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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9: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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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5489945 |
2011년 12월 1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9장 10절~13절
설교제목 : ‘민중을 치유하는 사명 / 백성을 깨어나게 하는 사명’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성경 이야기>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둬서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침입자의 앞잡이였고, 민족의 배반자였고,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더러운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라는 이는 그 ‘더러운 놈들’과 한패였습니다. 예수는 자주 더러운 놈들과 어울렸습니다.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 아마 노래도 하고, 포도주도 마시고, 논쟁도 하고, 싸우기도 하셨을 겁니다. 추측건대. 어찌됐건 예수는 그 더러운 놈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이때 고상한 민족주의자들 혹은 위선적인 엘리트 지배층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의 선생이라는 이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인가?”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예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중과 함께 함>
예수는 가난한 서민(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왜>. 예수는 왜 서민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리고 또 우리는 ‘왜’ 서민과 함께 해야할까요? 오늘 이 물음을 주제로 삼아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 자신이 이웃사랑이나 사회복지 사업을 제대로 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헌신적으로 서민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염려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제가 목표로 삼는 바가 아니고요, 다만 저는 우리가 좀 더 잘하기 위해서 깊이 생각해 보자,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넓은 양해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째 가난한 서민이 불쌍해서 그들과 함께 하려는 입장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서민들 돕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는 좋고 훌륭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전에 온갖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지냈지만, 정작 가난한 백성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자비를 베품, 이는 좋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부족한 태도입니다. 뭐랄까요. 많은 문제점들을 잉태하고 있는 ‘시한 폭탄’과도 같은 사회복지철학이라고나 할까요. 자비를 베푸는 입장은 자기도 모르게 고압적이게 되어가고, 자비를 받는 입장은 자꾸만 점점 더 비굴하게 됩니다. ‘자비’를 매개로 만난 두 계층은 점점 더 멀어질 뿐입니다. 골이 깊어집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나, 자비 베풂을 당하는 이(?)나 모두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비를 계기로 만나는 두 계층이 자꾸만 병들어 가게 되는 상황, 이를 염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즉 자비를 베푸는 자의 고압적 지위를 버리고, 민중의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농노를 해방시키고 농토를 집안의 종들에게 나눠주려 한 톨스토이라든가, 우월적인 위치일 수 밖에 없는 성직자의 직위를 버리고 평민의 신분으로 스스로 내려앉은 사람들 … 뭐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는 정말로 훌륭한 삶의 태도입니다. 보통사람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저는 -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이지만 - 이런 입장에 대해서 약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절대선(絶對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지시하는 바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너무나도 자주 민중은 크나큰 오류를 범합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병들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그 자신을 의사로 표현하셨고, 민중을 병자로 지칭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중은 병들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그들이 병들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쪼들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 욕먹고, 어디 가서 제대로 한번 기를 펼 수 없는 비참한 세월을 평생 살아갑니다. 자기 생각이나 입장을 당당하게 말할 처지도 아니고, 아니 자기 생각이나 철학이라는 말조차가 뭔지도 알 수 없는, 어쩌면 그런 위험한 것(?)은 알아서는 안 되는 민중의 삶이란 곧 병듦 그 자체입니다. 육체적으로 병들고, 생각과 마음이 병들고, 사상과 영성이 크고 작은 병들을 앓고 있는 사람들, 바로 그가 민중(서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민중이 지시하는 바 - 국민의 뜻 -를 하늘의 뜻으로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우리는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왜>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물음에 대해서 제가 준비한 답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은 민중(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말씀드리자면, ‘병이 치유되는 민중’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깨어나는 백성’에게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병든 민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서민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들-아니 우리들-이 병을 치유하면서 깨어나는 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한 서민(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민중을 치유하는 사명 / 백성을 깨어나게 하는 사명’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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