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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친 복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604 추천 수 0 2016.05.13 23: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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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3:6-1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예슈아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친 복"
2011년 6월 4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3:6-14 (갈라디아서 강해 10)

   오늘부터 한 달 반 정도 쉬었던 갈라디아서 강해를 다시 시작한다. 오늘이 갈라디아서 강해 열 번째 시간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중심 되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첫째는 유대 선동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의롭게 됨이다. 예슈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가 참된 복음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다.

  두 번째 주제는 이러한 참된 복음이 가져다주는 참다운 자유에 대한 것이다. 율법은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로 인해 주어지는 성령을 통해 참다운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자유로 보는 것이다. 이신칭의의 복음과 그로 인한 자유, 이 두 가지가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다.

  오늘 본문도 그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할례와 율법준수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실제로 창세기의 순서를 봐도 할례는 17장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15장이다. 믿음이 먼저고 할례는 그 다음이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을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에서는 할례와 율법준수를 의롭게 되는 근거로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례는 몸에 남기는 상처이다. 이제는 내가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믿음 없는 할례는 아무리 받아도 그 할례 자체로 언약 백성이 되지 않는다.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한 번도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주신 적이 없다. 율법이 주어진 때는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였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먼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이 먼저였다. 그 후에 율법을 주셨다. 이는 율법의 목적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으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점차 유대인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울타리가 되었고, 결국에는 배타적 선민주의가 된 것이다. 할례와 율법이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구별하는 특징이 되었고, 이것이 언약백성이 되는 조건이 되고 만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할례 받는 것만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했고, 율법준수가 경건의 표준이 되고 의로움의 근거로 여겨지게 되었다.

  율법준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율법을 어긴 사람이었다. 창세기 18:8을 보면 그러하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엉긴 젖은 버터나 치즈를 말한다. 유대교의 코셔, 즉 음식법에는 어떠한가? 젖과 고기, 유제품과 육류를 같이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출애굽기 23:19에 따른 것이다. 물론 그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유제품과 육류를 같이 먹지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는가? 버젓이 버터와 우유와 송아지 고기를 함께 차려놓고 손님들을 접대했다. 그것도 어떤 손님이었는가? 하나님과 그의 천사장들이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하나님과 두 명의 천사장을 대접했는데, 유제품과 육류를 같이 놓았다. 유대교의 코셔, 음식법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율법을 범한 것이 된다. 물론 이 때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물론 천사들과 하나님조차도 율법을 어긴 것이 되고 만다.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버리게 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인도적인 차원과 당시 주변 민족의 우상숭배행위와 연관이 있기에 그리 했다는 주장이 있다. 어미와 새끼를 한꺼번에 먹는 잔인함을 금하는 명령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이방 종교에서 우상숭배를 할 때 이렇게 하기에 이방종교와의 단절을 위해 그리했다는 주장이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이 코셔, 음식법이 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보고 있다. 이때 유대인이라는 말이 생기고 유대교가 형성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음식법을 세부화 시키는 과정에서 유제품과 육류를 함께 먹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 조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유대교인들은 유제품과 육류를 같이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있는 맥도널드 메뉴에는 치즈버거가 없고, 코셔를 지키는 피자집 메뉴에는 고기를 얹힌 피자가 없다.

  만일 이것을 어기고 음식을 파는 자나 그러한 음식을 먹는 자는 율법을 범한 부정한 자가 되고 죄인이 되고 만다. 율법이라는 것이 이렇다. 10절에 쓰여진 것처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될 때가 생기는 문제이다.

  성경에 있는 율법조항은 모두 613개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가 형성이 되면서 랍비들과 성경학자들이 세부적인 규정을 추가시켜 실제적인 조항은 훨씬 더 많다. 이러한 율법조항에 갇혀 그 숫자를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조항들을 이리저리 따져 지키는 자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부정하고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10절에 있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그 안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저주가 되고 만다. 10절이 그 내용이다. 율법을 지켜도 저주이고 지키지 않아도 저주이다. 율법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주다.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다. 반대로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믿음이 없이 지킨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기에 저주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할례와 율법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고, 의로움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할례를 받아야 언약백성이 되고,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대인에게는 할례와 율법이 중요한 문제겠지만 유대인조차도 할례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원의 근거는 그러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자 조건이다. 구약시대에도 구원의 근거는 은혜였다. 언제나 구원의 근거는 은혜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의로움의 근거는 율법이든 무엇이든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은혜이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의의 개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는데,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의는 관계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법적인 개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겼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법적 선언을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이고 법적인 개념이 바로 의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할 수 있다. 의가 관계 개념이고 법적 개념이라고 했는데,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신 것처럼 예슈아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진리시며 인간에게 참다운 생명, 구원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시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다.

  또한 예슈아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그러기에 예슈아를 통해 우리가 죄용서 받게 되고,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슈아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과 우리가 예슈아를 믿어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슈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고, 복을 주셨다. 이로서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백성, 선택된 백성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후손들에게 복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후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것, 이것은 아브라함 때만이 아니라 계속되는 영적인 원리이다. 노아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의 후손들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다윗 한 사람의 믿음으로 다윗의 왕가에 복이 임했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이와 비슷한 분을 만났다. 황성주 목사이다. 의사이고 기업가이고 목회자로 다방면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분이다. 대학시절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이 죽었음을 확인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자신의 인생의 꿈으로 삼아 킹덤 드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데 전 생애를 건 황성주 목사 한 사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복, 비전의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의 매형도 이분을 통해 세례를 받고 임종 전날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받고 평안하게 천국에 갈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한 사람의 믿음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은 나와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 복을 주시고 영적 영향력, 선한 영향력을 주신다.

  당신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모든 가족이 복을 받는 믿음의 가문, 축복의 가문, 언약의 가문을 세우라. 당신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직장이 복을 받고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는 영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과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복이다. 그러나 이 복은 그의 혈통적인 후손에게만 미치는 복이 아니다.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는 복이다. 8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는 창세기 12:2-3을 인용한 것인데, 직접 읽으면 이렇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3절 하반 절에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모든 족속,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에서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은 언약 밖에 있는 죄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함께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예슈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슈아,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인데, 우리 주님 예슈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구원받아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그들의 배타적인 선민주의로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배척하였고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멸시하면서 둘이 원수가 되어 둘 사이에 높은 담이 쳐졌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둘 사이의 담을 허시는 것이고, 이 둘이 예슈아 안에서 화목하고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예슈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이방인들은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지 못한 채로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로 살다가 죽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을 보면 참 많은 복을 받았다. 로마서 9:4-5에 보면 유대인들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받았던 복들이다. 양자됨이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복이다. 영광이다. 영광의 하나님을 섬기는 복,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영광이다. 언약들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다.

  율법이다. 율법은 언약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지침들로 율법을 차별과 의로움의 근거로 삼을 때가 문제지 율법 자체는 복이다. 예배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약속들이다. 얼마나 많은 약속을 받았는가! 조상들이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다 그들의 조상들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름도 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들 이름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고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다는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유대인이셨다!

  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보면 참 부러운 것이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우고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을 만난다. 그런 그들이 예슈아를 만난 이후에 하는 고백이 있다.

  “예슈아, 후 예후디!”, “Jesus is Jew!”라는 고백이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일까! 우리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 우리에게는 성경도 없었고, 율법도 언약도 몰랐고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이름이 낮선 그저 교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일뿐이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은 한국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분이 째질까!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이러한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러한 것들이 복인지 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저 건강, 돈, 자녀, 출세, 명예 등을 복으로 여긴 것이다.

  정말 부럽고 시기 날 만큼 엄청난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복이 그들 안에서 머물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복을 모든 족속들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 복을 그들 안에 머무르게 했다. 이것이 화다. 이것이 결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고 서로 적대시 하는 배타적 선민주의가 되고 만 것이다.

  복은 나만의 것이 될 때 더 이상 복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줄 때 복은 진정한 복이 된다. 이스라엘의 자연에서도 그 가르침을 볼 수 있다. 바로 요단강이다. 요단강은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해서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로 들어간다. 요단강의 발원지를 가면 수정같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 물이 갈릴리 호수로 들어간다. 생명력이 넘친다. 그런데 이 물이 사해로 들어갔을 때는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말 그대로 죽은 바다가 되고 만다.

  왠가? 더 이상 흘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붙잡고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사해 형성에 대한 다른 이유도 있고, 오늘날 사해가 이스라엘 경제와 관광에 중요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처럼 자연 그 자체가 바이블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고만 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요단강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흘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복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를 텔아비브 대학교 내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성경에 관한 코너가 있는데, 그 가운데 보면 유대인의 성경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인류의 정신문화의 유산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성경을 수많은 언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 이방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과거 유대인들은 성경을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다. 성경이 히브리어로 쓰였기에 일상생활에서 히브리어의 사용을 피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히브리어가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된 이유였다.

  성경이 유대인들의 유산인 것은 맞지만 실제로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이 번역되어 전달된 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그리스도인들이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거룩해도 자신만의 것이 될 때 그것은 복이 아니다. 중세교회도 마찬가지 오류를 저질렀었다.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했었다. 그 결과 일반 백성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성경을 사제들의 권위에 악용하고 결국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교회가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든 율법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흘려보내야 한다. 흘려보낼 때 복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복의 통로가 되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그만의 복, 그의 후손들만의 복이 아니다.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라고 주신 복이다. 즉 복의 통로가 되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것을 자신들만의 복으로 만들었다. 할례와 율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복이 아니다. 복이 차별이 되고 선민적 배타주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복이 누구를 통해 결국 이방인들에게 흘러가게 되었는가? 예슈아, 우리 주님을 통해서다. 예슈아를 통해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이방인들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이다. 이방인들 역시 언약의 후손이 된 것이다.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된 것이다.

  예슈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 이방인에게 미친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우리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예슈아 우리 주님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예슈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미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그리고 이 은혜가 유대인들에게 다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한동안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배타적 선민주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차별하고 경멸하고 박해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여 한 새사람을 지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악이었다. 비록 유대인들이 예슈아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을 버리실 수 없다.

  서구 신학의 가장 큰 오류 중에 하나가 대체신학이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로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신학사상이다. 이것은 매우 큰 오류였고 이 신학사상으로 인해 안티 세미티즘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인 것은 맞지만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가 이스라엘에 접붙인 바 되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새 이스라엘이 되어 언약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대체신학을 내세워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예슈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르게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그들의 유대인으로서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예슈아를 믿을 때 참다운 유대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슈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예슈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서로 증오하고 차별하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예슈아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된다.

  지난달 텔아비브 지역의 메시아닉 유대인 교회를 방문했다. 아도나이 로이라고 하는 교회이다. 그 교회의 기도실이 있는데 텔아비브 시내와 유대산지가 보이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다. 그 곳에서 한 두 달에 한 번씩 메시아닉 유대인 리더들의 기도 모임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한 명이 아랍 크리스천 목사다.

  매년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아랍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이는 컨퍼런스도 열린다. 이달 12일에는 나사렛에서 국제 기도의 날 집회가 열리는데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아랍 크리스천들과 외국에서 온 크리스천들이 함께 참여를 한다. 우리 교인들도 함께 갔으면 싶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이 현실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슈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용납하고 화목하여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다. 예슈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결 같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함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슈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그리고 그 은혜가 다시 유대인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자.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면서 서울 중량구에 있는 영세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담임목사님이 이스라엘 선교에 눈을 뜨시면서 몇 달 전에 내게 메일을 보내셨다. 이스라엘 선교의 파트너십을 맺길 원하셨고, 7월에 이스라엘에 비전 트립으로 오게 되었다.

  그 교회 입구에 가니 벽에 태극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같이 걸려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금은 예루살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내용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교회의 비전으로 삼고 선교방향으로 삼고 있는 교회이다.

  이것이 우리 이방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예슈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복이 다시금 유대인들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스라엘의 회복의 통로가 되고 센터가 되기를 기도하고 간절히 소망한다. 영세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교회에게 우리 교회가 그 역할을 해주고 싶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 교회는 성지 이스라엘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이다. 비록 교회의 구성원들이 계속 바뀔 수밖에 없지만 우리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할 것이다.

  이 뜻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슈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복이 다시금 유대인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복의 통로가 되고 센터가 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예슈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기도 제목

. 우리 주님 예슈아를 통해 우리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게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 이제 이 복이 다시금 유대인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우리를 복의 통로, 복음의 도구로 삼아주소서.

. 주님께서 성지에 친히 세우신 우리 텔아비브 욥바교회가 이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교우들에게 한 마음, 한 비전, 한 열정을 허락하여 주소서.

.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밝혀주시고, 예슈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며 화목하게 하시어 예슈아 안에서 유대인과 아랍인과 모든
이방인들이 한 새 사람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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