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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름의 위급성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61 추천 수 0 2016.07.08 23: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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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51-6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79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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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

2016년 6월26일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똑같지만 그 방식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대다수는 늙어서 죽습니다. 병에 걸려 죽거나 사고를 당해 죽기도 합니다. 아주 드믄 경우는 사형을 당하는 겁니다. 사형은 신체를 구금하는 정도로 용서가 되지 않는 범법자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입니다. 이게 문제가 있다 해서 요즘은 사형 제도를 법적으로 없애는 나라가 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삼십대 유대인 한 남자도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고 곧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사회소요죄입니다. 당시 로마 식민통치 지역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자에게 일벌백계의 형벌이 가해졌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믿는 예수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그 정답을 구구단처럼 외우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것의 본질, 근본이 무엇인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말하는 근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을 인류가 거부했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예수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과 실제로 예수에게 십자가처형 선고를 내린 로마법정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뜻으로, 즉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혹세무민이라고 여겼습니다. 산헤드린과 로마 법정만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 시대에 그곳에서 살았다면 그들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굳이 그 당시로 돌아갈 것도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지금의 우리도 실제로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과 달리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라거나 ‘나는 그의 말씀대로 살고 있어.’ 하고 주장하고 싶으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지 아닌지 오늘 제3 독서로 읽은 성경본문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전반부인 눅 9:51-56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면서 잠시 들린 사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지역의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예루살렘 사람들과 한 통속이라는 생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저주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오십 명의 군사들을 죽인 왕하 1장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을 그 순간에 기억했는지 모릅니다. 멋지기는 하나 황당한 주장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신을 반대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악담과 저주를 쏟아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전한 이유는 그 다음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사람은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고 말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천벌 운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과격하게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에, 지금 예수를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말은 기특하고 가상하며, 진정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을 다른 제자들도 다른 경우에 종종 했습니다. 뭔가 감동적으로 들리는 좋은 이야기라서 칭찬 받을만한데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58절을 읽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실존이 이렇게 고독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의 실존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뭔가 보상을 기대하고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으니까 인생이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예수를 통해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작동 원리에 반듯하게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따름은 별로 내키는 일이 못 됩니다.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종종 읽었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마 19:16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을 들고 예수에게 온 부자 청년은 소유를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났다고 합니다.


둘째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우선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인간 세상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에서도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60절입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이 대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아버지 장례를 모른 채 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는 부친 장례 운운은 실제로 장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 따르는 것을 회피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따를 것처럼 시늉을 하지만 속에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장례라는 핑계거리가 생긴 겁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모든 인간적인 일들을 능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장례로 일컬어지는 온갖 급한 일들을 옆으로 밀어놓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더 위급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은 기회만 되면 예수 따르지 않을 다른 핑계를 찾습니다.

 

셋째 사람은 ‘당신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둘째 사람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문장이 풍기는 뉘앙스로 보면 이 사람의 행태가 더 비굴해보입니다. 예수로부터의 소명을 그럴듯한 이유로 거절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직설적입니다. 62절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쟁기질은 뒤로 가는 게 아니라 앞으로,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가야 합니다. 그는 소를 몰면서 자기가 나가야 할 방향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앞에서 소가 끄니까 앞으로 끌려가기는 하겠지만 쟁기질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 첫째 인물, 아버지 장례를 핑계 댄 둘째 인물, 가족과의 작별 인사를 핑계로 댄 셋째 인물은 다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 세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일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할 겁니다.

 

우선 여러분이 일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사건이 죽음입니다. 오늘 밤에 죽는다는 게 확실하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세 사람의 행태와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머리 둘 곳이 어딘지에 신경을 쓸 사람은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복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만날 약속도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돈벌이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죽음 자체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상에서 죽음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각자 20년이 남을 수도 있고, 50년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로 본다면 죽음과 삶은 동시 사건입니다. 같은 시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이 든 사람이 죽고를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작은 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상대화하는 하나님 나라를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절대적 운명인 죽음을 예로 들었습니다. 죽음을 대하듯이 하나님 나라를 대해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대목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마 6:33절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행태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아주 단호하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도 먹을 게 당장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사람들은 공허라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뜬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의 새로운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까 주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삶의 차원이 열립니다. 영적인 시각이 열리는 겁니다.


설교를 듣는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없으면 신앙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하나님 나라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생각도 들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서 간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현상을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해방’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갈 5:1절에서 ‘그리스도가 자유를 주셨다.’고 말한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해방으로 경험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날 해방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분적으로 해방을 경험하기는 할 겁니다. 비정규직으로 살던 사람이 정규직원이 되면 일종의 해방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해방의 능력인 하나님 나라를 진실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근본적인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인류의 노력이 다시 해방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런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죽기 위해서 산다는 모순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 해방을 향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결국 해방을 부정해버립니다. 예컨대 교육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교육이 또 경쟁력의 도구로 변해서 인간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교육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반적인 삶에서 해방은 요원해보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해방의 능력을 포기한 채 살아갑니다. 또는 사이비 해방에 자기 삶을 임시방편으로 맡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해방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단지 정치 경제나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라는 차원에서 경험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강요와 유혹, 즉 세상살이의 안전장치를 확대해야만 한다는 강요와 유혹, 그리고 자기가 소멸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해방은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이제 예수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한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 따름이 얼마나 위급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죽음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사람처럼 그 이외의 것들은 다 제쳐두고 예수 따름에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 생활도 때려치우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면 된다는 뜻으로 저의 설교를 오해할 분은 없을 겁니다. 세상살이는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가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게 아닌 한 세속의 삶은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세상살이를 하든지 자신이 지금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성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 집중한다는 것은 오늘 성경 본문의 표현대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건 억지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고, 오히려 순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붙들린 사람은 저절로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됩니다.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자식농사를 얼마나 잘 지었는지,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목사의 경우로 말하면 교회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에 관해서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생명이 완성될 종말의 빛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바울 식으로 말해서 삶의 푯대가 무엇입니까? 각자 다를 겁니다.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기도 하고, 돈벌이가 잘 되어 거기에 바쁠 수도 있고, 몸이 아프거나 가정생활이 편안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별 어려움 없이 여유롭게 살아가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따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급한 용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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