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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10: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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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7686880 |
2012년 1월 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0장 16절~25절
설교제목 :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 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다니지 못해서 인자가 올 것이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만족스럽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했겠느냐!"(마태 10:16~25)】
<박해의 시대를 예고함>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박해의 시대’를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혼의 벗으로 삼았던 이들이 저 험난한 세상으로 나가야하는 즈음에 있어서, 그 예수의 벗들이 겪어야 하는 온갖 수모와 박해, 핍박과 폭력 등을 예수께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진리의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의 사람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 듭니다. 왜일까요? 진리의 사람이 강력하게 권면하는 삶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악령(惡靈)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악령(!)에 도취되어 있는 인간들에게 그 악함을 꾸짖게 되는 진리의 사람, 그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환영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착하게 태어났다는 성선설(性善說)도 있고 인간은 악하게 태어났다는 성악설(性惡說)도 있는데, 요즘 저는 “인간은 착한 본성으로 태어났으나, 인생의 과정 속에서 선과 악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금 하느님의 관대한 은혜로 말미암아 선하게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선악(善惡)을 알게 된다는 차원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어머니 품에 있던 인류는 선한 존재였으나 어머니 품을 떠나는 순간부터 인류는 악에의 유혹을 받습니다. 이제 부모 품이나 마찬가지였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달콤한 악의 유혹’에 눈을 뜨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은 달콤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쾌락이 있고 넉넉하고 평화롭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은 맛이 없고, 춥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조바심이 나며 불안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사람이란 자들은, 즉 예수의 벗들이란 놈들(!)은 인류에게 ‘달콤한 악에서 돌아서서 딱딱한 선으로’ 돌아가라고 떼밉니다. 그러니 당연히 미움을 사는 것이지요.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의 벗임을 자처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어의 힘에 대하여>
이때 우리에게, 진리의 사람이고자 하는 우리에게, 예수의 벗이고자 하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언어의 힘’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왜 이렇게 진리의 벗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왜 악에게 유혹되어서는 안 되는 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지켜줄 수 있는 ‘신령한 말’이 우리 내면 가운데서 솟아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99명이 달콤한 악의 유혹에 빠지는 이 위험한 시대에 있어서, 하느님의 진리를 지켜내는 ‘예수의 벗’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지 않고, 선한 존재로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말’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마태 10:20)에 세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의 해석>
저는 오늘 성경의 말씀을 단순히 “너희가 관가에 잡혀가더라도 그때 너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생각날 꺼야”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합니다. 물론 아주 기본적으로 오늘 성경의 말씀은 그런 언어의 즉흥성 차원입니다. 그러나 그건 예수의 제자들이 이해한 바이고, 정작 예수께서 깊이 있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차원은 다른 데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제자들은 ‘말의 즉흥성’으로 이해했지만, 예수의 메시지는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세종의 한글창제 이야기>
조선시대의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요? 가장 일차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말이 중국의 한자와 달라서 민중들이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글이 다르니까, 이를 통합하는 차원에서 - 말과 글을 같게 하려는 차원에서 한글을 창제한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업적입니다.
그러면 이게 다 일까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언어의 정치성을 밝혀주는 드라마였습니다. 말과 글이 같아지는 한글이 만들어지니까, 민중들은 환영했지만 양반들은 반대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한글의 창제로 말미암아 독점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렸던 양반들의 기득권이 무너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기능성에 머물지 않습니다. 언어는 정치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갖는 것입니다.
언어의 경제성 차원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토록 영어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어를 제대로 해야만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돈을 잘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겁니다. 다른 게 아니죠. 또 언어의 예술성도 있습니다. 오늘날 컴퓨터 문명이 발달하다보니까 다양한 한글서체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한글 한자 한자가 어떻게 쓰여 지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언어의 예술성입니다. 제가 최근에 <혜자의 눈꽃>(천승세 작품)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어보았는데, 그 속에 그려진 언어의 표현력이 예술이었습니다. 한글이라는 문자로서 인생의 작은 사건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감성을 느낍니다. 역시 언어의 예술성입니다.
언어의 정신성도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군고구마 팝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서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저 글씨는 최고다. 인생의 간절함이 저토록 애절하게 서려 있는 글씨를 쓴 사람은 없었다. 가난한 서민이 온 힘을 기울여서 쓴 저 글씨는 어떤 서예가의 작품보다 위대한 것이다. 서예가로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가짜고 저이가 진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마태 10:20)은 어떤 맥락일까요? 그것은 언어의 기능성, 언어의 정치성, 언어의 경제성, 언어의 예술성, 언어의 정신성을 다 포괄하면서 넘어서는 <언어의 영성성>일 것입니다. 말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마태 10:20)을 듣고 말하고 표현하고 기록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악령도 넉넉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 삶 속에서, 혹은 비일상적 삶속에서 - 즉 위기의 삶속에서도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마태 10:20)을 듣고 말하고 표현하고 기록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찢어놓으려는 악령의 음모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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