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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열왕기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63 추천 수 0 2016.08.03 22: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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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하5:1-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8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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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왕하 5:1-14,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2016년 7월3일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오늘 우리는 구약성경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 초자연적 기적 사건을 가장 많이 일으킨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로 가보겠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살던 시대는 기원전 9세기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인 엘리야와 엘리사는 선지자 학교의 사제지간으로서 엘리야가 죽은 다음에 엘리사가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오늘 제 1독서인 왕하 5:1-14절에는 선지자들에 얽힌 일반적인 이야기와는 색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나아만이 군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아람은 이스라엘의 적대 국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아만을 크게 쓰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지 나아만이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을지는 불을 보듯 훤합니다. 그게 잘 안 됐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를 시중드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일 때 사로잡혀온 이스라엘 아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인데도 열왕기 기자는 그런 내색도 없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소녀가 여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님, 장군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찾아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텐데요.’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몸종인 이스라엘 소녀를 평소에 믿을만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안주인은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했고, 나아만은 다시 왕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 한번 다녀올 테니 허락해주십시오, 했겠지요. 큰 모험입니다. 적국의 수도에 가겠다는 거니까요. 왕은 허락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도 지참하게 합니다.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챙겨서 출발했습니다. 큰 돈입니다. 수행사절단의 규모도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6절에 따르면 왕의 친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보낸 이유는 엘리사 선지자가 왕궁 소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친서를 받아본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아람 왕이 요구했다는 것은 전쟁의 빌미를 찾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왕궁에서 벌어진 소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을 왕에게 보내서 걱정하지 말고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면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자기가 고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 집 문앞에 섰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본 그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을 겁니다. 아람의 국방장관, 또는 국무총리 쯤 되는 사람이니 그를 대동한 호위 군사들이 많았을 겁니다. 가령 스무 명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오가는 중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야 하니, 더 많은 수행인원들이 거기에 있었을 겁니다. 당장 엘리사가 뛰어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심부름꾼이 나와서 엘리사의 말만 나아만에게 전합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씻으십시오. 그러면 피부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찼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11,12절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나아만의 아랫사람들이 흥분한 나아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언을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더 어려운 처방을 내렸어도 그대로 따랐을 거 아니냐, 그런데 강물에 씻기만 해도 된다는 처방을 내렸으니 따르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밑져야 본전 아니냐고, 화를 내더라도 일단 그의 말을 따른 다음에 하라고 말입니다. 나아만의 처지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는지, 아니면 평소에 부하들의 말을 잘 들었는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는지, 나아만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갔고, 피부가 회복되어 어린아이의 살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곱 번 몸을 잠갔다는 게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일주일인지, 또는 일주일에 한번 씩 들어가서 총 49일 동안 요단강 부근에 머물렀는지는 성경이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피부병이라는 게 물과 흙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온천욕을 잘 하면 치료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1 독서는 여기까지만 전하는데, 그 뒤를 따라가면 이야기가 좀더 진행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아람을 출발할 때 바리바리 싸들고 온 예물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병이 나았으니 고맙기도 하고, 그래야 자기 체면도 서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예물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아만은 사마리아 흙을 싣고 자기 나라로 가서 여호와 외의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만 왕궁에서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 아람 왕이 섬기는 림몬 신당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여호와께서 그런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엘리사-나아만 이야기에서 주도권은 분명히 엘리사에게 있습니다. 엘리사의 카리스마는 나아만을 압도합니다. 나아만이 수행비서와 경호부대를 이끌고 엘리사 집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엘리사가 보인 태도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대담했습니다. 이왕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쳐줄 마음이 있었다면 상대가 무안을 느끼지 않게 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나아만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서 따뜻한 차를 한잔 대접하면서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일행 중에 아픈 사람은 없느냐. 낯선 곳이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편안히 지내라.’ 하는 덕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민망할 정도로 냉정하게 엘리사는 나아만을 대했습니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서 다행스럽게 병이 치료되었고, 나아만은 여호와 신앙을 안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사의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을 통치하는 유일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믿음의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중에서 여러분은 몇 사람이나 아는지요?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미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들만이 아니라 그 이외에도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 활동을 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문서로 자신의 설교를 남긴 사람들입니다. 앞의 선지자들이 활동한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 사무엘서나 열왕기처럼 전기선지서이고, 뒤의 선지자들의 설교를 모은 성경이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호세아처럼 후기선지서입니다. 선지자들로 인해서 유대교는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특성은 ‘신탁’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비밀한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1절을 보십시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사야는 세상의 그 어떤 권위에도 굴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왕이나 제사장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탁의 권위에 근거해서 선지자들은 왕, 왕족, 귀족들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국가 정책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왈가왈부했습니다. 왕과 거기에 딸린 이들이 정책을 잘못 세우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없었다면 유대교는 왕의 기분만 맞추는 어용종교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대개의 다른 고대 종교가 어용의 길을 걸었지만 유대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들로 인해서 어용의 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전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게 하는 데에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런 선지자 전통에 서 있는 인물로 여겼습니다. 마 16:13절 이하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14절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이들이 다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봅니다. 이슬람교도 역시 예수님을 선지자로 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높이 평가한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선지자 전통에 서 있는 게 분명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병 고침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 유명한 베드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에 있는 전통입니다. 이런 고백에 따라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말하는 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는 설득력이 더 큽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이 요구하는 인물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그들의 삶을 새롭게 이끌어갈 수 있는 선지자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특별한 카리스마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적군을 물리치는 인물이 나온다면 모두가 그를 따를 겁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감동적으로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세상은 필요로 합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소위 멘토들에게 몰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개혁할 수 있는 운동가를 필요로 합니다. 정치, 사회, 교육, 종교 차원에서 그런 개혁적인 인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전인교육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교사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교사는 선지자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정당한 법적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변호사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들도 역시 선지자로 살고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예수가 바로 그런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도에서도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분명히 선지자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나타나지만 선지자로 믿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의 존재로 믿습니다. 세상이 그걸 받아들이든 않든 상관없이 그렇게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도 하고, 돈벌이도 하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60, 70년대 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훨씬 잘 살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정치적으로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이런 결실을 맺었습니다. 상투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이런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외형은 풍족해졌지만 실제로 삶의 질도 똑같이 좋아졌을까요? 좋아졌다고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렇게 기를 쓰듯이 노력해서 뭔가를 이룩하기는 했지만 남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보다 좀더 건전하게 사회를 발전시켜온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지금 대통령 예비 선거로 말들이 많습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공화당 후보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찬성으로 결정되자 멘붕에 빠졌습니다. 굳이 이런 특별한 현상을 짚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한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온갖 방법과 수고를 다 기울였는데도 근본에서는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습니다. 종교도 이런 부분에서 결정적인 해결책은 못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종교인 유대교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라는 체제 자체가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일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끝납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즉 우리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농사를 보십시오. 현대과학은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앞으로 천년만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행성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 앞에서 우리는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는 통찰과 믿음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문제를 개인의 삶으로 옮겨서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인생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 자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어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내도 염려와 긴장과 조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 결정적인 것은 우리의 삶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우리 삶에 개입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의 존재이신 예수님은 말씀과 행위와 운명으로 증언하시고 증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휩싸여 현재의 삶을 염려가 아니라 기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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