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2:18-27 |
---|---|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18절-27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사두개인들의 신앙은 이미 본문에 있고,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을 다 믿는다. 부활 천사 천국을 다 믿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영적 실상화 되는 말씀은 안 믿는다.
사람들을 보면 표면의 말은 그대로 알아들으면서 말 속에 말이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해서 오해도 하고 오식하고 원수가 되고 속상해 하는 일들이 많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남이 말을 할 때는 일단은 듣고, 그 다음에 속에서 정립을 하고 무슨 뜻인지 잘 헤아리고 깨달아서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민족이면서 바리새교인들처럼 믿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은 현세주의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는 잘 통한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오늘날 이 시대에도 각 교단 교파가 많은데, 합동은 뭐며 통합은 뭐냐? 합동을 보수 정통이라고 할런지 모르지만 이 합동이 세상 판이라고 하는 통합과 잘 통한다.
설교가 사회적 활동의 색체를 띤 설교요, 그런 신앙으로 형성이 되어 있으면 주님의 본질의 영적인 면과는 질이 다른 것인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 세속적인 이 신앙과, 보수신앙이라고 하는 두 부류의 사상들이 판을 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복음의 적중성이 되는 신앙은 찾아보기 힘들다. 천국복음의 적중성, 하나님의 온전의 신앙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합동이니, 보수니’ 하는 게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는 신앙사상이냐? 그거는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성경 글자대로 율법주의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교단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자는 잠잠하라’ 하는 걸 그 성경구절대로 지킨다. 그러나 성경은 전부는 계시이니 ‘교회 안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하는 이거는 남자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다.
그러면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해당이 되는 ‘교회 안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이 말씀도 이룰구원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게 하는 말씀이다. ‘여자들’ 하게 되면 수종자들이요, 그러니 신앙의 질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에서 잠잠하라’ 했는데, 교회에서 하는 말씀은 교회의 머리가 하는 말이라야 된다. 또한 교회의 머리의 말에는 교회가 잠잠이 돼야 하는데 즉, 주님이 말씀하실 때 교회가 잠잠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다. 뭐가 안 그러냐? 교회 안에서 세상이 머리 위로 올라가서 세상 말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잠잠이 될 수가 있느냐? 안 된다. 그렇게 되니 제 멋대로 일어나는 거다. 우리는 다 주님께 수종자들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전부는 아멘이 돼야 한다. 노멘은 없다.
내 경험적으로 스승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어떻게 하려느냐? 로고스 신학에 가든지, 창광교회의 계약신학에 가든지 하라’ 하셨는데,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이 진리를 가지고 이 험난한 세월을 네가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 스승목사님이 살아계실 때도 스승목사님에게 생명파라고 했고, 부산 백목사님에게는 백파라고 했다. 좋은 뜻으로 그렇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그곳들을 보니까 하나는 율법주의 냄새가 나서 안 되겠고, 또 반대편을 보면 이건 제 멋대로다. 그래서 양쪽이 다 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간다’ 하고 지금까지 왔는데, 그런데 그런 분들의 후임자들을 보니 그 교회가 다 변질이 돼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질을 보면 얼마 안 가서 변질이 될 런지, 안 될 런지 답은 그냥 나오는 거다.
변질되는 신앙사상, 물질성적 신앙사상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변질이 되게 돼 있다. 시간 속에 들어있는 건 변질이 된다. 썩는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절대로 변질성적 물질성적으로 나오는 그런 신앙관을 갖지 말아라. 이건 날이 갈수록 썩는다.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는 그 말씀 그 이치대로 나가야지 사람이 세상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사람이 세상을 휘둘러야 이치다.
청년 때 통합측에 몸담고 있을 때 장로들이 어떻게 드센지 목사를 금방 갈아치우고 금방 갈아치우고 했다. 내가 볼 때는 그러는 장도들 믿음도 정말 없다. 정말 앙화다.
19절-20절에 사두개인들의 물음이 있는데, 이 사두개인들의 물음은 구약성경 신25:5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묻는 거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이 성경의 영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관한 것으로써 이스라엘 안에서 세상 끝 날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영적 생명계대의 운동이 끊어짐이 없이 내려가게 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문자적 액면적으로만 말하지 말아라.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엘은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땅에 설정을 하니 하나님께서 그 엘을 죽여 버렸다. 이건 생명계대의 운동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은 인간이 개처럼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비유로 들고 와서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어떻게 생명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 속에 영적 생명계대의 역사가 들어있는 것은 모르고 ‘그 때는 그랬다네’ 하면 건 안 된다. 이건 해석이 아니다. 성경을 일반개념으로 보게 되면 해석이 안 될 곳이 참 많다. 공자가 성경을 본다면 ‘뭐 이런 게 있느냐’ 할 정도의 내용도 많다.
오난도 자식을 낳으면 형의 자식이 될까봐 역시 땅에 설정을 하니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고 죽여 버렸다. 생명운동을 안 하면 이스라엘 진에서 끊어질찌니라. 끊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누가 인구정책을 펼쳤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했는데 지금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그 정책 다음에 오는 재앙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한 거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한 정책이 그 방편만 달랐다 뿐이지 구약시대에 바로 왕이 ‘사내아이를 낳거들랑 죽여라’ 한 그 이치와 어찌 그리 똑같은지?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생명운동을 해야 할 존재임을 모른 채 예수님께 일곱 형제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을 했다. ‘맏형이 아내를 얻었는데 그 형이 죽자 둘째 아들이 형의 아내를 취했고, 칠 형제가 모두 형의 한 아내를 취했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그 한 아내는 부활 때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 물었다. 천국에 가서 여자 하나 놓고 가위 바위 보를 하느냐? 모르면 우스꽝스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니 알고 보면 그들은 부활에 대해 물을 자격도 없는 거다. 성경을 읽지도 않는 사람은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물을 자격도 없다. 성경을 안 읽고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 어쩌고 저쩌고’ 해도 거기엔 답은 없는 거다. 이런 자들이 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한다며 세상의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를 말한다거나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니, 저절로 생겼느니’ 해도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거다.
예수님께 시험을 거는 이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은 똑똑한 척하고 물었지만 전부는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물질적 개념으로 묻는 거다. 이런 자들이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을 말해줄 수 없는 것이고, 성경을 안 보는 자들에게는 이룰구원을 말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다. 아무 소용이 없다.
현세주의 세상주의 인본주의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우리의 실상을 전혀 모른다. 인간의 실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정 반대요, 하늘의 생각과 땅의 생각은 역시 그 목적도 정 반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25절-27에 보면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했다. 인간의 용어로 말하자면 중성이라는 말이다.
믿는 자들이 세상 끝 날 변화 부활을 입으면 남녀의 성이 없어지니까 천사들과 같다. 믿는 자들이 현재에 살면서 이룰구원으로 영적 생명이 살아나는 삶을 산다면 이 삶은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고 신령성에 속하는 것이므로 즉,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 것은 남녀의 성에 속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하는 것이므로 세상을 소원 목적적으로 붙잡고 살지를 않는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함은 종교적인 세상을 목적하고 믿은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살아나는 건 없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게 없다. 예수를 믿어도 내 속에 살아나는 게 없다. 우리는 살아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도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구나.’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다.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이치로 무장이 돼 있으면 어디를 가나 이루는 구원, 즉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구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구나. 네가 질적으로 그런 신앙을 가졌느냐? 성경을 보면 하늘의 이치가 무한히 들어있다. 하늘의 이치에 밝은 사람은 땅의 이치도 그냥 즉각적으로 사용한다.
목사가 이방종교의 도를 통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왜 안 믿는 자들의 말을 쓰느냐?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도통을 하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거냐? 각 나라의 사전을 다 외우면 성경이 알아지는 거냐? 성경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우리의 구원과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 그리고 신령세계까지 함축이 돼 있다. 그럼에도 이 성경으로는 부족해서 세상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의 말을 가져다가 교회에서 말하는 거냐?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는 이삭의 하나님,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했다.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들이다.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의 조상의 신앙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신앙이 구분이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육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전부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냐? 하나님의 진리통치의 말씀을 받는, 생명이치의 말씀을 받는 백성들이라 그 말이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기를 점점 말씀으로 실상화 실력화 시키며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광야교회다. 구약시대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교회다. 이치는 같이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의 눈으로 보면 그게 현재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현실이요, 구약의 그 사건은 계시적으로 비유적으로 된 것이므로 그 사건 안에서 자기가 가는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 성경 속에서 자기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보여져야 한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생각하지 말아라. 모르면 그만큼 자기는 미련해진다.
아브라함은 멸망 받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탈출을 해서 산 신앙이고,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려졌다가 다시 산 살아있는 신앙이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온 신앙이다. 이 삶 전부가 시련 연단으로 살아온 신앙의 삶이다. 이게 이 세 분의 신앙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산 자는 생명의 말씀을 붙잡은 자요,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한 의사단일로 가기 때문에 이걸 표현해서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넓은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대로 제 마음대로 가기 때문에 이 길을 넓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는 어떤 신앙으로 가고 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시라’고 했는데 죽은 자는 뭐냐? 진리이치의 말씀을 버리고 불탈 세상을 향해 가는 자는 인본주의 신앙자요, 이런 교회는 애굽 같은 교회요, 종교적 세상인데, 이런 신앙을 가진 자의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신앙이 얼마나 많으냐?
우리의 기본구원(중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 대행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중생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거저 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기본구원으로 영이 산 것은 전제를 해 놔야 한다.
각 사람이 중생이 됐고 안 됐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이 정확히 아시는 거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 시인을 한다면 그 사람이 인본주의로 믿던 세상적으로 믿던 어떻게 믿던 기본구원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 다음이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건데, 이 이룰구원은 성장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이룰구원은 학생이 학교에 들어가면 어떤 공부를 못했느냐? ‘국어를 못했느냐? 사회를 못했느냐?’ 하고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처럼 믿는 자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진리와 영감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뤄가는 것이다. 이게 믿는 자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할 일이다.
성령님과 유기적 결합이라는 것은 신학적 용어인데, 성령님과 유기적 결합을 하려면 질이 같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성령님과 질적으로 같아지는 거냐? 육의 생각, 세상생각, 물질적 생각, 물질적 사고방식, 인간의 자기 경험, 자기가 들은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세상과 육을 따라 사는 것이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은 성령님은 순전히 하늘의 생각, 하나님 생각, 하나님 뜻을 생각을 하는데 믿는 내가 이 성령님이 생각을 따라 사는 게 성령님과 유기적 결합으로 사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과 유기적 결합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 믿은 후에 진리말씀을 듣고 이 진리말씀에 비춰서 하나님의 것과 자기 것을 비교해 봐서 자기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또한 아무리 오래 간다고 해도 이건 100년 안쪽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천 년 만 년, 죽음의 선 너머까지 영원히 가는 것임을 알고 육적 세상적 죄악적 임시적인 것을 버리고 영원히 가는 하나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봐서 제일 나쁜 것을 나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최고의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신다. 그러니 내 것은 다 버리고 살아있는 것, 하나님의 것을 내가 받고, 그것이 내 것이 됐을 때 성령님과 질적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거다. 이게 바로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의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인 것이다. 성령과 유기적 결합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를 잘 알아라.
이렇게 하나님과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가 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한다면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그게 하나님의 생각이고, 이런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자기의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활동을 하면 그의 몸은 의의 병기로 쓰이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이룰구원으로, 영능의 실력으로, 영모의 미모성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히 입으면서 사는 거다. 이 사람은 이 땅에 있는 천국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다. 산 자의 신앙자들은 말씀하신 분의 인격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인내하고 소망하며 사는 자들이다. 이걸 지식적으로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는, 이 가시나무의 가시에 찔리면 고통이 오는데 이 고통을 핍박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인해서 가시나무에 찔리는듯한 고통을 당하면 그에게는 장차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인데 믿는 사람들이 고통을 싫어한다. 그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가시나무의 또 한 면은 이 가시나무를 죄 있는 인간으로 본다면 남에게 피해만 주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 다음에는 이 가시나무를 죄 많은 인간, 버린바 된 인간,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으로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살리는 역사를 하신다. 이런 의미들을 가시나무에 불이 붙은 것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계시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자들을 들어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들어서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뤄주시고자 하는 구원에 대한 약속은 지금의 우리들에게까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계시는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은, 구원의 역사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 어떤 고통스런 환경에 처해져도 산 신앙자에게는 그 약속은 성취가 된다는 말이다. 이걸 단순히 지나간 구약시대의 말씀으로만 보지 말아라.
그 분을 발견한 자, 구원을 위해 살려고 하는 자는 그 분 앞에 자기의 주관적인 신발을 벗어라. 신발을 신고 있으면 제 마음대로 가고자 하는 게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안다면 자기의 주관적인 신발을 벗게 된다. 그 분의 말씀 앞에, 그 분 앞에서는 자기의 모든 주관성과 타락성을 벗어라. 네 마음대로 신발을 신고 다니지 말아라. 똥 묻은 거, 흙 묻은 거, 진흙 묻은 거 신고 다니지 말아라. 자기 주관적인 신발을 벗어라. 목사님들이 자기 주관적인 신발을 많이 신고 다닌다. 이상한 짓도 많이 한다. 이게 무당인지, 악령을 받은 거지?
구원으로 살려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자기 주관적인 신발을 벗어라. 자기는 하나님 앞이다. 그럼에도 벗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자기 주관적 타락적 신발을 벗은 자가 참 종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는 역사를 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하나님은 죽었다. 그들은 육의 생각, 세상생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속에는 하나님은 죽었다.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를 못한다. 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었다 그 말이다. 마음의 수지성을 세상에다 내려놨다 그 말이다.
구원으로 살아나는 신앙은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심은 거룩한 신령성을 말씀함이다. ‘남녀가 장가간다, 시집간다. 안 간다’ 그런 걸 말씀하심이 아니라 영적인 영의 신앙은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과 세상의 것을 하나님처럼 붙들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