수를 믿는데 그 사람의 속 성품 성격 성질은 안 믿는 사람과 어찌 그리 같은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처럼 사람을 외모 외형을 보시느냐, 중심을 보시느냐? 진리 따르는 양심을 보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것이 좁은 길이다. 그런데 타락된 기독자들은 자꾸 교회에서 자고, 산속에서 기도하는 걸 좁은 길로 안다. 그건 아니다. 좁은 길이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도하고 소원하는 걸 보면 전부는 자기 욕구 채워달라는 기도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의사단일이냐? 내가 아무리 봐도 그건 넓은 길이다.


성전에 들어갈 때 처음 동문으로 들어가면 번제단이 있고, 그 번제단 네 귀퉁이에 뿔이 달렸다. 이 네 귀퉁이에 제물의 사지를 묶어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나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에 붙들려서 옛사람 자기는 죽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나가는 그 자기는 말씀에 의해 잡혀 죽어야 한다. 안 그러면 예수 바로 못 믿는다. 옛사람 자기는 죽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죽어지는 만큼 살아난다. 그런데 죽어야 만이 살아나는 걸 모르고 안 죽으려고 한다. 어떻게 교만한지!


성령의 눈으로 보면 안 믿는 자가 교만하고, 예수 믿는 사람 중에 특히 목회자들 속에 ‘나는 사명자다’ 하는 자는 안 믿는 자보다 더 교만하다. 안 믿는 자의 교만은 옳은 것이 들어가서 그 교만이 꺾이면 바로 놓여져서 주님을 기초로 하고 올라갈 가능성 많으나 기독교 안에서 종들의 세계에서 그 배후에 ‘박사니, 장이니’ 하는 게 붙어 있어서 거기서 내려와야 다시 새롭게 옳은 것으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인데 절대로 안 내려오려고 한다. 그게 꺾이는 날이 언제인지 아느냐? 그 날은 개 잡는 날이다. 성경에 보니 그런 사람은 새의 먹이로 살고 있구나. 새의 먹이란 사람을 말하는 거다.


지금 교회에서 번제단을 치워버렸다. 교회의 설교를 아무리 들어봐도 하나님의 척도가 없다. 번제단은 신적인 척도인데, 말씀의 척도인데, 하나님의 기준의 척도인데 설교에 그게 없다. 그러니 사람이 안 잡힌다. 예수를 수십 년을 믿었어도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속이 그대로 들어있다. 이건 안 죽은 증거다. 상황이 환경이 어렵거나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만 자기 속에서 푹푹 튀어나온다. 그게 안 죽은 증거다.


조금만 싫은 소리도 안 들으려고 하고, 깨닫는 것에는 손해를 보고 있으면서도 돈 한 푼도 손해를 안 보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여지고, 그것 때문에 몸이 아픈 적은 있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속 성품을 못 닮는 그것 때문에 병이 나본 적이 있느냐? 자식 때문에 병나고, 돈 때문에 병나고, 집 때문에 병나고.


어떤 환경 처소에서건 어떤 상황을 만나건 이룰구원을 이뤄라. 무슨 말이냐? 깨달아 올라와라. 사람 가운데 살려면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 그리 부딪히고 버릇도 없고 규모도 없고 그러냐? 그러면 그 사람이 뭐가 되겠느냐? 기독교하고도 우리교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끄집어 내릴 것이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사람이 되겠느냐? 그런 사람을 직분을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진리가지고 사람을 다 해칠 것이 아니겠느냐?


난 우리교회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목사님들 공부할 때(주-김경형목사님이 정례적으로 목회자 대상으로 인도하는 성경 및 신학 집회) 아주 두렵다. 내가 괜히 시작했나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망가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님이 빨리 당신의 쓰실 종들을 추려주시고 아닌 것은 당신이 좋으신 대로 아셔서 처치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자꾸 나온다.


개인적으로 자기 신앙이 하나님의 신적인 척도를 없애버리지 말아라. 성경은 하나님의 척도요, 우리에게 주시는 기준이요, 사람이 죽어지는 기준이다. 말씀에 의해서, 이치에 의해서 죽어져야 한다. 그래서 번제단에 척도가 있는 거다. 옛날얘기 듣고 ‘아이고, 예수 잘 믿어야지’ 그런 게 아니고 진리말씀의 이치에 의해서 자기가 ‘아, 이건 아니구나. 이건 없애야 되겠구나’ 하고 깨달아서 고쳐나가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속에 비진리적인 요소가 있으면 하나님의 의사성에 팽팽하게 대적된 상태다. 대적을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신앙의 질이 팽팽하게 대적이 된 상태다. 이건 하나님과 단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상황 어떤 사건이 안 좋게 나오면 그냥 충돌이 된다. 못 속인다. 우리교회에서는 고쳐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화목이 되고 자기가 편하다. 하나님과 의사충돌이 되면 너만 고통이고 너만 형벌이고 너만 진노고 너만 다친다.


자기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의사단일성으로 되는,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어지는 그 면을 치우지 말아라.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속에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장막 또는 성전을 지은 설계가 다 있는 건데, 그런데 그걸 자기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자기 속의 신앙의 질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사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사회 윤리 도덕적인 개념이 자기 속에 자리 잡고 있구나.


그렇게 된 채로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신념적 신앙이 된다. 우리는 신의적 신앙이다. 그 분을 잘 알고 그 분의 것으로 기준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그 척도 그 기준에서 거쳐 넘어지지 않고 그걸 안 놓치려고 하는 신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신의적 신앙인데, 그게 아닌 인본주의 인간 조작배기 기준으로 들어간 신앙은 신념은 크지만 인간주관이 팽팽하게 서 있다. 이건 굉장히 교만한 거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다.


진리이치를 들으면서 자기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자기를 보지 못하면 신념적 신앙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다. 그 자기를 잘 살펴라. 특히 일반적 성격 성질도 고쳐라. 안 고치면 은혜 못 받는다. 그것 때문에 쫓겨날 수도 있다.


주님은 내 속에 번제단을 치워버렸는지를 보신다. 성전의 설계 그게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구원은 영원 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거다. 그 설계도는 주님 속에 다 들어있다. 주님이 안 주셨다면 뭐 하러 둘러보시겠느냐? 바로 돼 있는지, 바로 놓여졌는지, 안 치웠는지 떡상은 그대로 있는지? 자기가 부서지고 깨지고 삶아지고 기름에 튀겨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신앙인지,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사람인지를 주님은 둘러보신다. 주님께서 성전을 둘러보신 그 뜻이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그게 없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둘러보면 안 깨진 게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제일 골치 아픈 게 잠:에도 있듯이 절구에 넣어서 찧을지라도 미련은 안 볏겨진다.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안 벗겨진다. 정말 미련하다. 팥은 해를 넘겼거나 하면 아무리 오래 삶아도 잘 안 삶아진다. 그런 것처럼 성도로서 주님 입에 맞는 맛있는 신앙이라야 하는데 도무지 맛이 없고 톡톡 튕기는 신앙이 있다.


떡상도 하나님의 설계인데 그것도 없다. 떡이 안 만들어지면 치워버리는 수밖에 없다. 일곱 금촛대도 그 자리에 없다. 금촛대에 기름을 넣어서 밝아져야 하는 건데, 성도의 신앙이 점점 성령의 기름으로 진리이치로 들어가면서 자기 속에서 밝아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언행심사가 밝게 나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우리 자신을 볼 수가 있다. 이게 보이느냐? 그런데 이걸 역사로만 보면 못 깨닫는다. 그걸 보게 하는 건 모양이 아니라 신앙의 질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3234 요한계시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1∼7  박상훈 목사  2016-05-03 815
13233 요한계시 내가 볼 때에 계1:17∼20  박상훈 목사  2016-05-03 274
13232 요한계시 인자 같은 이가(부활주일) 계1:9∼16  박상훈 목사  2016-05-03 333
13231 요한계시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계1:7∼8  박상훈 목사  2016-05-03 463
13230 요한계시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계1:4∼6  박상훈 목사  2016-05-03 264
13229 마태복음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16:13-20  박상훈 목사  2016-05-03 556
13228 야고보서 참된 경건 약1:26-27  박상훈 목사  2016-05-03 420
13227 마가복음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막11:11  김경형 목사  2016-05-01 256
» 마가복음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막11:11  김경형 목사  2016-05-01 412
13225 에배소서 자녀 신앙교육 엡6:1-4  강종수 목사  2016-05-01 508
13224 사도행전 성령님의 이끄심 행16:9-15  강승호 목사  2016-04-29 643
13223 마가복음 예수가 죽을 때 하나님도 따라 죽었다 막15:6-15  허태수 목사  2016-04-27 389
13222 빌립보서 하나님도 고난을 받는다 빌2:6-7  허태수 목사  2016-04-27 338
13221 고린도후 아인슈타인 같은 어른이 되라. 고후3:3  허태수 목사  2016-04-27 385
13220 마태복음 목사가 왜 이래 마25:31-40  허태수 목사  2016-04-27 478
13219 고린도전 삶에도 on off가 필요합니다. 고전15:31  허태수 목사  2016-04-27 508
13218 마가복음 회개 하세요, 꼭! 막1:14-15  허태수 목사  2016-04-27 577
13217 마가복음 내 생에 죽음도 아깝지 않은 미션은 무엇인가? 막8:27-38  허태수 목사  2016-04-27 390
13216 마가복음 현관(玄關)의 번데기 막1:12-13  허태수 목사  2016-04-27 447
13215 요한복음 미래를 여는 권세 요5:1-9  강승호 목사  2016-04-27 463
13214 시편 주는 나의 은신처2 시32:6-7  김남준 목사  2016-04-26 429
13213 시편 주는 나의 은신처1 시32:6-7  김남준 목사  2016-04-26 464
13212 디모데전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 딤전1:5  김남준 목사  2016-04-26 523
13211 사도행전 울며 입을 맞추며 행20:35-38  김남준 목사  2016-04-26 365
13210 시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1] 시42:5  김남준 목사  2016-04-26 1162
13209 다니엘 깨달으려는 자의 위로 단10:12  김남준 목사  2016-04-26 344
13208 시편 어머니 품에 있음 같이 시131:1-2  김남준 목사  2016-04-26 492
13207 마태복음 칭찬받을 종처럼 살자 마25:14-23  김남준 목사  2016-04-26 617
13206 시편 안되는 것이 잘되는 것이다 시54:1-7  최장환 목사  2016-04-26 556
13205 야고보서 보이지 않는 손길 약3:1-18  최장환 목사  2016-04-26 471
13204 마가복음 죽음은 천사들의 삶이다 막12:25  김부겸 목사  2016-04-25 259
13203 마가복음 무(無)의 영성 막12:25  김부겸 목사  2016-04-25 226
13202 시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시53:1-2  김부겸 목사  2016-04-25 336
13201 로마서 악을 선으로 갚으라 롬12:17  김부겸 목사  2016-04-25 1432
13200 출애굽기 해체(解體)의 영성 출20:4  김부겸 목사  2016-04-25 23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