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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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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83520 |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성령강림후 여덟째 주일, 2016년 7월10일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2)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오늘 우리는 제2 독서로 골로새서를 읽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몸으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1:1, 2절은 정중한 인사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쓴 걸로 나옵니다. 2천 년 전 당시에는 편지를 쓴다는 게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불러주고 제자 격인 디모데가 파피루스에 받아 적었을 겁니다. 편지는 각별한 용무가 있을 때 씁니다. 바울에게 그 용무는 골로새 교회에 발생한 어떤 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가 2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교회 안에서의 속임수
골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교묘한 말로 골로새 교인들을 속이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교회를 허물어뜨리려고 작정한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신자들보다 더 열정적이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들은 복음 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복음 외의 것에 한눈을 파는 신앙 행태는 결국 복음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을 ‘교묘한 속임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유대교 전통을 소중히 여기자는 사람들도 있었고, 거꾸로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복음에 더 충실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후자에 속합니다. 갈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바울이 비판한 ‘다른 복음’은 할례파의 주장을 가리킵니다. 할례파는 복음의 능력으로 살지만 유대교의 할례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바울은 골 2:8절에서 교묘한 말로 속이는 사람들을 다시 비판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이어서 설명합니다. 11절은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를 언급합니다. 지금이야 이런 문제가 신학적으로 다툴 게 못되지만 당시에는 아주 첨예했습니다. 바울은 손으로 행하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영적인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16-18절에서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절기, 초하루 지키는 문제, 안식일 문제, 천사숭배 등등입니다. 23절에는 금욕과 자학 행위 등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것도 있고 이방 종교 및 철학 전통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들이 골로새 교회에 팽배해졌습니다.
왜 골로새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복음에만 마음을 두지 못하고 유대교 전통과 당시 철학인 피타고라스의 원소설에 근거한 여러 규례와 절기에 매달린 것일까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신앙으로 세상살이를 다 해결할 수 없어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만한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토착 종교인 바알숭배를 따랐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풍요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도 섬기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일종의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골로새 신자들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헛된 속임수라고 일갈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에도 역시 골로새 교회에서 벌어졌던 헛된 속임수들이 되풀이 됩니다. 술 담배 문제는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주장되었습니다. 개인의 기호에 불과한 것을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절기 문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력을 중심에 두는 것은 옳지만 절기 자체가 율법처럼 절대화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의 절기는 대개는 헌금과 연결됩니다.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이 다 헌금을 하는 절기로 한국교회에 자리 잡았습니다. 십일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일천번제라는 헌금도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가 천사를 숭배했다면 한국교회는 미신을 숭배합니다. 축귀 신유 집회가 기독교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부흥회 때 복 받기 위해서 단체로 안수를 받습니다.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금욕과 자학을 신앙생활인 것처럼 수행했는데, 한국교회도 금식기도를 종교 행사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회 프로그램도 지나치게 많습니다.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종류도 지나치게 많습니다. 신자들은 큐티도 해야 하고, 전도도 나가야 하고, 사회시설에 봉사도 가야하고, 단기선교도 나가야 합니다. 관현악이 수반되는 장엄한 성가대를 꾸려야 합니다. 이런 조직과 행사가 활성화되어야만 부흥하는 교회, 믿음이 있는 교회로 인정받습니다. 이런 것들이 몽땅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취사선택해야겠지요. 다만 교묘한 속임수라고 바울이 표현한 것들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교묘한 속임수에 솔깃해하는 것은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라고 두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8절은 앞에서 짚었고, 2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바울은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대비합니다. 이 관계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에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동시에 세상의 규례를 따르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너무 엄격하다고, 그렇게 살려면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여러분이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건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절기와 규례는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골 2:23)입니다.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간단한 예로, 지인들의 결혼식 등을 다 챙기는 게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피곤하지 않나요? 그런 규례는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의 허영심을 제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세상 절기와 규례를 따르는 것은 뒤섞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삶의 모양만 다른 게 아니라 실질 내용이, 즉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신분의 변화
바울은 왜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삶의 근본이 실제로 바뀔까요? 바울은 골 1:13,14절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두 가지를 말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어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2) 우리는 아들 안에서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흑암의 권세는 단순히 겉으로 나타나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더 나가서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허무와 절망과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면 그게 흑암의 권세에 놓인 겁니다. 이에 반해 아들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 생명은 죄 사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죄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을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행태들은 죄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봐도 잘못이 아닙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힌 것도 결국 자기 삶을 자기가 성취하려는 유혹과 욕망 때문입니다. 그런 절기와 규례를 지키면서 뭔가 성취감을 느낍니다. 죄 사함을 얻었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일상을 비유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면 돈벌이의 짐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우리가 나무처럼 흙과 물과 햇빛과 탄소만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금의 삶이 완전히 바뀌겠지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으니, 또는 돈이 적으면 불안하니 원하지 않는 돈벌이에 자기 인생을 어쩔 수 없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걱정하느라 인생이 다 흘러갑니다. 여전히 흑암의 세력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게 분명한데, 바울은 무슨 근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이게 실제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그러려니 할 뿐입니까.
자신이 흑암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을 겁니다. 지난 수요공부 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확실한 변화가 단숨에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행 9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기독교인들은 그걸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닙니다. 오랜 과정을 통해서 율법 신앙으로부터 복음 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의 이 회심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의 특별한 현상을 말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흑암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사실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천천히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테니스 라켓을 손에 들었다고 해서 금방 코트에 들어가서 게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서 볼을 치는 감각을 익혀야만 게임에 들어갈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가 일어나는 교회마다 편지를 써서 신앙적인 레슨을 한 겁니다. 문제는 테니스 동호인들 중에서도 실력을 쌓는 것에는, 즉 테니스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게임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생활에서도 신앙의 성숙과 심화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교회생활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골로새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호기심만 자극하는 초등학문에 머물게 되고, 그런 과정이 길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신앙의 왜곡과 변질의 길을 갑니다. 초기 기독교에 그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생명의 나라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말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죽음의 세력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나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니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 노력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데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 다른 이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상식에 속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나의 생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다른 데서 찾습니다. 다른 데서 찾아봐도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습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보지만 그것도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평생 불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든지, 그런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열광주의라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깁니다. 성경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 즉 우리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완성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 생명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유를 먹는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전적으로 신뢰하듯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면 그는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것은 이방인들이 취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니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요 11:25,26).
혹시나 해서 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잘 먹고 잘 산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가 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그렇지 못할 때나 특별한 것이지 이미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일상성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지금 우리교회를 보십시오. 예배 처소가 지하래서 장마 때는 불편한 게 많습니다. 최상의 조건이 갖추어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입니다. 그런 조건이 채워지면 다 시시해집니다. 지하 묘지인 카타콤 같은 곳에서 모이더라도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생명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허락하는 선물입니다. 골로새서를 비롯해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사실 외에 이 세상살이에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사실이 더 있습니까? 그게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실제로 생각하는 분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흑암의 권세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댓글 '1'
코리도라스
맞습니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은 그런것 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처럼 술과 담배를 절제시키지 않고서 세상 사람들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 질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예배후에 교회 앞마당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고 싶으십니까? -실제로 일부 성당에는 재떨이가 구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용섭 목사님께서 비판하시는 일반적인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술과 담배를 금하는 이유가 그것이 신앙의 근본이며 전부로 판단해서 그렇다는 주장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흰옷을 입고 연탄창고에 들어가는것은 바보짓 아닐까요? 그런 이유의 연장선에서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술,담배를 금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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