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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막12:3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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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32절-34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서기관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본문 앞에서 한 말씀을 이 서기관이 들어보니 이치가 맞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는 ‘말 잘 한다. 유식한 말을 많이 쓴다’ 그렇게 보지 말아라. 설교하는 분이 원어를 쓰고 영어를 쓰기도 하는데 설교는 그런 게 아니다. ‘이치가 맞느냐. 안 맞느냐’이다. 모르면 어쩔 도리가 없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아, 재미있다. 말 잘 한다’ 하고 생각하겠으나 우리는 ‘이치가 맞느냐, 안 맞느냐’를 보는 거다.
이치가 틀리면 세상만사가 어그러지고 뻐그러진다. 물건이나 건물 등 뭘 만들더라도 설계에 맞아야 맞아 들어간다. 하나라도 길고 짧고 바뀌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도 그렇다. 우리의 지식도 이치가 맞아야지 감정적인 지식을 가지면 만물을 다스릴 수가 없고, 이러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큰 피해를 본다.
세상 모든 만물은 과학법칙대로 이치로 들어있다. 그래서 활용이 잘 된다. 그런데 옳은 지식을 안 가지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면 복장이 터진다.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 막무가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 이치에 딱딱 맞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적 이치는 사람이 바로 된다. 이치의 사림이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감정도 많고, 성격도 비뚤어지고, 성질도 더럽고, 자기 혼자서만 옳다고 하고, 이치에도 안 맞게 살았다. 이런 사람은 늘 불평불만이요 원망이요 한숨이요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다.
사람과 사람끼리 왜 대립이 되느냐? 일반적으로 보면 정신면에 맞지를 않기 때문이다. 다 자기고집이다. 정치세계에도 보면 법으로 처리할 문제가 근본은 어디로 가고 껍데기만 갖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니 백성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사람의 세계에서 사람을 알려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부터 먼저 찾아서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사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면 지식적인 면에서도 사람을 잘못 인도할 것이고, 지혜를 쓰는 면에서도 완전히 잘못된다. 이렇게 되면 도덕성 면은 말할 필요도 없는 거다. 이러면 사는 게 지옥이다. 성경은 그렇게 안 살도록 하는 거다.
사람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따먹었으면 말씀의 진리이치가 나와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몸 밖의 모든 존재 사건 환경을 다스렸을 것이다. 하나님 다음의 인간은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 타락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아, 생명과 따먹고 이 세상을 한 번 다스려 봐라. 내가 천국을 다스릴 테니 네가 물질세상을 한 번 다스려 봐라’ 이게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뜻을 모르고 자기 마음을 못 다스리니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으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눈으로 보이는 면을 기준을 세우게 되고, 남에게 고통을 주고, 온 만물이 대립과 대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이냐?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오래 산 사람이 969살이다. 그게 안 믿어지느냐? 그런데 노아홍수 이후에 사람들의 나이가 막 적어진다. 오늘날은 약으로, 이식수술로 100살 이상을 산다. 그런데 순수하게 하나님의 자연법칙에서 사는 나이가 왜 이렇게 적어졌느냐? 오늘날 죄의 가짓수가 너무 많다. 먹는 것도 오염, 코로 마시는 공기도 오염이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인간의 물질욕심, 돈 욕심 때문이다. 그런 이치로 보면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지금 표면적으로 보이는 건 다 아는 거고 눈에 안 보이는 면에서 비진리가 얼마나 밑으로 흘러가서 사람을 감염시키고 죽이게 될지를 깨달아야 한다.
알고 보면 자기의 전반적인 일생전폭은 다 자기의 생각에서 나온다. 자기의 일생이 자기의 생각에서 나오는 건데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른 지식, 바른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즉,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으로, 옳음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자기의 영원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 옳음으로 나오는 게 자기 능력이다. 그래야 자기를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고, 먹는 면도 다스리고, 노는 면도 다스리게 된다. 이래야 사람이 규모가 딱 서는 거다. 이게 참 멋있는 사람이다.
예수님 앞서 온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라고 했는데 이건 워낙 상대가 말을 안 들으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기 때문에 개인감정에서 그런 말을 한 거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치가 전부는 영원히 옳은 거다. 예수님의 감정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제 마음에 안 맞으면 감정이 나올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치가 분명하다. 천국에서도 영원히 그 이치가 분명하다.
교회 안에서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말씀을 전할 때 영원히 가는 이치를 주면 그 말씀은 사건이나 환경이나 시대에 구애받지를 않는다. 영원히 가는 그 이치의 정신이 자기 마음속에서 기둥처럼 세워져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지옥 같은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또는 아무리 부요가 와도 넘어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보통은 환경에 넘어지고 상황에 넘어지고 사건에 넘어지고 사람에게 넘어지고 돈에 넘어지고 사랑에 다 넘어진다.
서기관이 대뜸 나서서 하는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라고 했는데 이 서기관이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듣는다면 ‘과연 옳습니다’ 그렇게 말이 나올까, 아니면 ‘헛소리 말고 내려와라’ 할까? 이치에 안 맞으면 허튼 소리다. 이치에 안 맞는 소리를 들으면 귀가 더러워지고 저질이 된다. 사람은 무슨 말을 듣던 듣는 족족 그 말이 자기 생각 속에 녹음기처럼 녹음이 되기 때문에 들었다 하면 그게 언제고 나오게 돼 있다.
32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에 서기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랬는데 오늘날 성경을 보고 듣고 읽는 우리도 이 서기관의 말에 동감을 하느냐? 동감을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지혜를 다하고.’ 즉 모든 이해력을 총 동원하고 통찰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 서기관의 말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어디서 걸릴까’ 하는 것도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놓고 우리 속에서 지식도 동원시키고, 지혜도 동원시키고, 영적인 오감의 오감성도 동원시키고, 기능 지능 면에 동원을 시켜야 한다.
또 ‘이웃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랬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 네 몸 전체를 번제물로 드리는 것보다 옳다고 했다.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정말 옳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기관의 이 말을 듣고 그 서기관을 따라가면서도 예수는 안 따른다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건 틀린 거다. 지금 예수 믿으면서 이런 장면이 있다는 걸 생각해 봐라. 우리가 말로써 옳은 이치로 ‘진리 진리’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처럼 그 진리로 인격화 성품화 실상화로 되는 것은 빈약할 수가 있다.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모든 재물을 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냐? 진정 하나님 자신에게 제물이 필요한 것이냐? 그 때로 말하자면 양 잡아 드리고 하는 게 하나님에게 필요하냐? 그런 제물이 당신에게 필요한 거냐, 우리에게 필요해서 구약에 그 말씀을 한 거냐?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나님께는 제물이 필요가 없는 거다.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이 제물을 받으시고 잘 봐달라’는 식이다. 신의 마음을 잘 구워삶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런 거냐? 아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느냐?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니까 시대적으로 보면 우리의 죄 속함을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짐승을 잡아서 드린다는 것은, 표면으로는 첫째는 내 죄를 그것에 전가시키는 것이다. ‘내 죄를 위해서 저 짐승이 죽는구나.’ 그런데 그 짐승이 내 죄를 속할 수 있느냐? 그건 안 된다. 이게 비유적이요 상징적인데, 내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대신 담당을 하신다는 그 모형으로 양을 잡아 드리라는 것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속하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대속해 주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짐승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한다’ 하면 이단소리가 된다.
인격자들의 세계에서는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고통이 오고 징계가 오고 형벌을 받거나 죽게 되어 있는 존재로 돼 있다. 설령 다른 사람을 해코자 안 했어도 자기가 자기의 미래성을 관가하거나 생각을 못하고 마냥 살고 있으면 그 해는 자기에게 100% 돌아온다. 그런 인간존재다.
그럼에도 세상살이를 보면 인간들은 잘 못 느끼는데 나이에 따라서도 그렇지만 깨달음에 따라서도 오늘의 고통이 어제의 원인을 심었다고 하는 걸 모르더라. 1년 전에 심었던, 10년 전에 심었던 심었다고 하는 것을 모르더라. ‘내가 이렇게 살면 미래적으로 어떤 결과가 오겠구나. 내가 현재적으로 선악과 먹은 지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면 미래적으로 어떤 상황 사건이 와서 나를 덮치겠구나. 나는 거기에 깔려 죽겠구나’ 하는 게 성경 속에 다 들어있는데 그런 면을 생각을 못한다.
우리는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안 믿는 사람도 착하게 살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속이 제사장 선지자 왕의 실상이 성장이 돼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돼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만큼 활발하게 정복 개혁 전투 그런 실력이 자기에게서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의 세계는 깡다구만 갖고 큰소리만 친다. 이건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인격화 성품화 실상화로 커지면서 정복성으로 들어가야지 세상에서 얻어맞고 치이고 죽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믿지 말아라. 말하자면 다른 사람은 그 사건을 능히 이기고 나오는데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이 들어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너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건데도 왜 죽겠다고 하느냐?
사람은 물질에 넘어가기 전에 먼저 자기 정신의 향방이 물질성으로 성격이 띠어져 있으면 물질에 넘어지기 그 이전에 그런 사건이 오면 100% 넘어질 수 있는 질로 이미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에서 건져내고 주님으로 실력화 시키고 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것이 성경말씀이다. 사전에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게 성경이다. 그러니 성경을 보는 너는 세상을 겁낼 것이 없다. 뭐가 무서워서 예수를 잘 못 믿겠느냐? 자기를 주님처럼 무장을 시키려고 하는데 왜 딴 것에 의지하느냐?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자기에게 왔다가 가고 한다. 그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돼야겠나를 깨달아라. 그러니까 말씀으로 종으로 통해서 이치적으로 깨닫게 해주기도 하지만 사건 환경에서 존재적으로 상황적으로 물질적으로 내 앞에서 왔다 가게 하면서 깨닫게도 해 주기도 하신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앞에 좋은 환경이 오면 자꾸 누리려고 한다. 그러다가 거기에 푹 빠져버린다.
성경은 신적 철학이다. 하나님의 철학이다. 세상철학이 아니다. 세상철학은 땅에 속해 있다. 이 세상철학은 사망을 이길 수가 없다.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기가 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철학은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의 몸 밖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가 있는 거다. 하나님의 철학은 정복을 해서 살리는 거고, 세상철학은 정복을 해서 죽이는 거다.
사람이 남을 해코자 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만 보지 말고, 그건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거고, 우리는 말씀에서 어겨졌으면 죄이고, 이렇게 되면 고통이 슬슬 온다. 그러니까 빛에 가까워지면 자기가 구별되고 분별되고 색감 색깔이 구별 분별이 된다. 그러나 자기가 빛에서 슬슬 옆으로 가면 자기는 어두워지는 거다. 어두워진다는 것은 고통이고 구별 분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하는 것은 사람 속에 들어있는 영적 활동 면을 구별 분별한다는 의미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일반에게도 안 속아야 한다. 일반은 자기 마음이 좋고 환경이 좋고 하면 거기에 펑펑 넘어지고 속고 한다. 자기 속에 뭔가 죄성이 들어있으면 환경과 조건이 주어지면 범죄성은 활동으로 그냥 나오게 돼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대신 죽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구약시대에 계시적으로, 그림자로, 비유적으로 제물을 드리도록 하신 것이다. ‘죄인 나를 위해 짐승이 죽는구나’ 모양새는 그렇게 보이는데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은 ‘죄인 나를 대신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사람이 대속물이 돼서 죽는구나’ 하는 이걸 알도록 계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도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믿는 우리 모두가 신령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로서 거룩과 진실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져 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이러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은혜를 받고서도 자기의 중심을 고치지 못하고 이방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제물만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도리어 죄를 짓는구나.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치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몸을 가꾸고 자기 몸이 아프면 약 먹고 병원 가고 한다. 그렇다면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교인들도 이웃이요, 자기 이웃사람도 이웃이요, 자기 몸 외의 부모형제가 다 이웃이니 그들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움켜쥐고 있고, 예수 덕으로 자기 노후대책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고발상이다.
공산주의의 ‘공산’은 좋은 뜻이다. 다 같이 이익을 나누는 것. 그런데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방 불신세상에서는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거다. 그건 하나의 자기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볼 때는 자기 스스로가 그게 나오게 돼 있다. 그게 ‘공산’이다.
안 믿는 세계에서의 ‘공산’은 다 거둬서 나눠 가지자고 하는 거니까 내가 힘들게 일을 해서 모은 것을 놀고먹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고 하니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불만을 갖게 돼 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는 사람이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실상을 닮으니 만큼 자원적으로 이웃사랑이 정확하게 나오는 것이니 더욱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타락된 사람 속에서 그게 되느냐? 사람이 바로 된 데서 옳은 게 나오는 건데 예수를 안 믿는 나라나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공산’을 부르짖는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안 되는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웃사랑이 자원적 자유적으로 나와야 하는 건데 그렇지를 못하니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거다. 이런 신앙을 가지면 얼마 못 간다. 왜 그러냐? 물질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기도 하고, 물질은 돌고 도는 건데, 돌고 도는 그런 것에 등을 기대고 사니 그 물질이 없어지면 자기의 그 물질적 신앙도 무너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세계는 서로 좋아하는 대로 투표를 해서 다수결로 뽑는데 하나님은 독권이요 독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부터 독재냐? 영원 전서부터다. 이런 하나님이신데 만일 교회에서 비교를 해서 투표를 한다면 이방 신이 하나님만큼의 존재가 있느냐? 없는 거다.
‘하나님은 독재시다’ 라고 하는 건 인간의 표현이 그런 건데, 그러면 하나님의 독재가 세계평화보다 좋으냐, 못한 거냐? 하나님의 독재는 어떤 면에 독재냐? 주권섭리라는 면에서, 모두 우리를 당신처럼 만드신다는 면에서의 독재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어느 나라도 사람을 이렇게 올리는 데는 없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는 돈을 주면 다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나쁘다’가 아니라 그런 것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절대 정확한 정의가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정확한 분이시다.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치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을 예수이름을 가지고 도둑질하는 자들이 있으니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예수사랑을 인본주의로 돌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자가 있다. 그런 데 속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이 ‘너는 며칠 안 있어서 죽는다’ 그 말이냐? 그런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서기관은 자기 스스로가 성경해석을 잘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보면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헐뜯는 다른 서기관들보다 훨씬 낫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곧잘 알아듣는구나. 그래서 이 서기관이 자기가 예수님과 같은 실력이 있다고 동등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자기와 동등한 실력으로 알고 있었다면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서기관은 후에도 예수님을 안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내공이 있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는 잘 안 나타나고 안으로 단단하게 연마된 내공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공은 없으면서 밖으로 자기가 제일이고 왕인 것처럼 하는 자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말은 큰소리를 했는데 막상 닥치면 쑥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고 하신 것은 ‘신앙은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인격화 성품화 실상화가 돼야 하는 것이니 서기관 너도 알고만 있지 말고 성품적으로 주님의 것으로 실상화 되여야 한다’ 하는 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뜻을 알아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니 조금 있으면 나는 하늘나라에 간다’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첫째 서기관은 성경박사로서 지혜롭게 대답을 했으니 더 이상의 지혜로운 질문과 대답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은 물을 염두를 못 냈다는 뜻일 수가 있고, 또한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는 말씀 후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며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되어라’ 하는 은밀성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답이 없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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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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