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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54 추천 수 0 2016.06.05 23: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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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22-3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6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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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10:22-30, 부활절 넷째 주일,

2016년 4월17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그리스도 질문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출가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한 곳은 갈릴리 호수 인근 마을들입니다. 이 두 곳 모두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복음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끔 방문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0:22-30절이 묘사하고 있는 사건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몇몇 곳을 다녀보셨겠지요. 솔로몬 행각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라,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소문만 무성하니 당신 입으로 직접 밝히라는 요구입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두 군데입니다. 1) 마 11:2절에 따르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2) 마 16:13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 즉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유대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구약에는 이런 메시아사상이 근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세상의 인간들로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메시아사상이 엉뚱한 건 아닙니다. 오늘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정의가 늘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불의가 승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그렇고,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정의가 아니라 불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다시 불의가 지배합니다. 개인의 실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분은 정의롭게 살았는지, 그렇지 못하게 살았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정의롭게 살았다고 자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전보다 더 정의로워졌다고 말하기도 힘들 겁니다. 지난 10년간 여러분의 마음은 평화 지향적이었나요? 세월이 흐르면서 영혼이 생명으로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더 많아졌을까요?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런 조짐이 보이다가도 다시 나락에 떨어지는 걸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구원이 자기 스스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 나라가 망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혀가서 수십 년 동안 지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제국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자이시고 정의로운 존재이시기에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구원자를 보내신다고 확신했습니다. 제국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힘이 해체될 것입니다. 지금은 불의가 기승을 부리고 불안이 그림자처럼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만 그리스도가 그런 악을 제거하고 참된 정의와 평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왕 중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기를 그들은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도 똑같은 질문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던집니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증거를 대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예수 이후에 세상이 뭔가 달라졌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느냐. 의로운 자들이 여전히 고난을 당하고, 장애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많고, 세월호 참사도 일어나고, 불의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이 역사 앞에서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뭐냐?’ 여러분은 이런 질문 앞에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증거들


예수님의 대답은 25-30절에 나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흥분하게 된 이유는 예수가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조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계속되다가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했던 유대인들을 몰상식하거나 폭력적인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진리논쟁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는 다 돌을 드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예수를 믿으면서도 반복해서 돌을 들었다가 다시 놓고,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곤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했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고 간 것일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즉 구원자인지 아닌지는 자기의 말로 확인되는 게 아닙니다. 25절에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이미 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일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왔을 때도 예수님은 비슷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걸 마 11:4,5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태복음 이야기나 요한복음 이야기 모두 똑같은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최상의 복지가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일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이 거론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만 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건데, 그것만을 증거로 삼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옳은 질문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은, 즉 최선의 복지사회 건설로 보이는 일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혁명가들, 교사들, 정치인들이 추구한 것들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열정적으로 세상을 계몽하고 새롭게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금도 역사에 대한 생각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열심히 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복지사회 건설로 보이는 그런 일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예수에게 초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귀하고 멋진 일들은 증거일 뿐입니다. 핵심은 그 증거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증거는 그걸 뒤따르는 것뿐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증거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사람들이 달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달이지 손가락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증거만으로는 실체를 저절로 아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어떤 사람에게는 실체로 보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의 신비를 아무리 봐도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아는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라로 비유에서(눅 16:19-31)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죽었던 사람이 돌아와서 말해준다 해도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그리고 똑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았는데도 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26,27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이라는 표현이 매우 강렬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깁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요 10:4절 이하에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내 양’이라는 표현은 목자와 양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전적인 신뢰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양’이라는 표현은 매우 불공정하게 보입니다. ‘내 양’에 속하지 않으면 아예 목자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도 결국 자기 책임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칼빈의 이중예정론도 이런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와 구원에서 배제될 자를 이미 예정했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라고 말입니다. ‘내 양’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신비로울 정도로 심층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신앙을 어떤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안 됩니다. 억지로 진리를 깨닫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 역시 은총입니다. 은총이 아니면 신앙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의 관계성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처럼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토대합니다. 예배는 물론이고, 친교와 선교와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긴밀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교회생활이 형식주의로 흘러서 예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마치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총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외모나 인격으로 그걸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내 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소유를 불리거나 권력과 명예를 높이는 것으로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런 것들은 살아가는 방식을 편리하게 해줄 뿐이지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산만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거나 느슨하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영생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도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고 대답하셨습니다. 루터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런 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추상적이기에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말로 설명해도 믿기 힘들 겁니다. 이게 인간 이성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경험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내 양’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양’인 사람들은 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대라고 요구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꿀만한 힘이 있느냐, 하는 도전입니다. 교회는 그런 증거를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고, 고도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여러 가지로 모범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노력들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세상과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감당할 일이지 교회가 발 벗고 나설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증거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예수의 양인지 아닌지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듯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하고 있느냐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양처럼 예수님을 생명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종말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며, 이미 지금 여기서도 비밀한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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