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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계16:1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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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834) 2016. 4.25 |
비방보다 회개를 앞세우십시오
(요한계시록 16장 17-21절)
< 계산보다 사랑을 앞세우십시오 >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아는 것’은 힘이지만 ‘잘못 아는 것’은 짐입니다. 또한 ‘아는 것’은 힘이 되지만 ‘아는
척’은 짐이 됩니다. 잘 알면서 실명으로 조심스럽게 하는 비판은 유익이 되지만 잘 모르면서 익명으로 상스럽게 하는 비방은 유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의로운 것’은 귀한 것이지만 ‘의로운 척’은 천한 것입니다. 내가 탑을 쌓기보다 남이 쌓은 탑을 무너뜨리면서 자기를 높이려고
의로운 척 하면 칭찬과 격려와 인정에 인색해지고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시인을 비난했습니다.
“왜 시를 써서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듭니까?” 얼마나 황당한 논리입니까? 그런 식으로 컴퓨터 개발자를 “왜 컴퓨터를 만들어 사람의 대화를 막고
비인간화를 조장합니까?”라고 비난하고, 자동차 개발자를 “왜 자동차를 만들어 사람 다리를 약하게 만듭니까?”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을 “왜 나눠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듭니까?”라고 비난한다면 정상이라고 하겠습니까?
가끔 저희 사역자들이 이런
항의전화를 받습니다. “왜 설교파일을 만들어 보급해서 목사님들의 설교준비를 게으르게 만듭니까?” 본인은 의로운 말을 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말이
의로운 말일까요? 왜 은혜의 수단이 되고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할까요? 자기 의에 젖어 사물과 상황의
부정적인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것’과 ‘의로운 척’을 구분하지 못하면 혼란과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자칭
의인이 어떤 제품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장로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치며 정죄했습니다. “아니, 기독교 장로가 공짜로 물건을 나눠주어야지 왜 물건을
팔면서 이익을 남깁니까? 이웃사랑도 배우지 못했습니까?” 언뜻 들으면 이웃사랑의 화신 같지만 이웃사랑은커녕 사람들이 정신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성스런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될까요? 예를 들어, 그 자칭 의인이 성경이나 말씀이 담긴
경건서적을 파는 장로에게 이렇게 소리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장로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이나 경건서적을 공짜로 그냥 나눠주지 않고
어떻게 팝니까? 말씀을 파는 것은 예수님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영성이 있는 말 같지만 영성은커녕 보통 상식에도 어긋난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의 없지만 간혹 있습니다. 은혜를 공짜의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그렇게 불의를 정의인 양 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정당한 땀의 대가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나 정죄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내세워 남의 열매를 공짜로 취하려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 잘못입니다.
미국 텍사스에 한 흑인 목사님이 있습니다. 열정이 대단하고
통찰력 있는 말씀도 많이 전하고 방송설교와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분의 주일설교는 바로 CD로 제작되어 판매되는데 25분
분량의 4주 시리즈 설교가 80불 정도 합니다. 설교 4-5편을 들으려고 10만원을 지출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또한 유튜브를 통해 그분
설교의 일부도 찾아볼 수 있는데도 과연 주문자가 있을까요? 꽤 많이 있습니다.
왜 그 공동체는 몇 편의 설교 CD를 그렇게 비싸게
받을까요? 아마 방송국 운영비용도 필요하고 몇 십 명에 달하는 사역자 사례비 등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CD 판매 수입으로는 전체 사역
운영비에 큰 보탬이 안 될 것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선교사역은 은혜 받은 자의 헌신과 후원이 없으면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운영비에 큰 보탬이 없는 설교 CD를 판매할까요? 그 수입도 사역을 지속시키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 CD를 가치
있게 여기는 성도들과 방송선교 사역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은혜 받은 성도들에게 헌신과 후원에 동참하는 통로로 CD 판매를 활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진 재정을 선교사역에 잘 쓴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실제로 그 CD를 구입하는 사람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와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의미’로 고가로 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랑과 헌신과 동참과 나눔의 원리도 모른 채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원가 5불도 안 되는 설교 CD를 목사란 사람이 그냥 나눠주지 않고 어떻게 80불에 팝니까? 가룟 유다같은 불의한
목사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오히려 가룟 유다같이 행동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자신은 사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그냥 공짜로 주지 않느냐?”고 자기 의에 빠져 정죄의 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면 2천 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 마리아가 자기 마음을 드리는 표시로 곧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의 발에 300데나리온(당시
300일 노동자 품삯)의 향유를 부었습니다(요한복음 12장). 그 모습을 보고 가룟 유다가 “왜 그 고가의 향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분노했습니다(4절). 언뜻 보면 가룟 유다가 아주 정의롭게 보이고 이웃사랑과 긍휼의 화신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자기 것을 드리는
것도 아니면서 남의 땀과 눈물과 사랑과 헌신이 담겨 드려지는 물질에 대해 정의를 논하는 모습이 바로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 가룟 유다의 사람됨이 금방 파악됩니다. 첫째, 그는 탐욕스럽고 돈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의를 내세워 남을 선동하면서도
정작 자기 헌신은 없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는 자기성찰은 없고 남 책망만 잘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그는 시기심에 젖어 남의 헌신을 깎아내리는
선수입니다. 다섯째, 그는 은혜와 사랑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 받고 팝니다. 가룟 유다는 입으로는
이웃사랑의 화신처럼 말했지만 불의를 의로 착각하는 ‘의인착각성 정죄증후군 환자’였습니다.
아무리 옳은 주장도 한 가지가 빠지면
옳은 주장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 한 가지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빠진 정의는 정의 구실을 못합니다. 계산적인 재정운용도 필요하지만
믿음생활에서는 ‘계산’보다 ‘사랑’을 앞세워야 합니다. 계산적인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기에 마리아의 사랑의 헌신이 낭비로
보여 정죄한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가룟 유다의 정죄가 이해할만하다고 여겼지만 1984년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한
후부터는 낭비처럼 여겨질 정도의 헌신이 아픔이 아닌 기쁨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랑과 기쁨을 모르면 선교는 불가능합니다. 이제 이런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하나님! 저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게 하셔서 많이 선교하고 나누는 이웃사랑의 큰손이 되게 하소서!”
사랑의 헌신은 아름답지만 헌신도 없이 의를 내세워 비방소리만 높이는 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 비방보다 회개를 앞세우십시오
>
본문은 비방보다 회개를 선행시켜야 함을 도전합니다.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천사가 공중에 대접을 쏟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와 함께 역사상 최대의 지진이 생깁니다(17-188절). 그 대지진은 소행성의 충돌이나 수소폭탄의 폭발이나 거대한 화산의 폭발 등으로
인해 생긴 지진일 것입니다. 그 결과 지구가 불바다가 되고 ‘큰 성’으로 표현된 적그리스도 정부의 수도와 ‘만국의 성들’로 표현된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던 나라들이 파멸되고 각종 섬과 산악도 사라져버립니다(19-20절).
그때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한 달란트는 34.27킬로그램입니다. 30킬로그램이 넘는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묘사는 아마 거대한 화산 파편이나 유성우나
무수한 폭탄이 무수히 떨어지는 장면이 사도 요한의 눈에 큰 우박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처럼 세상 곳곳이 불바다가 되고 처참하게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합니다(21절).
징계와 목적은 회개인데 징계 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회개 대신 비방을 앞세우면 더욱 파멸에 처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도 시련이 닥치면 일단 그때를 회개기회로
활용하십시오. 회개기회를 잘 포착해야 복의 기회가 잘 포착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확실히 만날 때도 회개할 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을
때도 회개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시련 중에는 비방보다 회개를 앞세우십시오. 다만 명백하게 틀린 것에 대한 말조차 “비방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내세워 완전히 틀어막으면 안 됩니다.
극단적인 이원론을 전파하는 한 부흥사는 자주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목사 비방을
주의하십시오. 목사 은혜를 생각하면 목사가 죽을죄를 지어도 침묵하십시오. 하나님의 종인 목사를 어떻게 함부로 비방합니까? 목사가 병들어 신장이
필요하면 30세 이하의 청년들은 자기 신장 하나를 기쁘게 내주십시오.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악한 육신을 잔인한 정도로
거부하십시오.”
그렇게 성도들에게는 영혼의 때를 위해 헌신하라면서 집을 바치게 하고 정작 자신은 이 땅의 때를 위해 초대형 교회를
건축한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육신을 악하게 보고 영혼을 선하게 보는 이원론 설교는 신령하게 느껴지지만 기독교는 영혼과 육신을 모두 소중히
여기는 일원론적인 유일신교입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부활하셨고 성도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기독교는 몸도 중시하고 몸의 행실도 중시합니다. 기독교가
윤리적인 종교는 아니지만 보편적인 윤리보다 못한 가치관을 가진 믿음을 내세워 보통 상식을 무시하거나 말살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와
교우와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이 복의 최대 원리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를 절대 비방하면 안 된다!”는 식의 낯 뜨거운 말은 영혼과 공동체를
심각하게 오도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틀렸는데 틀렸다는 말도 못하게 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목회자가 명백한 잘못을 했을 때
목회자를 존중하면서 기회를 잘 포착해 지혜롭게 잘못된 점을 말해주는 것은 결코 비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지 못하고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7:20-21). 능력과 치유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지 못하고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즉 진실한 회개로 마음의 천국을 이루면 능력과 치유의 가능성이 커집니다. 치유를 받겠다고 치유집회를 돌아다니면 치유의 가능성은 크게
떨어집니다.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사람을 보면 그 전에 대개 철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인간 최고의 능력은 회개의 능력입니다. 회개 잘할 줄
아는 성도가 일등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비방보다 늘 회개를 앞세우십시오.
< 공짜심리를 버리십시오 >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회개보다 비방을 앞세울까요? 비방과 정죄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무임승차의식과
공짜의식’이 그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성공적인 삶을 위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공짜 점심과 같은 것은 없다).”란 속담입니다. 공짜의식은 불신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상처와 갈등의 근본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받은 혜택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고 하고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헌신의 대가를 치르려고 하십시오. 많은 추수를 원하면 많은 씨를 뿌리고 내일의 웃음을 원하면 오늘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런 의식을
가지면 남이 쌓은 탑을 무너뜨리는 데 연연하지 않고 자기 탑을 쌓는 데 매진하게 됩니다. 반면에 대가를 치르지 않는 공짜의식을 가지고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고 입으로만 의를 내세우면 사회에 무수한 균열과 아픔이 생겨납니다.
의를 내세우며 소리만 높이는 모습은 대개
공짜의식에 젖어 생기는 모습입니다. 자기 내면의 공짜심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불의를 정의로 여기고 비방과 정죄에 열을 올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공짜의식을 가진 의인과 영성주의자가 넘치면 사회갈등과 인간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불의와 불행을 극복하려면 공짜의식을
극복하는 사회분위기를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짜의식을 극복한 사회가 선진사회입니다.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것이
불의이고 대가를 치르려는 것이 정의입니다.
저희 미션퍼블릭 팀에서는 제가 집필한 성경 말씀파일을 후원금을 책정해 대가를 치르는
분에게 보내드립니다. 그 파일을 만드는데 20여년을 매일 하루 8시간씩 기도와 묵상과 땀을 동원했고 요즘도 수시로 업데이트를 하고 몇 명이 몇
번의 교정도 합니다. 그 수입이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발행과 사역자들 사례와 선교사들 후원 등의 전체 지출에 비해서는 10분의
1도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파일구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2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말씀파일이니까 공짜로
나눠주라.”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과 “말씀파일이니까 대가를 치르고 받자.”고 하면서 조용히 물질을 보내고 심지어는 더 보내는 사람입니다. 둘
중에 누가 의인입니까? 대답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누가 얼마나 큰소리를 내느냐와 상관없이 냉철하게 정의와 불의를 분별할 줄 알아야 인생이 불행과
파멸로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냉철한 분별력이 부족해도 한 가지만 잘 버리면 대략 지혜로운 분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란 바로 ‘공짜의식’입니다. 왜 교인들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기복주의에 빠집니까? 공짜의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불법카피가 난무하고 저작권 인정에 인색합니까? 공짜의식 때문입니다. 의롭게 되려면 말로만 의를 내세우지 말고 먼저 행동으로 대가를 치르려고
하십시오. 대가를 치르는 일을 회피하면 불의와 정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의인인 척 소리만 높이다가 결국 불행한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짜의식을 불의로 여기시고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용서할 때도 그냥 용서하지 않고 죄의 대가를 치를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늘 이렇게
다짐하십시오. “앞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공짜의식을 버리고 대가를 치를 줄 아는 삶을 살자!” 공짜의식을 극복한 사회가 선진사회이고
공짜의식을 극복한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이번에 미국 기독교선교연맹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기 이틀 전에 미국의 한 국립공원을
갔습니다. 국립공원 지경에 들어서자 입장료를 내는 키오스크(kiosk,가판점)가 길가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람도 없고 자동 입장권 판매기만
있었습니다. 또한 톨게이트(tollgate)나 턴파이크(turnpike)도 없었습니다. 자유롭게 왔다 그냥 구경하고 가도 되지만 방문자 센터를
가보니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줄서서 입장료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도 줄서서 20불을 냈는데 3시간 후 국립공원을 떠날 때까지 어디에도 입장권
검사를 하는 장소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런 선진의식은 정말 배울만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데
인색하지 마십시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남이 이룬 것을 공짜로 얻으려고만 하는 것은 불행하고 불의한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공짜심리를 의로
여기고 소리까지 높인다면 그것은 시급히 치료해야 할 영혼의 병입니다. 인물이 되려면 공짜의식을 잘 극복하십시오. 또한 자녀를 인물로 만들려면
공짜의식을 극복하는 교육을 하고 모범을 보이십시오. 인색하게 아끼려고만 하지 말고 정당하게 벌고 정당하게 내려고 하십시오. 더 나아가 꿈과
비전을 키워서 풍성하게 벌고 풍성하게 내려고 하십시오. 공짜의식을 잘 극복할 때 더욱 가치 있는 것들이 주어집니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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