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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6:2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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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6.5.8 주일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M]과[P]의 음운적 대비로서의 예수
렘3:19-22/마6:25-32
영어의 M(엠)과 P(피)는 음운적으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ㅁ(미음)과 ㅍ(피읖)은 ‘물’과 ‘불’의 자음이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우는 최초의 말인 ‘엄마’와 ‘아빠’의 첫 발음입니다. 물이나 엄마, 아빠나 불을 발음하는 언어의 질서는 모두 이 M(엠)과 P(피)에서 출발합니다. M(엠)즉 ㅁ(미음)은 부드러운 유음(流音)이고 P(피)즉 ㅍ(피읖)은 딱딱하고 격렬한 파열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불이 닮은 거고, 어머니와 물이 같은 성향인 것입니다.
자 보세요. M(엠) 곧 물이나 어머니는 부드럽고 조화합니다. 갈등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P(피)즉 아버지는 격렬성을 가진 불이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러니 갓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엄마’부터 말하는지 ‘아빠’부터 말하는지를 구분하려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장난스러운 부모의 바람 속에 무의식의 가치관이 주입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을 불렀던 처음 음운은 P(피)즉 아버지였습니다. 이후에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전통을 유지해 왔습니다. 세례를 베풀 때도 축복을 할 때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합니다. 아버지 할 때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근엄한 권위주의적인 모습입니다. 특히 우리 동양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엄부자모”라는 전통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의 종인 성직자들도 아버지 적인 권위를 행사합니다. 구교에서는 성직자를 신부(father)라고 부르면서 절대권을 행사합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하나님’을 아버지화 하면서 하나님은 권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엄한 분이라는 고정된 생각을 키웠습니다. 돌보아주는 인자한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사실 인간사에 있어서는 어머니 혹은 그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돌봄이 없이 우리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느낀 구교는 ‘성모 마리아’를 강조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그 허전한 심정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불교도 보살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민을 같이 아파하는 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살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의식주에 걱정하는 민중들을 보고 하늘 아버지가 다 알아서 돌봐주시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바, 아버지”라고 마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호소하듯이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 까지도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본격적으로 부른 예언자는 예레미야가 처음입니다.
“나는 너를 아들로 삼아 기름진 땅을 주고 싶었다. 뭇 민족 가운데서 너에게 가장 아름다운 유산을 주고 싶었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행여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애인을 배신하는 여인처럼 너 이스라엘 백성은 나를 배신했다.배신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렘 3:19-22)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제2이사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죄에 깔려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作品입니다. 야훼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사 64:7-8)
왜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까요? 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불렀을까요? 먼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심정을 예레미야의 시를 통해 음미해보죠.
“나는 너를 아들로 삼아 기름진 땅을 주고 싶었다. 뭇 민족 가운데서 너에게 가장 아름다운 유산을 주고 싶었다. 나를 아비라고 부르며 행여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애인을 배신하는 여인처럼 너 이스라엘 백성은 나를 배신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렘 3:19-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끼는 아들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심정은 배반한 아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심정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는 말이죠? 이 “아버지”라는 표현은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언어적 태동은 바로 ‘배반’과 ‘회심’을 전제로 출발했던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심정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2이사야의 표현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죄에 깔려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야훼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사 63: 8-9)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비심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서와 심판은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의 자비심에 호소를 하는 겁니다. 이 호칭의 근저에는 무서운 규율하고 심판하고 벌주는 아버지 말고 끝없이 받아 주고 쓰다듬어 주는 어머니가 되어 달라는 호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 같이 유유하고 인자한 어머니 같은 분이 되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반어법적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로 모셨지요. 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도 “하늘 아버지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으로 주시는 인자하신 분”이라고 하셨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마지막 기도를 하셨을 때에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어요. 마치 그의 옆에라도 계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때를 쓰는 모습과도 같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부르기는 아버지라 부르지만 사실 그 심정은 어머니역할을 간청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까지도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높은 보좌에 앉으신 엄하신 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어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저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생각이라고 보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경전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주님)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율법의 조문들을 지키지 않으면 엄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권위주의적인 신관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계셔서 돌봐주시는 사랑의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던 겁니다. 이것은 거의 ‘어머니 하나님’이러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나요?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들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여자들은 셈에 들지 않았었지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5천 명을 먹이셨을 때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5천 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어머니와 비교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엄한 심판자로 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그저 아버지라고 부른 것만 해도 혁명적인 것이었던 겁니다.
21세기를 보병궁 물병자리 시대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물의 시대라는 말이죠. 지난 세기의 역사는 불의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남자 중심의 세기였다는 거고 전쟁의 세기였다는 뜻입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기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물의 세기라는 것은 융화, 융합, 통전, 통섭이 세기라는 뜻입니다. 남성성의 세기에서 여성성의 세기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던 예수님을 보세요. 그를 위해 우는 여인들을 보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그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중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사형수에 “네가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속삭였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가르침은 찌르고, 베고, 분열 시키고, 죽이는 남자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이 되지 말고 물이 되라는 겁니다. 따듯한 어머니의 심정을 잃지 말고 실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인류의 소망인 것은 끝까지 자신의 삶을 [P]즉 불과 아버지로 사용치 않고 [M] 곧 물이며 어머니의 사랑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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