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5:12-19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6.3.27 여의도순복음교회 |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특히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무덤 밖에서도 벌써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사로를 살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질을 하고, 얼마나 흉을 많이 봤던지 그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주님 제발 이 일은 손 떼십시오. 오라버니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오라버니가 안 살아나면 선생님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이 꾸짖으시며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무덤 문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셨고, 그 말 한마디에 나사로가 온 몸이 새롭게 되어 살아 나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당신 자신도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살아 일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유는 기독교의 복음은 이론적인 복음, 학문적인 복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적인 복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죄를 사해주시고, 현재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현재의 병을 고쳐주시고, 현재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시고, 현재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현재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기 원하십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생활에 연관성이 있는 복음이 기독교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넘치게 주십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본인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세 번에 걸쳐 예언하셨는데, 첫 번째 수난의 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직후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하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고 하시며 자기의 수난당하는 것과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직접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 예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가 그에게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사건을 전달하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체험을 하시고 난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산 밑으로 내려오니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비참해하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그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뛰어와서 “내 아들 좀 살려주소. 당신의 제자들은 고치지를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눅 9: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시고 난 다음에는 곧 자기가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33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로마정부 대표자인 빌라도는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막는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히 지키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에서 66절에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병사들이 무덤을 굳게 지켰으나 예수님은 그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에서 4절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여자 성도들이 아니면 유지가 안될지 모릅니다. 초대교회 주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도 부활의 첫 증인은 제자들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 같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봉사 했던 여성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을 무시해 여자들은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아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을 때도 그 숫자를 남자만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법적인 재판을 받을 때도 여인들은 증인으로도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얼마나 멋있는 분인지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입에서 부활을 증거하게 하신 것은 부활이 진정한 사실이고, 그녀들이 진짜로 봤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도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절대로 여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수차례 주님이 나타나셨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서 14절에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서 28절에도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부활의 증언들이 속출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에서 4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다시 찾아오셨으나 즉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아보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달려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조반을 먹이시고 사랑하는 주의 제자로 그 사명을 다시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부활하신 후 40일 지난 후에 약 500명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 승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로 9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도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굉장한 승리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을 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빚을 다 갚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핏줄을 받은 사람들은 다 죄인이고, 다 죽음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여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천국에 올라가시기 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으로 항상 같이 있어 우리를 돕는 분이시고, 돕는 분이 있어야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다른 보혜사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꼭 같은 보혜사 성령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파라클레토스’ 보혜사는 지금 숨 쉬는 공기와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 “성령 보혜사시여 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날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면 성령이 역사함으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고, 좌절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가서 성회를 많이 인도했는데 문화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나 우리하고 습관이 다릅니다. 그런데 10만 명, 30만 명, 100만 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 가면 그 군중들 앞에 서면 겉으로는 안 그런데 속은 덜덜 떨립니다. 그때 “보혜사 성령님. 나는 못합니다. 안돼요.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셔야 돼요”라고 하면 기막힌 기적이 나타나 바람같이, 공기같이 마음속에 평안이 들어오고 담대함이 들어오고 기쁨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나중에 설교하고 난 다음에 그 설교를 들어보면 ‘어떻게 내가 저렇게 기막힌 설교를 했는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고 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병들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우리가 건강하게 살라고 축복하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고 저주를 철폐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하여 이 땅이 저주를 가져와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피투성이가 돼서 피땀을 흘리며 사는 인생들에게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사 그 저주를 다 함께 못박아버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3.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
어떤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며 부활을 부인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끌어안고 걸머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지 못했으면 나를 끌어안고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영원히 파멸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됨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이 되어 모든 것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 죽음을 걸머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 못했으면 우리는 그를 따라 다 죽고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했으면 우리는 거짓을 전파하는 자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인 것입니다(고전 15:14∼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고,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고, 예수 천당은 내 천당이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종교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불의, 고통, 슬픔, 낭패, 죽음까지도 다 끌어안고,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철저히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죽음까지 끌어안고 죽으셨는데, 부활하심을 통해 철저히 우리의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4.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
예수님이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죽어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사람의 첫 열매이시고, 우리는 그를 따라서 영생의 열매를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서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와 같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듯이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서 사망을 선고 받고,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철폐 해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죽음의 문제는 철저히 예수님 안에서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동안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리고 ‘웰 다잉’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 삶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가족과 이웃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그들에게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14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슬퍼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시 동안 그들을 볼 수 없지만 큰 슬픔을 마음에 간직하지 말아야 될 것은 장차 낙원에서 우리와 함께 만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 믿지 않는 자들은 부활의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지만 우리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우리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죄와 모든 고통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매일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며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