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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3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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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38절-40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앞에는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이 있고, 그 앞에는 긴 옷을 입는 것이 나온다. 예수님도 긴 옷을 입었는데 그게 어떻다는 건가? 종교적 외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외식이 참 많다. 일반적으로 외식이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것. 물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도 있기는 하다. 옷을 안 빨아서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사람 곁에 앉으면 안 된다. 자기 몸에서 냄새가 나는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 앉을 수가 없다. 또 떠드는 아이를 데리고 사람들 가운데 앉아서는 안 된다.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외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순전히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고, 그걸로 인해서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고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부자가 됐다가 가난해지면 그동안의 씀씀이를 줄이기가 참 힘들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그런 면에 자유로워야 한다. 외식, 특히 기독교 종교적 외식은 예수님 때도 그랬지만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그 속에 오만 악령 귀신 마귀의 정신 사상들이 살고 있다. 특히 기독교 안에서 외식적인 교회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자들은 옷을 입는 것도 외식이다. 남의 기준에 맞춰서 옷을 입는다. 특히 우리교회 교인들은 말세가 될수록 말세 때는 소돔 고모라 때와 같고 노아홍수 때와 같다는 것을 명심하라.
소돔 고모라 때란 한 마디로 말하면 물질선호 사상으로, 말세 때는 예배당 건축이 대형으로 많이 올라간다. 그리고 교인들은 물질선호 사상, 물질적 축복주의로 간다. 그리고 소돔 고모라는 음란한 도시다. 말세 때는 젊은이들이 하고 다니는 게 음란성이다. 안방에서 될 일이 밖에서 되고 있다.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이후로 사람들은 모두가 외식으로 흐르고 있다. 종교적으로 외식이 흐르니 이방세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자녀들은 외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보이는 심성,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 사는 거다.
그런데 말세 때는 소돔 고모라 때와 같고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 한 이 두 가지 사상이 교회 안에 복합으로도 되어 있기도 하고, 하나가 들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 우리는 모든 걸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하고 생각하라. 외식으로 들어가면 악한 것이다.
그리고 옷이라 할 때는 물론 입는 옷도 옷이지만 우리는 영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의 옷, 선행의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가 의의 사람이 돼서 의를 행한다면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의의 사람으로,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활동이 들어있는 거다. 그게 성도가 입어야 할 옷이다. 아름다운 선행의 옷이다.
일반세상을 보면 직업상 얻게 되는 존귀 명예 영광성도 그 사람의 옷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나타나는 의와 선, 이 의와 선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행동 행위를 말한다. 임시성에 속하는 것은 전부 시간 속에 속한다. 우리의 옷은 임시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알아주는 신앙의 세계에서 보는 옷이다.
사람이 자기 몸 모두를 남이 보기에 맞추면 참으로 악한 사람이다. 소돔 고모라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첫째 부활에 못 올라간다. 그러면 둘째 부활은 어떻게 되느냐? 불속에서 타진 후에 부활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치가 말 잘 듣는 자식은 씻고 그대로 방에 들어가지만 말 안 듣는 자식은 실컷 얻어맞고 씻고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모르면 일반 이치적으로도 생각을 해 보라 그 말이다.
아무리 친부모 자식 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이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그 전에 깨닫도록 해줘야 하는 거다. 깨달음을 주는 부모 형제 친구 이웃은 참 좋은 사람들이다.
옷을 조금 더 생각하면, 옷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부자는 옷을 잘 입는다. 옷에 패물을 붙인다. 거지 옷은 그런 건 없다. 거지가 그런 거 매달고 있으면 도둑질한 것으로 안다. 거지 옷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거지는 떨어진 옷을 입는 게 거지다. 떨어진 옷을 입고 깡통을 달고 다니면 거지라고 하지 누가 부자라고 하느냐? 부자는 옷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옷은 제사장의 옷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옷이다.
옷에는 또 소속을 나타내는 옷이 있다. 군복, 그리고 경찰복, 중 옷, 수녀들 옷 등이 있다. 성도는 진리의 옷, 하나님 성품의 옷을 입는 거다. 그리고 옷에는 용도를 나타내는 옷도 있다. 작업복, 잠옷 등.
세상은 사람들이 법을 만들면 법이 생기는 거지만 성도들은 법 때문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일반상식으로 보는 정도가 있는 거다. 일반세상에서는 그 정도를 벗어나서 오는 범행이 많다. 그러니 옷을 입을 때는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고, 어떤 활동에도 신체가 노출되지 않는 옷을 입어라.
옷을 입은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심리와 정신이 나타나는 거다. 살림하는 여자가 손톱을 기르고 얼굴에 잔뜩 화장을 하고 짧은 옷을 입고 나가면 어떤 여성이라고 하느냐? 살림하는 여자로 보겠느냐? 어디에서 노는 여자처럼, 어디에서 노는 남자처럼 옷을 입고 다니면 그게 그 사람 정신을 나타내준다. 내가 깨끗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렇거니’ 생각을 말아라.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남녀 성이 다르다.
에덴동산에서 ‘보암직’ 하는 기준이 들어간 것은 벌써 타락이다. 보암직은 외식이다. 그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보암직’ 하는 그 기준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느냐? 그러면서도 전부는 남 핑계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
세상은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자기가 어디를 다녀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까 그렇지 세상은 언제든지 자기가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
옷에는 또 용도를 나타내는 옷이 있다. 작업복, 잠옷, 예복, 일반적인 겉옷, 속옷, 운동복 등이 있다. 신발도 용도에 따라 신어야 한다. 등산화, 작업화, 헤엄칠 때 신는 신이 따로 있다.
그 다음에 계절에 따라 입는 옷도 있다. 여름에 겨울외투를 입고 나온 사람은 몸이 안 좋은 사람이다. 옷 이전에 정신이 이상한 경우도 있다. 추운 겨울에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열이 많은 거냐, 정신이 이상한 거냐?
옷을 입는데 따른 이미지도 있다. 겨울에 남자들이 짧은 옷을 입고 다니면 건강체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가 겨울에 옷을 짧게 입고 다니면 건강체로 보기가 힘들다. 간단히 말하면 여자는 옷으로 자기 몸을 가릴수록 아름다운 거다.
왜 꼭 그래야 하느냐? 우리 인간들은 신앙 이치적으로 하나님 앞에 더러움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의 옷, 의의 옷, 세마포 옷을 길게 입는 거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는 건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리는 거다. 그래서 죄를 지었을 때나 기도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못 나간다. 영적 면에서 하나님 앞에 옳은 이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에덴동산으로 올라가서 보면 선악과를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게 아니라 여자가 먼저 따먹었다. 우리는 하와가 저지른 죄를 다시는 저질러서는 안 되겠다. 주의해야 되겠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같은 여자이지만 룻의 경우 하와와 비교해 보면 어떤가?
신22:5에 보면 남녀 성별을 나타내는 옷이 있다. 뿐만 아니라 창녀의 옷도 있다. 창녀의 옷은 얼굴을 가린다. 영적으로 보이는 창녀 창남은 그 마음과 정신과 소원성이 세상으로 나가서 돌고 있다. 왜 마음이 세상에 나가서 돌고 도느냐? 하나는 정함이 없는 거고, 하나는 그것 붙들고 노는 거다.
세상 창녀들은 자기 몸까지 노출시킨다. 자기 정신을 창녀처럼 가지고 있지 말아라. 자기를 단속한다는 말은 그런 더러운 언행심사를 안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격의 고상함에 품위를 가지지만 마지막을 치닫는 사람들은 옷을 입어도 섹시한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한다.
사회의 상식적으로 입는 옷은 깨끗해야 하고, 입는 옷은 활동하기 편하고, 몸의 맨 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입는 것이 상식이다. 이 상식을 무시하지 말아라. 예를 들면 산에 올라갈 때 짧은 옷에 맨발이나 슬리퍼를 신고 가지 않는다. 이건 상식이다.
예수님께서 삼가라는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음으로 자기의 존귀성을 높이고자 하는데 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들이 긴 옷에 자기의 가치를 두는 것은 외식이다. 자기의 가치를 그런 것에 두는 것은 외식이다.
벗고 다니는 것에 자기 가치를 두는 것은 창녀촌에 가까운 정신이다. 이런 자들은 옷에 맞춰 신발도 신어야지, 가방도 그 옷에 맞춰서 들어야지, 악세서리도 그 옷에 맞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용도에 맞게 갖추는 게 아니라 모양에 자꾸 맞춘다. 그렇게 맞춰서 어디로 가느냐? 돌아다니는 거다. 모양새를 갖춘 사람치고 가만있는 사람이 없다. 그게 창녀정신이다.
이런 자들은 사람이 많이 모여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곳에 가서 문안 받기를 좋아한다. ‘서기관님, 목사님, 시장님, 어서 오십시오’ 하며 옷을 불고 털고, 의자를 내어주고, 커피 타주고 대우가 좋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집중되는 게 좋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잘났다 보다’ 한다.
‘보암직’ 하는 면에 시선을 끌려고 하지 말아라. 그게 선악과 따먹는 정신이다. 별로 웃을 일도 아닌데 헛웃음을 치고, 작은 목소리도 아닌데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말을 하는 등의 분위기에 맞지 않고, 신분에 맞지 않고, 남녀노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목사나 교인이 있다면 어찌 되겠느냐?
‘스승님’ 하고 부르면 모든 사람이 쳐다보는 걸 좋아하는 서기관, 그런 성도는 구원이 안 되는 것이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신령천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다. 외식자는 없다. 왜? 그런 속성적 성품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또 본문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긴 옷을 입고 외식적인 마음을 가지고 회당 즉, 집회장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귀빈석에 앉기를 좋아한다. 시장의 거리에서도 자기 피알이더니, 회당에서도 대우받고 문안받기를 좋아한다. 세상은 원래 그것 곳이고, 세상은 그런 맛으로 사는 거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외식에 속하지를 않는다.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시다.
집회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자기 피알, 나가도 자기 피알 들어가도 자기 피알, 올라가도 자기 피알 내려가도 자기 피알.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그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구나. 얼마나 자기 피알을 하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발도 넓고, 자기 얼굴을 나타내려고 가만있지를 못한다.
외식은 이방세상과 똑같은 거다. 안 믿는 사람의 정신과 똑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깎아내리는 소리를 하면 악이 팍 올라서 자기 마음을 못 다스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천국에는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성분은 미리 뽑히니까.
성도는, 주님의 종들은 종노릇을 똑바로 하고 있으면 자기를 올려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등잔에 불만 켜졌다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등잔을 등경에 올리듯이 말씀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불면 켜이면 성령님이 그 사람을 올리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런 사람을 올리신다. 그러니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지 말아라. 목사님들 세계에도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외부적 조건을 보고 자기가 올라가려는 것은 안 된다. 성경에 보면 모세나 사도바울이나 다니엘 같은 분은 자신이 외부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이 있어도 스스로 내려간다.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려는 그 정신을 다 뽑고, 뽐을 즈음에 알아서 올리신다. 그런데 이런 목회자가 거의 없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들은 전부가 외식자들이다. 외식자들은 세상정신을 갖고 있고, 성경해석도 세상에 맞춰서 하니 그런 교훈을 받는 교인들은 세상화 되게 된다. 그러니 그런 교회에는 마귀가 판을 치게 된다. 어쨌든 우리 기독자들은 교만을 떨다가 하나님에게 찍히지 않도록 겸손해야 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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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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