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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뜻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927 추천 수 0 2016.05.13 23:57:30
.........
성경본문 : 갈3:26-4:7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뜻"
2011년 6월 18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갈라디아서 3:26-4:7 (갈라디아서 강해 12)

   사해 쿰란에 가면 에세네파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에세네파는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유대교의 네 종파 중 하나였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그리고 에세네파다. 현실 세계를 떠나 유대광야나 사해 등지에서 공동체를 이루면서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하면서 종말론적 경건운동을 했던 공동체다.

  그 에세네파가 남긴 것이 바로 쿰란 사본, 사해 사본이다. 에세네파의 문헌 중에 ‘마지막 시대의 규례’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그(메시아)는 자신을 위해 아담의 성전을 지을 것을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을 위해 아담의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말인데, 아담은 사람을 뜻한다. 즉 사람의 성전을 지으신다는 것인데, 이는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아담의 성전이란 사람들 안에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이며, 더불어 사람들로 이루어진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메시아와 관련된 내용이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에세네파 문헌에 나오는데,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였다.

  요한복음 2:19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말씀하신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는 메시아께서 오셨기에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의 시대가 아닌 메시아 자신이 성전이 되시는 시대가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바울 서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 아담이시다. 새 아담이신 예슈아께서 친히 성전이신 것이다. 아담의 성전이시다. 왜?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곧 성전임을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 성전임을 말하고 있다. 새 아담이시고 성전이신 예슈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아담의 성전이다. 더불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성전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현장이 바로 초대교회였다. 초대교회는 자체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을 통해 보면 날마다 회개하고 예슈아를 믿는 사람들은 수천 명이었다. 박해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초대교회의 교인수는 수만 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건물이 없었다. 각 가정을 중심으로 예배드리고, 그러다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어느 큰 공간에서 모이는 형태로, 일종의 가정 교회였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었으나 그 공동체 자체가 성전이었다.

  유대교에 있어 성전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미드라쉬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 전에 일곱 가지를 만드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전이다. 그만큼 성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통곡의 벽에 가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곡의 벽의 정식이름은 서쪽 벽이다. 성전의 서쪽 벽으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전의 유적이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전의 유일한 유적이기에 그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들어가면 계속해서 큰 돌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지성소라고 말하는 장소가 있다. 좁은 통로인데, 뒤쪽에 촛불과 성경 등이 진열되어 있고, 유대인들 몇이 항상 기도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조금 돌들이 벗겨져 있고 가운데에 좁은 금이 가 있다. 그 모양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지도처럼 보인다.

유대교에서는 그곳이 지성소 바로 뒤편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셨던 그 장소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셨던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였다는 주장이다. 그만큼 성전을 신성시하고 있다.

  지금도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한다. 모든 성전 집기들을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성전 집기 중 하나가 통곡의 벽에서 Jewish Quarter 쪽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진열해놓은 메노라, 칠지 촛대이다.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의 방법과 크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성전 제사 방법도 연습하고 있고, 이제 남은 것은 황금돔을 무너뜨리고 성전만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성전을 중요시 하고 있는데, 그런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예슈아의 말씀은 충격적이었고, 이를 신성모독으로 고소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 역시 충격적이고 유대교를 위협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세네파 등 유대교 문헌에서 나오는 것처럼 메시아가 오시면 아담의 성전을 지으실 것이고, 새 아담이신 예슈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곧 성전이고,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예배 장소가 필요한 것이지 건물이 성전이 아니다. 예슈아께서 우리의 성전이 되시고, 그분을 믿는 우리가 성전이고, 그분을 믿는 신앙공동체가 곧 성전이다.

  이 새로운 성전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건물로서의 성전에는 차별이 존재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몇 개의 구분이 있었다. 성전 본 건물 밖의 뜰, 즉 성전 마당인데, 이곳을 보통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을 뜻한다. 그 안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성전 본 건물이 있는 곳은 들어갈 수 없었다. 이방인이 들어갈 경우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의 돌판이 발견되었다.

  성전 본 건물을 보면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제한되어 있다. 이른바 여인들의 뜰이다. 유대인 여자는 여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남자들의 뜰이 있다. 할례 받은 성인 유대인 남자는 여기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 다음이 제사장의 뜰이다. 번제단이 있는 곳이다. 유대인 남자들이 그 경계에 서서 번제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안에는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있지만 건물로서의 성전은 구별이 존재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구별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차별이 되었다. 인종적인 차별, 성적인 차별, 신분적인 차별이다.

  그러나 예슈아 안에서 이루어진 성전은 이러한 구별이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28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보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인종적인 차별이 없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하나다. 신분적인 차이가 없다.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다. 성적인 차이가 없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자유한 유대인 남자들이 매일 아침에 기도하는 내용이 있다. 세 가지 내용이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주의 왕이신 아도나이 우리 하나님. 이는 당신께서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주의 왕이신 아도나이 우리 하나님. 이는 당신께서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주의 왕이신 아도나이 우리 하나님. 이는 당신께서 나를 노예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초정통파 유대교의 기도서로, free Jewish men, 자유한 유대인 남자는 매일 아침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한단다. 마치 성전에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성적인 차별을 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어떠했는지는 여러 번 말씀드렸다. 그리고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당시 로마 사회에서의 신분간이 차별이 어떠했는지도 알 것이다. 노예들은 어떠한 차별을 받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지금 21세기에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의 신분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유대교에서는 토라를 가르치는 것은 남자들, 특별히 전문적인 랍비교육을 받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들은 회당 예배에는 참석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앉는 자리는 파티션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미쉬나에 보면  “여자에게 율법의 말씀들을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다.”(Mishnah Sotah 3.4)는 말이 나온다.

  이런 랍비 문헌들을 보면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신분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비천하게 여겨졌는지를 알 수 있다. 종교적인 권리와 의무가 제약 받았고, 성전 안에도 여인의 뜰에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들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고,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있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어떠한 차별 없이 하나라는 선언은 충격적인 것으로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그러니 유대교나 로마나 기독교를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차별은 사라지고 하나이다. 인간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별은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해서 자유를 빼앗아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것을 영어 단어 receive와 take로 설명을 한다. receive는 자유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take는 그 반대로,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해서 자유를 빼앗아가는 단어라는 것이다. 여기다 더 붙이면 차별을 만들어내는 단어이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자유했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 이 자유를 잃어버렸는가? 사탄의 꾐에 빠져서, 그리고 자기 안에 생긴 탐욕에 이끌려 선악과를 take, 취했을 때였다. 가인이 언제 자유를 잃었는가? 동생 아벨을 시기했을 때, 그리고 그의 생명을 take, 취했을 때였다.

  인간이 자유를 잃어버릴 때는 늘 take할 때였다. 내 것이라고 욕심을 낼 때였다. 끊임없이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할 때였다. 그러나 take에는 자유가 없다. 더 가질수록 구속이 커지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take하면 자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요구했고, 재산을 취했다. 그래서 그가 자유해졌는가? 처음에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구속이었고 처참한 비극이었다.

  그런 그가 자유를 되찾은 것은 언제인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receive, 받아들였을 때였다. 그때 그는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자유에 이르는 길은 take가 아니라 receive다. 그래서 성경은 자유에 이르는 receive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을 받아들일 때 자유할 수 있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자유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자유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자유가 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자유로우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한없이 자유하시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자유를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은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왤까? 아직도 take, 꽉 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유할 수 있는데, 여전히 꽉 잡고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은데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내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아직도 take,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려놓으라.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라. 그것이 나의 욕심이든, 은밀한 죄든, 깊은 상처와 쓴뿌리든 다 내려놓으라.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라. 그럴 때 주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오실 것이고, 그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이라. 그 사랑이, 그 은혜가 나를 자유케 할 것이다.

  take는 자유를 구속하고 뺏어 간다. 그래서 차별을 만들어낸다. 인종적인 차별, 신분적이 차별, 성적인 차별을 만들어낸다. 이 외에도 온갖 차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receive,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유함이 있다. 자유함은 차별을 거부한다. 차별을 몰아낸다. 차별은 그 자체로 구속이다.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자유를 주고 그 자유는 동등함의 자유이다. 28절의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동등함의 자유이다.

  차별은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나와 똑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나와 똑같은 부분보다 다른 부분이 더 많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이것을 차별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차이들을 자만심으로, 교만으로, 무시함으로 바꾼다. 또한 그 반대로 이러한 차이들을 열등감, 피해의식, 시기, 수치감, 탐욕으로 왜곡시켜버린다. 그래서 더 큰 차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차별을 몰아낸다. 차별에 묶여있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래서 은혜는 자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되는 자유를 주신다.

  은혜 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유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서 자유해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차별 없이 대하고 차별 없이 사랑하며 섬기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엄청난 가치를 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차별에 묶여 있었다. 교만, 자만심, 열등감, 비교의식, 피해의식, 시기 질투,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유가 속박되어 있었고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자유케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이다. 믿는가?

  이제 나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26절의 말씀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4:6을 보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그 아들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내가 소중한 존재이며 자유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불렀다. ‘아비누’, 다만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한 일이고 유대교에서 파문당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미쉬나에 보면 Circle-Maker Honi라고 알려진 주전 1세기 랍비의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사람들이 랍비 Honi에게 비가 오게끔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서 유월절 오븐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기도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땅에 써클을 그리고는 그 안에 서서 하나님께 말했다.

‘우주의 주재시여, 당신의 자녀들이 나를 당신의 집안의 한 아들로 여기기 때문에 내게 몰려왔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까지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을 당신의 위대하신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러자 비 몇 방울이 떨어졌다.

  랍비 Honi는 이어 말하기를, ‘저는 이런 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랑들과 동굴과 물탱크들을 채울 수 있는 비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폭우가 쏟아졌다.

  랍비 Honi는 말하기를, ‘저는 이런 비를 구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알맞고 좋은 비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비는 정상적으로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Shim'on ben-Sh'tach가 랍비 Honi에게 편지를 보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출교하라는 포고를 내렸을 것이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은 하나님께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꼼짝 못하도록 해서 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셨소.”

  이런 내용의 글이 미쉬나에 실려 있는데, Shim'on ben-Sh'tach의 말을 잘 들어보면 랍비 Honi의 행동은 출교해버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Honi가 한 것이 무엇인가? 마치 아들처럼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한 것이다. 그것이 출교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여기서 아빠는 아람어 단어인 ‘아바’(אבא)이다.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부르는 애칭으로 영어로 Dad, Daddy의 뜻이다. 우리말로는 아빠다. 앞서 말한 미쉬나의 내용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당연 출교이고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은혜의 차이다. 나를 택하시고 나를 자유케 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차이이다.

  이 깨달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예슈아가 필요한 것이다. 그들 역시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분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존재이고, 특별한 존재이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아빠 아버지가 부르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시고 나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길 원하신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자유함이 주어진다. 사랑 안에 있을 때 자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더불어 너의 가치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가치이다. 그 가치로 나를 보고 너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차별을 거부한다. 이 가치를 아는 자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고 빼앗을 수 있겠는가?

  이 가치를 아는 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것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섬기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성령의 매는 줄로 더욱 굳건히 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될 때 자유함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교우들이 하나될 때 자유함이 있다. 그 자유함 속에 어느 누가 와도 동등함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유대인이 와도 아랍인이 와도 흑인이 와도 백인이 와도 그 자유함 가운데 동등함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와도 부한 사람이 와도, 사장이 와도 부하 직원이 와도, 박사가 와도 무학자가 와도 그 자유함 가운데 동등함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남자가 와도 여자가 와도, 노인이 와도 청년이 와도 그 자유함 가운데 동등함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동등함의 자유가 있는 곳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 세워질 아담의 성전, 곧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통해 이루길 원하시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 참 이스라엘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나 그 어떤 인종적인 차별 없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자유가 있고, 종이나 자유인이나 어떠한 신분적인 차별이 없이 다만 예슈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자유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그 어떠한 성적인 차별이 없이 다만 예슈아 안에서 형제 자매로 하나가 되는 자유가 있는 그런 신앙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며, 더불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슈아 우리 주님의 뜻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예슈아 안에서 동등함의 자유가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느 누가 와도 그 자유함 속에 젖어들어 동등함의 자유를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예슈아 안에 거하라.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 내려놓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라.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받으라.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슈아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하나됨을 통해 주님께서는 큰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동등됨의 자유를 통해 자유하신 성령께서 놀랍고 크신 일을 행하실 것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지난주에 운영위원회에 알렸고 주보에도 실린 것처럼 8월말로 교회를 사임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미 몇 해 전부터 비자 문제가 있었고 올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자를 받기는 했지만 8월말까지고, 이번이 마지막이며 8월말에는 온 가족이 이스라엘을 떠난다는 각서까지 썼다. 2년 전 가을 어떤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구나 생각을 했고, 작년 여름부터 이 문제를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내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억지로라도 한국에서 받으려면 받을 수 있고, 3개월씩 비자 여행을 다녀오는 방법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보장된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까지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교회에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얼마 더 있는다 하여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부임 후 일 년쯤 되었을 때 그런 마음을 주셨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곳이 이스라엘이기에 내게 주어진 사명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라고. 그리고 4년이 지났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교회도 어느 정도 기초에 세워진 것 같다. 리더십, 선교회, 다락방 등의 조직도 그러하고, 교회의 비전과 사역도 이제는 기초가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떠나도 교회가 없어지거나 흔들려 큰 어려움 없이 계속해서 비전과 사역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건강한 교회는 담임목사가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올 초 교회 표어를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라고 정했다. 기도 중에 주신 비전이었다. 왤까?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이 때문이다. 담임목사가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4년 동안의 담임목회를 하면서 우리 교회는 정말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고 주님께서 지금까지 친히 이끄신 교회임을 확신한다. 나는 원래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 내 능력으로는 이렇게 목회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알기에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신 분이 주님이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중요한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고비 때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해결해주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지난 4년이 온통 감사하고 온통 은혜다. 이미 떠난 교우들을 내가 모두 사랑하고 있는 것을 봐도 온통 감사이고 은혜다. 나의 첫 담임목회를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것밖에 없다.

  나는 떠나지만 나의 고백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다. 한 주님, 한 성령, 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동등함의 자유, 하나되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나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도 이 자유를 누리고 싶다. 진정한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

  이것이 내가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다. 단순히 비자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대다수가 바뀔 수밖에 없다. 이민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세는 늘 불안정하다.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소수의 교인들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한국에서 우리 교회를 기도와 재정과 맨파워로 서포트해줄 단체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처럼 선교헌금 지원이 아니라 우리 교회와 직접적인 선교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중보기도로 서포트하고, 재정적인 면에서도 서포트하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거쳐간 이들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품고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모아주고, 나아가 이스라엘 선교에 뜻이 있는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켜 파송해서 우리 교회와 협력해서 사역할 수 있도록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바로 선교회다.

  이 마음을 담임한 그 해 여름에 주셨다. 처음에 함께 했던 청년들이 떠나면서 뻥 뚤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마음이다. 그리고 작년 초에 공동의회에서 선교회를 세우는 것을 결의를 했다. 이제 구체적인 진행을 하려고 한다.

  선교회를 통해 나는 우리 욥바교회와 계속해서 사역하고 싶다. 주님께서 허락해주시면 한국과 세계 곳곳에 가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고, 선교회를 통해 욥바교회와 파트너가 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사역하고 싶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계속해서 힘써 이루고 싶다.

  나의 떠남이 교회의 어려움이 아니라 교회의 플러스가 되고 복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떠나서 우리 교회를 도우며 함께 사역하고, 나보다 훨씬 좋은 후임 목사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사역하면서 우리 교회의 사역이 훨씬 더 넓어지기를 소망한다.

  많은 기도가 필요한 때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때가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할 때임을 알 것이다. 우리의 가슴 속에 교회를 향한 열정이 불 일듯이 일어나길 바란다.

  우리 교회는 성지 이스라엘에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는 동등함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세우신 교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세워나가기 위해 세우신 교회이다. 또한 장년들과 청년들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어 그 안에서 치유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그 꿈을 이루어가라고 세우신 교회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가 더욱 더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더욱 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기도제목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나를 택하시고 내게 자유주시기 위해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직도 꽉 쥐고 있는 것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래서 진정한 참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자유한 가운데 아빠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하소서.

2.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는 자유, 동등함의 자유를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 그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는 동등함의 자유만 있게 하소서.

3. 담임목사의 사임과 후임 담임목사의 청빙이 은혜 가운데 잘 이루어지게 하시고, 모든 교우들 마음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해주시고, 더욱 더 예슈아 안에서 하나되기에 힘쓰며 주신 비전과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담임목사의 이취임을 통해 우리 교회의 비전과 사역이 더욱 더 확장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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