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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2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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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22강) 의인과 죄인
본문 : 눅5:27-32
2012.8.5 주일설교
<본문>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설교>
◉ 신자의 정체성 문제 ◉
신자의 정체성은 선한 행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직접 가는 것으로 신자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면 분명 오신 이유가 있으며, 오셔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셨다면 부르신 이유와 제자로 부르셔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에 담긴 변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를 보면 이런 문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본질이나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보다는 교회의 부흥에 모든 목적을 두고 있고,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또한 자기를 위해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분으로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한 문제도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과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못남으로 인해서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문제에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레위를 부르심 ◉
본문은 예수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를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레위, 즉 마태는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태복음이라는 성경까지 기록하였으니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부름을 받을 때 하던 일은 세리였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세무서 직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세리들이 자신의 위치와 권한을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를 쌓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실 레위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설사 레위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동경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에는 레위가 기존에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자기의 모든 것에 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귀하고 가치 있음을 알았을 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레위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두게 되면 결국 성경적 이론을 바탕으로는 하겠지만 우리의 논리에 따른 이론적인 답을 도출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레위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자’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말을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보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본문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모든 것을 버리고 ◉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표현은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도 제자를 부르신 일을 말하고 있지만 마태나 마가는 ‘모든 것’이란 말을 하지 않고 그물을 버려두었다거나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부였던 그들이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었다면 모든 것을 버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로서 버려두어야 하는 것이 꼭 재물과 연관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누가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절)는 구절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해석하여 신자가 자신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의미로 28절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의 핵심은 레위가 자기 인생에서 버려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을 바르게 분간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레위가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렸다면 레위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 보다 더 가치 있고 절대적인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되고 그것을 위해서 현재 손에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한 대로 레위의 현재 위치는 마음만 먹으면 재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비록 유대 사회로부터는 멸시를 받겠지만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로마 정부를 돕는 세리로 산다는 것은 좀 더 편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레위는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가는 길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한 길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절대적인 세계에 대해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세계에 대해 눈이 열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눅 16:13절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존재는 오직 한분입니다. 하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인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주인이라면 하인이 섬기는 주인은 누구와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것이 없는 오직 한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분이시기에 하나님과 비교하고 상대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재물에 대한 생각은 분명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권력이나 내 이름, 명예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바리새인의 절대적 가치 ◉
레위가 자기의 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도 순간의 감정적 반응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가치 기준의 개혁에 의한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회개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치 기준의 전환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린 그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경건의 무리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절대적인 가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과, 경건한 종교 생활 등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 기준에서 바라보는 세리와 또 다른 죄인들은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러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그들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붙들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이며 경건한 종교 생활로 인한 자기 가치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것’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자기 의와 행함 등 모든 것이 부인되고 아무것도 없는 자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과 부르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서 아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더 멀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의인 되는 것이고, 신앙의 가치 또한 의인 되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가 더렵혀질 것을 염려해서 죄인들을 멀리 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멀쩡한 유대인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충분히 비방을 받아야 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자기 인식의 문제 ◉
사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죄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실제 삶은 의인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실제적인 삶의 방향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게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종교적 삶과 업적을 통하여 자기 의를 쌓고 그것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내면에 갖고 있는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생활은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바람직하고 칭찬을 들을 만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죄인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죄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게 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절대적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면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에만 온 마음을 두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의도, 나의 업적도, 그 어떤 종교적 행위들도 우리가 매달릴 것들이 되지 못함을 알고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며 이 신앙이 저와 여러분을 천국에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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