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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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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3장 3절-7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절: 난리가 왜 일어나느냐? 좁혀서, 가정에서 왜 싸움이 일어나느냐? 다시 말하면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던 왜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느냐? 의사단일이 안 돼서이다. 의사단일이 안 되면 충돌 마찰 대립은 일어나게 돼 있다.
교회에서도 가르침이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소원 목적에, 하나님의 가치판단 평가성에, 인간처럼 말한다면 하나님의 오각과 오감성에(하나님 당신에게도 있는 거니까 우리에게도 넣어준 거다.) 단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려고 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당신의 의중에서 나온 즉, 인격과 성품에서 나온 것이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격 성품을 닮아 들어가면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되는 것은 자동이다.
성경을 볼 때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의 일반 소원 목적을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안 나온다.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으로 나오니까 단일이 안 된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에서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을 합시다’ 하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안 된다.
예수님 당시 때도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안 된다.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외식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세상성으로 자꾸 감싸는 거다.
어떤 교회를 보더라도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바로 된 거냐? 아니란다면 이건 100% 외식이다. 신앙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세상성으로 들어있다면 외식자이다. 그 외식자 속에는 여러 가지 귀신장난이나 사단 마귀의 장난에 휘둘릴 수가 있다. 이용물이 된다. 왜? 자기가 바로 정립이 안 돼서이다.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모든 성품적으로 정립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온전해 진다. 온전해지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사람의 장래를 이렇게 저렇게 하신다. 물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대로 부정적으로 살아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리로 가면 길은 없습니다’ 하고 이정표가 분명히 가르치는데도 내 마음대로 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거다.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거다. 그래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너를 만든 창조의 목적이 이렇다’ 하고 가르쳐 주는 거다. 인간 자기는 그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한다.
누구든지 좋은 길로 가려고 하지 험난한 산길로 가려고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는 게 모든 인생이 가는 길이요 최고의 길이요 존영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 자기 자유로 딴 길로 가겠다는 거다. 이건 성경에 있는 자기 길을 몰라서이다. 그러니 언제 깨닫겠느냐? 깨달을 때까지 고난 고통, 마음속의 근심 걱정은 불 보듯 빤한 거다. 떠나지를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야 한다. 안 맞추면 그 가정에 어른이면 어른, 애면 애의 교육이 들어가지 않고 공경도 안 된다. 다 제 마음대로다. 사회를 봐라. 교육을 봐라. 다 그러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런 사람은 세상 마지막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다.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을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거라고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은 주님을 말한다. 우리가 말을 한다면 참 사람을 말한다. 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분이 참 사람이다’ 하고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세상 소유적인 자기 좋게 해달라는 식의 신앙은 헛 믿음이요 응답이 안 된다. 그런 사고로 예수를 믿는다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삶이다.
예수를 믿으면 효력을 봐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해 놓은 게 한자로는 약속이 들어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신약 구약 약 두 첩을 먹으면 효력이 나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을 보통 여러 종교 중에 하나의 종교로 알지만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여기에는 교회에서의 교훈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들어가야 하는 거다. 그래야만이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는 거다. 온 가정이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면 여기에는 가정천국이다. 개인적으로도 부부로도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가면 여기는 심령천국이다. 성경을 준 것은 그 맛을 좀 보라는 뜻도 들어있다. 이 땅에서 주님과 의사단일이 안 되면 말하자면 천국에서 주님과 가까워지겠느냐?
그 분과 제일 가깝게 지내야 그 분이 자꾸 닮아지고 옮아온다. 먼 거리에 있으면 어떻게 닮아지고 옮아지느냐? 사람이 모닥불 앞에 앉아있으면 불기운이 자꾸 자기에게 전달이 된다. 얼음 곁에 있으면 차가움이 자꾸 자기에게 전달이 된다. 어느 쪽으로 감염이 되고 전달이 돼야 자기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하겠느냐?
세상은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다. 또 그 만족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나에게 슬픔도 주고 기쁨을 주던 것이 원수가 되기도 한다. 세상 것은 다 그렇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지혜가 충만해서 그걸 잘 요리해 들어간다. 그러니 예수 바로 믿는 게 옳고, 이치를 바로 깨닫는 게 정확하고 옳은 거다.
의사단일이 안 되니까 마찰 충돌 대립이 일어난다. 그러면 난리가 일어나는 곳에,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이론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해야 거기에 평화가 있겠느냐? 먹는 걸 잔뜩 갖다 주면 먹는 동안에는 안 싸우니까 그게 평화냐? 먹고 나면 또 싸울 게 아니냐?
가견적 역사적으로 에덴동산에서부터 ‘먹지 말라’ 한 그걸 먹은 이후부터 대립 마찰 충돌이 생겨났다. 예수 믿으면서도 눈에 보는 것으로 기준하면 거기에는 의사에 마찰 충돌 대립이 생기게 돼 있다. 먼저 자기 속에서 정확한 답을 못 찾게 돼 있다. 움직이는 것에 기준을 놓으니까 그게 움직이면 또 틀려진다. 그러면 틀리는 사람이 돼버린다.
기준은 움직여야 되느냐, 천 년 만 년을 가도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거냐? 움직이지를 말아야 한다. 그러면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천국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뭐냐? 하나님 중심이다. 그 분의 입으로부터 나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이다. 만일 그 말씀이 틀리다면 예수님 당신도 움직이는 거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의 기준은 움직이지 않는 것, 주님과의 의사단일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되고 타락된 교회는 일한 양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한다. 교회 목사가 사람의 신앙을 소유성으로 기준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다 망한 거다. 그 교회 교인들은 다 망한 거다. 하나님 기준이 없으니 인간기준으로 되게 되고, 이러면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기준이 되는 거다. 이건 틀린 거다.
교회와 교회의 인도자가 기준을 잘못 잡아놓으면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이 면 저 면이 막 나오기 때문에 거짓 종도 되고 마귀 종도 되고 귀신 집도 되고 도둑도 되고 강도도 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틀어져 버렸으니 제대로 바로 된 것은 없는 거다.
기준이 바로 안 된 것은 공의가 아닌 불의다. 그걸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법대로 안 돼 있으면 다 불의다. 그런데 세상은 절대 정확한 곳이 아니므로 재판을 하는 재판관에 따라 같은 사건인데도 판결이 다 다르다.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확한 공의의 판단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재판할 수 있다.
세상은 증거를 찾아서 재판을 하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의 기준을 놓고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소원과 목적과 취미가 어디로 움직였느냐’ 하는 걸 놓고 ‘이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 이건 하나님 앞에 죄다’ 하는 거다. 그러니 인도자 자기부터 바로 못 서면 버림받는 거다.
먹으라는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충만하라. 생명과를 먹으면 이게 나오게 돼 있다. 지혜도 나오고. 그런데 ‘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하는 선악과를 마귀의 꾀임 빠져서 먹고는 저주받고 타락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긴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으냐?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도망가고 고통을 겪고 한다. 세계 지도자들은 다 땅의 것을 가지고 기준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전부가 선악과 따먹은 거다.
성경은 세계적이다. 예수 믿는 건 세계적이다. 국경이 없는 거다. 이게 예수 믿는 게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요, 하늘에 속했다는 증거다. 고로 예수 믿는 것은 온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옛날엔 화란이나 독일이 신앙이 좋다고 했는데 그 나라의 교회들이 진리본질에서 떠나니 지금은 완전히 타락이 되고 예배당이 술집이 되고 했다는 소리를 들은 지가 몇 십 년 전이다.
그래서 기독교회에서 하나의 종교적 개념으로 성경을 못 가르치는 거다. 그러면 또 속화되고 또 심판받고 자꾸 그렇게 된다. 속성적으로 사람의 성품이 바꿔지지 않으면 기독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 속화된 교회를 보면 주장은 하는데 서로 임시적인 주장이다. 그건 타락된 주장이다. 일반세상은 임시적 주장을 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타락된 양심에서 나온 주장밖에 없다. 이건 임시성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인데 영원한 분을 모르니 그렇다.
임시성적인 것을 주장을 하면 성경을 통해서 볼 때는 이건 타락된 주장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가운데는 믿는 자도 살고 안 믿는 자도 살고 있으니까 가견적인 것이지만 일반 도덕성적인 양심을 가지고 보면서 다 좋도록 하는 그런 면이 있는 거지만 교회에서는 그 주장을 펼 수는 없다. 하나님께 맞춰야 한다. 안 맞추면 죽는 거다. 안 맞추면 죄다. 죄는 죽는 거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거다.
또 보면 세상은 서로 왕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서로가 왕이 되려고 하는 건 굉장히 교만한 거다. 왕이 되려고 하기 전에 서로 발을 씻겨라. 겸손하라. 또 서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고치게 하고. 이게 이룰구원 차원에서 발을 씻는 거다.
어느 대학교에서는 총장이 학생들의 발을 씻겨준다고 하는데 그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그 정신을 알고 하는 거냐? 그리고 그 대학교 입구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고 큰 돌에 써서 세워놨는데 그러면 그들이 진리를 아느냐?
진리를 안다는 게 뭐냐? 진리를 아는 건 예수를 아는 거다. 그러면 예수를 안다는 건 뭐냐? 신장, 평수 머리? 아버지를 안다는 게 뭐냐? 어머니를 안다는 게 뭐냐? 친구를 안다는 게 뭐냐? 그 사람의 소원 목적 인격 성품을 아는 게 아는 거다. 주님의 그걸 아는 게 진리로 자유케 되는 것이다. 어디서 자유케? 저질에서 자유케, 죄에서 자유케, 속된 것에서 자유케 되는 게 진리를 아는 거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이걸 가르쳐 주느냐? 죄에서 탈출, 영능의 실력화 그게 자유다. 영적인 영인성장 면에서 자유다.
그리고 세상은 서로 욕심을 내서 뺏으려 한다. 이건 욕심이다. 욕심 많은 사람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 결국에는 사기꾼에게 다 빼앗긴다.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잘난 체 한다. 미워하는 사람은 잘난 체 하게 돼 있다. 잘난 체 하려면 또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속성적 성품에 자기를 늘 맞추고, 그리고 사람마다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으니 낮은 사람을 올려주고, 잘하는 사람은 더 잘하게 높여주고. 깎아내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그 자기를 낮추신다.
누구든지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교회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걸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이게 다 미혹의 영이다. 그러니 서로 제각기 특기 자랑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
미혹의 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인격과 성품이 시간적 질적으로 어떻다’ 하는 이게 안 나온다. 이들은 성경을 구절구절 쓰면서 사람을 어디로 몰고 가느냐 하면 속은 모른 채 그냥 달려가게 만든다. 그러니까 속사람은 안 가르쳐주고 표면적 종교운동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렇게 하면 ‘믿음 좋다. 하나님 앞에 상 받는다’ 한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성경구절을 쓰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가르침인 줄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귀의 꾀임이다. 마귀의 꾀임에 교인들은 넓은 길로 막 들어가는 거다. 개개인마다의 속성이 하나님께 맞추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데 이들은 그건 없고 일을 중심으로 크게 많이로 몰고 간다.
그래서 기독교를 크게 보면 구국주의도 있고 즉, 정치적인 교회. 이런 교회에는 국회의원들이 많이 가고, 또 연예인 교회는 누가 많이 갈까? 신비주의 교회는? 못 속인다. 좋아하는 대로 간다. 그런 데 속으면 안 된다.
모두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맞추지 않으면 개인 자신 속에서 분쟁이 생긴다.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하고, 성경해석도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하게 된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성경해석을 사람을 중점으로 보고 해석을 하게 된다.
성경은 진실을 중점으로, 하나님의 선을 중점으로 봐야 한다. 이러면 해석은 약간 차이는 있지만, 해석은 조금 달라도 질적으로는 같구나. 이걸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볼 줄 모르면 즉,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에서 나오는 본질을 볼 줄 모르면 그만 일반성에 속고 만다. 일반성은 상대에 따라서 자꾸 달라져 버린다. 중심이 기준이 달라져 버린다. 이게 기준이 바로 안 들어있다는 증거다.
‘질이 달라서 이건 상종을 말아야 겠구나’ 하는 이게 있고, 본질로는 가는데 이룰구원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성격차이로 나오는 갈등이 있다. 이건 원수 삼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 구원 면에서 자기의 성격으로 인해 은혜 받는 데는 자기가 성장 면에서 차질이 생긴다. 은혜를 못 받는다.
그리고 가족끼리도 분쟁이다. 이러면 가정이 해체가 된다. 교회끼리도 분쟁이다. 이건 교회에서 탈퇴가 된다. 미혹의 영들이 갈수록 확산이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온전케 되는 것을 모르니 그런 일들이 나온다. 교회는 교회끼리 대립이고, 신학자들끼리 대립이고, 목사들끼리 대립이고, 정신 사상 면에서 대립이고, 경제끼리 대립, 정치끼리 대립.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한 나라 안에서도 모두 대립이다. 지식끼리도 대립, 도덕성끼리도 대립이고, 거짓말하고 욕심내고 시기 질투하고, 속에서 기회를 타서 자꾸 나오려고 웅크리고 있고. 특히 나쁜 소문이 떠돌 때에 누가 미워지고, 그만 그 소문에 동요되고 동화되고 난리에 휘말리게 된다.
남의 말을 들을 때 하나님에게 기준을 놓고 ‘이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양쪽 말을 들어보고 판단을 하지만 이건 일반기준이고, 우리는 하나님 기준을 안다면 반대편에서 얘기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틀렸는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그 지식을 가지고 연관이 돼 있다면 그 사람도 틀린 것이다. 기준이 아니면 아니다. 왜? 구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기준이 없으면 상대의 말을 듣고 휘말리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본질적 기준을 잡아라.
그러면 내가 자꾸 ‘하나님의 본질 본질’ 하는데 하나님의 본질이 뭐냐? 이질은 뭐냐? 본질은 하나뿐이다. 질적 성분적으로 하나뿐이다. 기준이 하나다. 이질은 어떻게 나가는 게 이질이냐? 본질은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의 속성은 전부는 본질이다. 우리에게 향한 소원 목적이나 우리에게 향한 대함이 전부는 하나님이 본질이다.
하나님 당신에게 들어있는 건 전부는 영원히 가는 것이다. 지혜지식성의 영원히, 도덕성의 영원히, 능력성의 영원히. 다 영원히 가는 거다. 거기서 나오는 대함이나 지혜지식성이나 활동이나 다 영원에 두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온전이고 온전에 관한 창조목적의 본질이 바로 그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면 본질을 모르는 거다.
그러면 이질은 뭐냐? 이질은 하나님의 그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은 다 이질이다. 이질은 다 심판을 받는다. ‘나는 장로교인이다. 나는 감리교인이다. 나는 성결교인이다’ 하는 건 다 소용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본질로 닮은 것만 들어간다.
예수 믿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본질화 시키려면 첫째는 목사다. 목사가 성경을 가르칠 때 자꾸 세상을 가르치면 이질이 된다. 이걸 봐야 한다. ‘예배당 크고 작고, 누가 장기 좋고’ 그거 보지 말고, ‘누가 덩어리가 크네 작네’ 그거 보지 말고 거기서 말하는 메시지의 본질을 알면 금방 판단이 간다. 본질이 아닌 이질이라면 전부는 마귀 짓이요 귀신 짓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히 잡고 대립 마찰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그 다음에는 그런 여러 이질들 거짓된 것들을 보고 전부 지혜롭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게 본질이다. 그냥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예배당으로 끌고 온다’ 그게 아니다. 예수 믿고 아무리 충성봉사를 했어도 하나님의 온전으로 자기의 성격 성질 자기를 고치지 못하면 자기에게 육신이 좋아하는 솔깃한 소문이 들어오면 자기는 그만 그 소문에 정신이 팔려서 난리를 일으키는 주격이 돼버린다. 진리생명 운동에 주인공이 돼야지 심판 받는 일에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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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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