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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18: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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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73562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18:20-3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6년 5월29일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고대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린 것처럼 남왕국인 유대와 북왕국인 이스라엘로 나뉘어 지낸 기간이 깁니다. 통일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재위 때뿐이었습니다. 정통성은 남유대에 있습니다. 정통성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 왕조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왕조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려를 전복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혈통이 흔들림 없이 왕권을 이어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남유대와 달리 북이스라엘은 처음 나라를 세운 여로보암 이후에 여러 번에 걸쳐서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왕권이 취약했다는 뜻이겠지요.
왕상 16:21절 이하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은 두 파로 갈렸습니다. 반은 ‘디브나’ 장군을 따랐고, 반은 ‘오므리’ 장군을 따랐습니다. 일종의 내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므리가 이겨서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겁니다. 당시가 기원전 9세기입니다. 오므리는 북이스라엘의 국력을 크게 키웠습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당시의 북이스라엘을 오므리 왕조로 부를 정도로 북이스라엘은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서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아합 왕입니다. 아합이 건설한 수도 사마리아는 당시 근동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품격 높은 문명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합은 요즘 말로 성공한 왕입니다.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했으니까 그렇게 불릴만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합을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왕상 16: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아합이 행한 악행에 관해서는 그 다음 구절이 이렇게 적시합니다. 이방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이세벨) 삼고,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았으며,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했고, 아세라 상도 만들었다는 겁니다. 아합은 이런 비판을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 나라의 왕은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통합도 이루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는 남유대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까지 가는 것도 어렵고, 남유대가 그걸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며, 왕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기 시작하면 국민통합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한 신전을 사마리아에 세웠기 때문에 이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왕으로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만약 다른 일만 벌어지지 않았으면 아합은 오므리 왕조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남유대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 모두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므리 왕조를 위기에 떨어지게 한 사건은 전쟁도 아니고 경제 위기도 아니고 왕의 도덕성이나 지도력의 상실도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그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 중에서 초자연적 카리스마가 가장 강력한 선지자입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미리 올 사람이 엘리야라고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의 종교 정책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바알숭배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제거했습니다. 추방하거나 죽이거나 했습니다. 당시 왕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그럴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설득해서 아합에게 불리한 여론을 형성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백성, 또는 국민들이 늘 옳은 걸 택하는 게 아닙니다. 대개는 당장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택합니다. 백성들은 아합이 나라를 크게 키웠기 때문에 바알숭배를 별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런 게 지금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만 외로운 가운데서 아합과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대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뭄이 3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고 하더라도 가뭄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가뭄이 바알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자 심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합에게 잡히기만 하면 당장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각각 종교적 능력을 발휘해서 어느 쪽의 하나님이 참된지를 확인해보자는 겁니다. 일종의 종교 배틀을 벌이자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가뭄으로 인해서 아합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여호와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과의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당연히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엘리야는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낙심하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지요? 두 군데에 번제단을 차려놓았습니다. 하나는 바알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한 것입니다.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신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송아지가 번제물로 오른 제단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따라서 결판이 나는 겁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에게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열광적으로 바알을 향해서 울부짖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변에서 춤을 추면서 더 적극적으로 신을 불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보였습니다. 저녁때까지 광란에 가까운 종교 의식을 벌였지만 제단의 장작과 송아지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자기에게 할당된 제단 주변에 도랑을 만들고 제단 장작과 송아지에게 물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물이 도랑까지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바짝 말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백성들이 엎드려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두 번이나 외쳤다고 합니다(왕상 18:39).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요? 이걸 영화로 만들었으면 마지막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왕상 18:40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한 명도 빼지 말고 다 체포하라고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내전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입니다. 도대체 갈멜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바알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확인되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야기의 전개가 만화처럼 보인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이 실제로 당시에 일어난 것일까요?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과 똑같은 사건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해서 불을 실제로 내리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신앙은 우상숭배와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기도만 하면 전쟁에서 늘 이기고, 시험에서도 뛰어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노력을 할 거 없이 기도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마음먹은 대로 행하는 존재가 여호와라고 한다면 그는 차라리 사람들이 기도하기 전에 세상의 모든 악을 제거하는 게 마땅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늘 선이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갈멜 산 이야기는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각각의 다른 경우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해가 갑니다. 각각의 다른 경우라는 것은 다음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3년 이상 가뭄이 계속되었던 때입니다. 나라의 위기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가뭄이 들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드립니다. 아합 왕실의 바알 신앙을 대표하는 선지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서 기우제를 드렸을 겁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보인 종교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높였지만 다음에는 격렬한 몸동작이 따릅니다. 클라이맥스는 자해입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내는 겁니다. 이들의 기우제는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고, 자연현상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언제쯤 비가 내릴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합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겠다고 알렸습니다. 그가 마련한 번제 제단은 먹구름이 만든 번갯불에 다 탔습니다. 그리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가뭄 시대에 벌어졌던 이 두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에 곁들여서 하나로 묶인 것입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여호와가 바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엘리야가 제단 앞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고,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를 태우는 것을 본 백성들이 외친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 즉 야곱의 하나님’(왕상 18:36)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합이 백성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 모았을 때 엘리야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백성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긴박한 순간에 엘리야 선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토로한 말을 저들이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아합 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곤란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기울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바알이냐 여호와냐, 하는 게 아니라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에 아합은 딱 맞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 외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게 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오늘의 정치인들도 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일단 말은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 백성들과 선지자들의 생각이 갈립니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면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 두 생각이 충돌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아 떨어지면 좋긴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돈독하면서 동시에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최선입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것을 원할 것입니다. 저도 우리교회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면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당연하거나 쉬운 게 아닙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신가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16:13).
엘리야는 무슨 이유와 근거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아합의 입장에서는 국정을 끌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다.’는 사실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엘리야의 주장은 정말 옳은 것일까요? 독불장군 선지자의 독단이거나 공허한 관념은 아닐까요? 엘리아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림의 고통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성장과 물질 만능의 이데올로기라 할 바알숭배가 겉으로 매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자기 백성들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기까지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1세기는 가장 전형적인 바알숭배 시대이기 때문에 엘리야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삶을 생산과 소비로 이해합니다.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게 삶이라는 겁니다. 대형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온갖 물품이 구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입니다. 연봉을 많이 받아야만 많은 걸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방식의 삶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파출부가 모든 집안일을 맡아주며, 매년 해외여행을 다녀와야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과정입니다. 삶을 재미있게 하는 놀이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정신을 팔면서 매달리는 놀이와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어른이 된 사람은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만족하는 것처럼 시늉을 내는 것뿐입니다. 매스컴에서 성공적인 삶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저의 이런 설명이 비현실적인 것일까요?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게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운 것 같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현상이 있어야만 약간의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 감동도 잠시뿐이고 다시 모든 삶이 여호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선지자들과 신학자들은 왜 그 말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 마음에는 그 말씀에 대한 공명이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호와가 누군지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서만 주어집니다. 그 여호와는 구약성경이 증언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의 행위,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고, 그 사실에 의존해서 살아감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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