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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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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823) 2016. 3.28 |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삶 (마가복음 16장 1-8절)
< 사람을 종합적으로 보십시오 >
인생의 성패는 단기간의 성취나 외적인 모습으로 판명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판단할 때는 늘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를 굳이 마다하지 마십시오. 높이 올라가면 전체를 보는 시야가 생기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과 실력을 끊임없이 배양해 높이 올라선 후 종합적인 시각도 가지고 동시에 겸손함도 잃지
마십시오.
옛날에 부흥사들은 인기가 대단했지만 그 인기는 내용적으로는 부실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개 부흥사들은 10-20편의
설교를 계속 반복하면서 집회를 인도합니다. 무디 목사님은 딱 9편의 설교로 평생 백만 명을 전도했습니다. 왜 요새 그런 부흥사들의 전성시대가
저물었습니까? 인터넷을 통해 부흥사들이 이전에 했던 똑같은 설교들을 미리 다 볼 수 있으니까 맥이 빠지면서 부흥회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같은 설교를 계속 하면서 생기는 능숙함으로 웃기고 울리면 성도들이 은혜 받았다고 여기니까 인기가 있어서 옛날에는 부흥사
집으로 여자 성도들이 전화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모님! 훌륭한 남편을 두어서 좋겠어요.” 그러면 사모는 “네, 그래요.”라고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을 칩니다. “어휴, 이 속을 누가 알아.” 부흥회 설교만 들으면 그 부흥사가 최고 같지만 실제로 부흥회 설교대로 살지 않는 남편
모습에 사모들이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는 이면의 모습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보지 못할
때 좋은 점만 보면 그나마 낫습니다. 나쁜 점만 보고 그것만 언급하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하나만 보고 좋고 나쁜 것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십시오. 어떤 장점을 보고 결혼했다가 다른 단점을 보고 후회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 나쁘다고 너무 나쁘다고 하지
말고 하나 좋다고 너무 좋다고 하지 마십시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면서 장점은 격려해주고 단점은 가려주십시오.
사람들은 다
삭개오를 인색한 매국노로 봤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있는 자비심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욕했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있는 순수함을 보았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해 마리아는 점차 성녀로 변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이 다 도망쳤어도
그녀는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고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위대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볼 때 전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어제의 자신’과 ‘내일의 자신’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으면 얼마든지 인생 반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런 반전의 역사를 꿈꾸십시오. 얼마든지 자신도 예수 믿고 인물 될 수 있다고
믿고 기도하고 준비하십시오.
<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삶 >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성도는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늘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반전의 역사를 꿈꾸십시오
부활절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처음 갔던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습니다(1절).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제일 먼저 자신을 보여주신 대상은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9절).
그녀는 로마 군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도 제일 먼저 찾았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반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름과 재능이 있는 자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 중에 쓸데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연히 현재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에 대한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살면서 인생 반전의 역사를 꿈꾸십시오.
다만 인생 반전의 역사를 꿈꿀 때는 늘 인생 반전의 역사가 십자가를 지려는 삶에서 시작됨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집사자의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부활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에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은 그 상황에서도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탐하고 십자가의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무엇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실까요? 십자가를 생략하고 부활의 역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자기를 죽이라! 자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자기를 드리십시오. 믿음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부활의 열매로 드러날 것입니다.
2. 힘써 주일을 지키십시오
예수님이 언제 부활하셨습니까?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새벽이었습니다(2절).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만 기독교에서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예배하고 안식하는 날로
지킵니다.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주일을 지키는 사람도 부활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면서 자녀와 가정과 사업과 인간관계가 살아나고 꿈과 비전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주일을 힘써 지키는 것은 믿음생활의 제일 기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고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산다는 반증입니다. 사람에게 주일을 지키는 영적 브레이크(brake)가 없으면 사람은 욕망을 향해 달려가다가 반드시 망합니다. 살면서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 필요하듯이 브레이크 데이(break day)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일 예배시간을 아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시간은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또한 가장 위대한 자녀교육도 주일성수 교육입니다. 주일예배 말씀을 통해 자녀들이 참소리를
들으면 잔소리를 많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녀를 인물로 만들려면 주일을 힘써 지키게 하십시오. 요새 학원 때문에 주일을 빠지는 학생이
많습니다. 주일학교 자리를 주일학원에 내주지 말고 “너의 주일성수가 엄마의 유일한 소원이다!”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렇게 주일을 힘써 지키면
하나님과 성령님이 그 영혼과 인생과 앞날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3. 지금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여인들이 무덤에
왔을 때 흰 옷을 입은 청년처럼 보이는 천사가 말했습니다(6-7절). “너희가 예수님을 찾는구나!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빨리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뵙도록 하라.” 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 지역은 가나안 땅의 최북단 지역으로 우리나라로 말하면 두만강 인근쯤 되는 소외된 비천한 지역이었습니다.
화려한 성도인 예루살렘에서 만나거나 혹은 예루살렘 인근 마을 중 예수님의 12제자 외에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한 베다니에서 만나면 더 좋은데 왜
그토록 먼 갈릴리 지역까지 가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서 거기서 만나자는 것은 첫 사랑을 회복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매년 부활절이 되면 늘 새겨들어야 할 음성이 바로 “첫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하라!”는 음성입니다. 아무리 힘든 장벽과 시련이 있어도 찬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늦었다고 하지 말고 나이 탓도 하지 말고
환경 탓이나 자본 탓도 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시작하면 반드시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살면서 고난과 문제가
주어지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먹고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싸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이 있으면 그때 뭔가 새롭게 할 일을 찾아 다시
시작하십시오.
4. 실력과 능력을 갖추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화려한 예루살렘 대신 소외된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한 것은 소외된 사람을 살피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보살펴주는 삶을 잘 살려면 힘과 능력과 실력과 권세와 물질도 힘써 얻어서 그것을
겸손하게 잘 활용하면 좋습니다. 성도는 불신자에게 우습게 여김을 받지 않을 정도로 실력과 능력을 갖추려고 해야 합니다.
있는
사람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불의한 사람을 무릎 꿇릴 힘이 있으면서도 불의를 깨닫게 한 후에는 다시 관용을 베풀어준다면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즐거워하라는 말은 학대 받는 것으로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스트가 되라는 말도 아니고 불의한 공격을 무조건 참아서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알도록 방치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우습게 알지 않도록 불의에는 담대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때도
성도다운 마음과 태도와 정신만은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르고 존경스럽게 지길 원하면 더욱 실력과 능력과 힘을
기르십시오. 힘이 있고 돈이 있어도 없는 척 하면서 거룩한 비전을 위해 헌신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없어도 뜻을 세우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 희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과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설 자리와 비빌 언덕과 기댈 배경이 되어주면 더욱 감동적인 부활의 역사가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이 되겠습니까?
< 부활의 믿음으로 사십시오 >
교회 다니는 한 착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왕초 학생의 집요한 괴롭힘을 받는 왕따 학생이었습니다. 왕초 학생은 왕따 학생이 교회를 다니는 착한 아이인 것을 알고 더 괴롭혔습니다.
때로는 사소한 일까지 시켰습니다. “야! 이 컵에 물 담아와!” 그러면 왕따 학생은 “응! 알았어!”라고 컵에 물을 담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왕초 학생이 화가 나면 소리쳤습니다. “야! 머리 박아!” 그러면 왕따 학생은 순순히 머리를 박았습니다.
나중에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너무 분노해서 “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 왕따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두려워서 그랬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남을 뒤에서
험담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고 참으라고 가르쳤잖아요?” 그 학생은 십자가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지 ‘우습고 어리석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격자들이 어떤 잘못을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지도 않고 무조건 억울하게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십자가를 바르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격자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우습게 알도록 그냥 방치하지 마십시오. 피해를
당해도 불의하고 우습게 당하지 말고 의롭고 존경스럽게 당하십시오. 공격자들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주지 못하고 어리석게 당하기만 하면 불신자들은 더
하나님과 교회를 우습게 알고 불의하게 날뛰면서 더 망하는 길로 갑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면 십자가를 지는 인물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피해자만 나오게 됩니다.
나쁜 왕초 학생이 나쁘게 대하면 용기 있게 맞대응하고 그래도 두려우면 반드시 부모님과
선생님께 알려야 합니다. 그때 그 왕초가 “너 알리면 큰일 나!”라고 위협하면 그 위협한 것까지 알려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과 학교가 난리가
나면서 왕초 학생이 벌을 받습니다. 그때 무서운 아버지와 선생님이 그 왕초 학생을 왕따 학생 앞으로 끌고 와서 무릎 꿇리고 “얘야! 네가 당한
만큼 속 시원하게 갚아줘라!”라고 할 때 무서워서 벌벌 떠는 왕초 학생을 품어주고 “친구야! 다시는 그러지마!”라고 하면서 용서해주는 것이 진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누군가의 폭력으로부터 비참하고 억울하고 불의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불의한 폭력에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길을 찾고 힘을 기르고 지혜를 발휘하십시오. 십자가는 ‘불의하고 비참하게 피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깨닫게 하고 존경심을 주면서 희생당하는 것’이고 더 차원 높은 십자가는 ‘의를 이루고 선한 변화를 이루려고 힘이 있으면서도 희생당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진 십자가가 영혼을 구원하고 바른 길로 이끌고 하나님에 대해 마음 문을 열게 합니다.
무지와
두려움으로 잘못된 십자가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면 부활의 역사는 고사하고 인생과 사회는 더 망가지는 길로 갑니다. 그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착하되 때로는 선한 결기도 보이십시오. 그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도 마십시오. 온유하되 때로는 거룩한 분노도
표출하십시오.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당해도 그 당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선한 변화를 이루려고 하고 믿음의 능력과 영혼의
힘을 무언으로 보여주십시오. 죽음을 극복한 부활의 능력을 앞세워 살면 얼마든지 그런 힘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제일 무서웠던 것 중의 하나가 공동묘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유령이 떠돌면서 금방 공격해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부활의 믿음이 생기면서 공동묘지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죽어 문드러진 시체를 발견하면 그 죽은 사람이 무섭습니까? 사람이
죽어 문드러지면 잠깐 소름끼치게 보이기는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하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보다 골목에서 담배 꼬나문 산
사람과 길에서 자동차를 험하게 모는 산 사람이 훨씬 무서운 사람입니다.
헛된 실체를 두고 마음으로 먼저 지지 마십시오. 귀신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귀신은 성도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도 너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때가 되면 성도는 완벽한 몸으로
부활해 완전체로서 생각의 속도로 우주를 자유자재로 왕래하고 만끽하며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찬란한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항상 부활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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