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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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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86378 |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성령강림후 열번째 주일,
2016년 7월24일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은 평소에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시는지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간단하게나마 기도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그렇게 기도하는 분들은 많을 겁니다. 밥 먹을 때도 일용할 양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겁니다.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가톨릭교회에도 여러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묵주기도나 마리아 기도 등등이 있어서 일상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이슬람교도들도 하루에 서너 번씩 성지인 메카를 향해서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이게 전통이지만 현대 지성인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지성인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게을리 하거나 무관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해당되는지 점검해보십시오.
한 가지는 기도 없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 무슨 사고가 일어나는 게 확실하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를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한번 빠진 날은 왠지 마음이 불편한 겁니다. 이런 생각은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이런 게 심해지면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을 비판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거꾸로 일종의 기도 냉소주의에 떨어집니다. 기도와 자기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를 성숙한 사람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을 현실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와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가 크게 부족하다고 합니다. 한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서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대화하고 싶으신가요? 뭔가 통하는 사람이겠지요? 그 대상이 선생이든지, 친구이든지, 사랑하는 연인이든지 불문하고 서로 통하는 게 있어야 대화하고 싶어지고, 그 대화가 깊어집니다. 대화의 대상을 자기 삶에서 소중한 현실로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기도드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오늘 제3독서인 눅 11:1-13절에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예수님에게 요구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에는 각종 기도 전통이 있었습니다. 회당에 모인 회중들은 찬송과 기도를 바쳤습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은 다 유대교의 기도문이라고 봐도 됩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유대교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고, 세례 요한도 그런 전통을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이르면서 우리가 보통 ‘주기도’로 알고 있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면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또는 전통적인 기도 형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나름으로 이미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앞에서 저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등한히 여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이라는 말은 입에 달고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기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기 인생에서 뒷방 늙은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기도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고 가장 신뢰할만한 대상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토대라고 말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기도는 불가능하고, 형식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깝고 신뢰할만한 대상으로 경험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현실성’(ultimate reality)이라고 표현했고, 판넨베르크는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분에게만 우리는 기도드릴 마음이 날 뿐만 아니라,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다음에 무엇을 기도할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깊은 통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궁극적인 현실성이며,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고,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십니다. 좀더 익숙한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고, 생명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과 하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생명을 왜곡하지 말라는 말은 동일한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생명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자본이 더 섬김을 받습니다. 기업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는 말이 기업 논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의 교육계는 정말 학생들을 살릴까요? 학생들의 인간다움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 교육은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대구인근의 성주군이 사드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사드(THAAD)는 고도도 마사일 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를 가리킵니다. 적군이 쏜 미사일을 높은 고도에서 격추하는 최신 무기라고 합니다. 얼마 전 국방부는 사드를 성주군에 배치하기로 미군 당국과 결정했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밀양, 칠곡 등이 거론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주로 발표가 났습니다. 군수와 군의원들과 도의원들, 그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전체 군민들이 반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군청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으며, 지난 21일에는 2천명 이상의 군민이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드 배치 문제는 아주 복잡한 군사적이고 외교적인 차원이라서 제가 설교 시간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북한의 미사일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결정된 사드 배치가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와 북한을 압박하던 국제 공조가 와해될 우려가 크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국제 공조로 점점 코너로 몰리던 북한 김정은 체제의 숨통을 터준 거라고 보는 국제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유사시 사드가 있는 성주는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고, 인근의 대구도 그 위험을 각오해야합니다. ‘사드 없이 북한의 미사일을 어떻게 방어 하냐? 이게 안보를 위해서 최선이다.’ 하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현재 정부의 생각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남북 군비경쟁의 와중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왜곡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울은 롬 12: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이 말씀을 외교나 군사전략 문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즉각적 징벌 윤리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둘째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는 이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메시지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행위와 그의 운명이 여기에 직결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자기들이 뭔가를 세워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거기에는 바람직한 일도 있고,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아예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직한 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자체는 아닙니다. 모든 선하고 바람직한 일들도 하나님의 통치에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의 위선과 욕망과 거짓이 득세하지 못하는 세상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재림공동체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않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분이라면 주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고, 드릴 마음도 없을 겁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앞의 두 가지보다 이 세 번째가 실질적인 기도로 다가옵니다. 사람에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은 필요합니다. 가정을 책임진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구해 와야 합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린다는 명분으로 가족의 양식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지 양식의 독점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만을 구한다면 굶주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었습니다. 만나입니다. 그런데 만나를 거둘 때는 반드시 가족이 하루 먹을 양만 거두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거두면 그 남은 것들에 벌레가 들었습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성찬식을 보십시오. 우리는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인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믿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나뉘고 분배되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서로 나누는 영성을 거기서 배웁니다. 지금 여기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는 일용할 양식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굶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아니라 평생의 양식을, 대를 이어서 먹을 수 있는 양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이 사회는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불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거액을 탈세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합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네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인 불법, 부도덕, 불의, 폭력 등입니다. 근본적으로 죄는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이고, 자기 연민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행태들이 나옵니다. 본문에 죄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의 번역인데, 호바는 죄라는 뜻만이 아니라 각주에 나와 있듯이 빚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채무자들의 채무를 탕감해준 것처럼, 탕감해준 것만큼, 이미 탕감했으니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경제윤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채무자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장 돈이 필요해서 겉옷을 저당 잡힐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희년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50년이 될 때 노예들도 자유를 얻게 되고,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 세상에 경제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 네 번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극에 달한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초대형교회는 예배 때 주기도를 빼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시험에 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마귀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봐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온 세상의 영광을 줄 테니 마귀 나에게 절하라.’ 까미냑이라는 신학자는 ‘시험에 들다.’는 말이 ‘시험을 당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험에 굴복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시험에 굴복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사람은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힘들어질 수는 있으나 거기에 굴복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기도를 가르치신 뒤에 예수님은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사실을 5-13절에서 실감나게 설명하셨습니다. 유명한 구절이 9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철없는 아이가 떼쓰듯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게 기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기도가 남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천만 원 십일조 할 수 있는 사업가가 나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립니다. 마 6:3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주기도의 다섯 항목입니다. 이것을 구하면 하나님은 주실 것이며, 이것을 찾으면 찾게 될 것이고, 이것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실제로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십니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기준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는 단순히 기도라는 종교 형식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삶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삶의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즉 생명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인간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려야 합니다. 3) 하루치의 양식에 만족하고, 다른 이들의 양식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4) 죄와 빚이 탕감되는 세상을 희망하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5) 시험에 들 수는 있지만 거기에 굴복은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즉 삶의 내용으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은 반드시 응답받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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