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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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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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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대 우리교회들의 심각한 예배문제"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예배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요4:23-24).
우리가 알다시피 예배는 거져주시는바 그은혜의 영광을 감사찬미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예배하는 자로 택하셨고 구별해 내셨습니다.(엡1:4~6)
때문에 시편기자는,
"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147:1)라고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예배는 성도의 마땅한 바요
하니님께서 주신 하나님에대한 구원의 화답으로서 선한증거요 삶이되는 것입니다.때문에 예배는 하나님보시기에 선하고 아를다워야
합니다.예수님말씀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은 성령의 교통하심과
진리가운대로 인도하시는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중심으로 올바르게
해야 하며 경건되야 합니다.그러나
이시대는 교회가 진정한 예배를 짓밟고 예배가 아니게 하고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지들 멋대로 마구
변질시키고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예배의 새로움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말들도 많습니다, 21세기에 맞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예배, 누구에게나 신성한 감동과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예배, 영상 시대에 걸맞게 보면서 실감할 수 있는 영상예배, 누구든지 거부감 없이 들어와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함께 공감을 가진다는 열린 예배, 음악이나 뮤지컬 등으로 감동을 주고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한 현대적인 문화예배, 우리 문화나 풍습 등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토속적인 예배 등 예배에 관한 다양한 변화의 물결이 여기저기서 출렁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배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행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교리적이고 신앙적인 구분이나 비판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 좋으면 되는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모여들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옛날 예배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 지도자들의 공감대주장입니다.
옛날 그대로의 예배 형식이나 내용으로는 이제 교인들을 끌 수 없고 변화를 줄 수 없고 흥미를 줄 수 없고 은혜의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변화를 주지 않는 옛날식 예배에 고리타분해 하고 따분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예배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 순서, 형식, 내용, 설교방식, 설교내용, 예배하는 공간 즉, 시각적, 청각적으로 영향을 주는 예배당 분위기 등 모두를 교인들 다수가 좋아하고 기호와기대에 맞게 예배를 무슨 축제처럼 가감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도 교인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정하고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도 교인들이 싫증나지 않게 하고 예배 찬양도 감정과 흥미에 젖게 하고 설교도 교인들의 관심에 초점을 두고 그들이 원하는 기대의 삶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해결이되는 것으로 선포되어지고 예배당 분위기도 사람들이 평안히 그리고 산뜻한 기분으로 예배하도록 어떤 예술 문화 공간처럼 거금 들여 꾸밉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간 예배의 모든 것이 사람들 중심으로 되어져 가는 변화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리가 만드는 자가 당착에 빠져 가는 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기되어 온 일입니다. 교회 수적 성장을 목적으로 달려온 우리 교회들에게 있어 봉착된 현상들인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교회들은 주로 기복적인 신앙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열정적인 교인들로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은 이제 먹고사는 걱정보다 좋은 환경, 좋은 문화, 수준 있는 삶이나 생의 즐거움을 찾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 오지 않게 되었고 모인 교인들마저 그런 신앙에 식상해함을 보이기 시작하자 교회들은 자구책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해 가는 시대와 사람들에게 부응하고 있는 성장한 교회들의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교파적으로 교리적으로 지켜오던 정통성의 기존 에배모범이나 경건을 중시하던 개혁주의 중심의 역사적 예배틀마저 쉽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 예배의 변화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 신앙은 사람들의 끝없는 요구에 한계를 느끼며 우왕좌왕하고. 그리고 이런 사람의 기대와 원함에 따르는 신앙적인 변화는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됨이요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멀어져 갈 뿐입니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흐려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할 예배가 중고등부가 열심히 하는 문학의 밤같이 되어가고 사람들의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분별 없이 허락하고 쉽게 변질시키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갈는지 요즘보면 답답할 뿐입니다.
요즘예배는 갈데까지 이제 다 간 것 같습니다.기독교방송에 나오는
대형교회 예배실황이나 특별집회 거기에 유명한 목사들 이건 완전히 멋대로입니다.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개그나 쇼맨쉽으로 원멘쇼하는자, 툭하면 예배시간인지 오락시간인지 세상노래 불러 제끼는자,
막말을 일삼는자,이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요 경건의예배를 불경건건하게
흐트려 버려 남을 실족케 하는 자들로 많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온자들을 예배당문만 밟고 가게 하는것입니다.그래도 여기에는 수많은 무리가 그런예배 좋다고 몰려옵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가칭교회가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속히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복음중심의 경건된 예배를
바르게 찾아가는데 전념해야합니다.
우리가 교회 된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 할 때 지어져 가는 예배당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경건되이 예배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예배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물잘 드리고 제사의식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습니다.
가령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했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시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고 말씀했습니다.
또 잠언서 21장 3절에 보면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했고, 또 미가서 6장 6-8절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으로 드리는 번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제사보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하고 바른 삶을 더 좋아하신다고 말씀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의식에만 치우쳐 제사만 드리면 그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다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배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요구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공예배요, 또 하나는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공예배는 성도 된 자들이 약속된 시간에 모여 예식적인 순서에 따라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예배는 공예배와는 달리 성도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합당한 모습으로서 하나님께 거룩히 드려져야 합니다.
이 예배에 대해 잘 말씀해 주는 로마서 12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했는데 원래 구약에서 제사 제물은 다 죽여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성도 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된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로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깨달아 천국의 새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로 부르신 합당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배당에 모여서 공예배만 드린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산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또하나의 심각한 예배 문제입니다.
오늘날 보면 신앙의 기준을 공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 자를 신앙이 좋은 자로 여기고 신앙의 성장상태도 주일 예배 한 번만 나오던 것에서 새벽 예배까지 나오게 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만큼 교회들이 오로지 공예배 중심입니다.예배도 모여 저들중심으로 치우치면서도...
요새는일요 교인이란 말이 생겨질 정도입니다. 일요일만 예배당에 나와 한번 예배하고 돌아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차원과 중심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을 말합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교인들이 삶에서 말과 행동들이 거룩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개신교 신도들이 천만어쩌구 숫자를 자랑하기도 하며 그렇게 기독교가 부흥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들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성도 된 자들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의롭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 제일 중심으로 서서 살려고 애쓰는 성도는 어디서나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저 예배당에 나와 자기 유익과 위로와 축복과 친교를 위해 모여서 공예배하는 자들만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모이면 교회가 성장했다 목회에 성공했다 말들 합니다. 그렇다면 참교회된 모습이 없는 그저 외형중심 사람중심 교회들만이 수두룩히 서있는 꼴입니다. 이게다 하나님을 통해 자기유익을 얻고자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었기때문입니다.이들이 기대는 지기유익과 기대에 있기에
예배도 그중심으로 간절할 뿐이고
더 나아가 삶의 예배는 거리가 먼것입니다.
아모스5:21~~24절을 보면,
"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성민들의 예배와 찬송을
외면하시겠다는 것과 그요인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모습과 삶에 하나님백성다운 의로로움이 없기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예배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살았다 하는 이름은 혹 가졌을지 모르지만 죽은 자라고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사데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행위의 온전함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계 3: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가 없는 교회의 표본으로서 성경은 우리에게 거울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가없는 중요한 요인은
공예배의 헛됨이 요인이며 오늘날
공예배가 타락했기때문입니다.
이방종교처럼 사람들이 필요로한 종교의식이나 행위처럼 예배가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 거룩하게 하고 온전케하는
순전한 복음의 가르침이 없기때문입니다.
공예배는 삶의 예배와 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해 구원받은 거룩한 교회 된 자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 영광을 돌리며 그 시간에 성령께서 진리로 교통하시고 인도하시는 가르치심을 통해 거룩한 삶의 예배로 연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며 온전함에 이르는 거룩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모여서 하는 공예배로만 살아 있다라고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씀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교회 된 성도들의 거룩한 모습과 삶에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진정한 교회 성장이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삶의 예배로 복음 안에서 개혁되어 가지 않는 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을 참으로 드러낼 수 없을 겁니다.
빌립보서1:11절에 이런 말씀이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의의열매는 그리스도로 의롭게된 성도들이 의인다운 거룩한 모습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바로 여기에 바로
하나님께 참영광이 되고 찬송이되는
참된 예배모습이있는 겁니다.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예배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요4:23-24).
우리가 알다시피 예배는 거져주시는바 그은혜의 영광을 감사찬미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예배하는 자로 택하셨고 구별해 내셨습니다.(엡1:4~6)
때문에 시편기자는,
"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147:1)라고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예배는 성도의 마땅한 바요
하니님께서 주신 하나님에대한 구원의 화답으로서 선한증거요 삶이되는 것입니다.때문에 예배는 하나님보시기에 선하고 아를다워야
합니다.예수님말씀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은 성령의 교통하심과
진리가운대로 인도하시는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중심으로 올바르게
해야 하며 경건되야 합니다.그러나
이시대는 교회가 진정한 예배를 짓밟고 예배가 아니게 하고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지들 멋대로 마구
변질시키고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예배의 새로움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말들도 많습니다, 21세기에 맞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예배, 누구에게나 신성한 감동과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예배, 영상 시대에 걸맞게 보면서 실감할 수 있는 영상예배, 누구든지 거부감 없이 들어와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함께 공감을 가진다는 열린 예배, 음악이나 뮤지컬 등으로 감동을 주고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한 현대적인 문화예배, 우리 문화나 풍습 등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토속적인 예배 등 예배에 관한 다양한 변화의 물결이 여기저기서 출렁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배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행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교리적이고 신앙적인 구분이나 비판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 좋으면 되는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모여들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옛날 예배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 지도자들의 공감대주장입니다.
옛날 그대로의 예배 형식이나 내용으로는 이제 교인들을 끌 수 없고 변화를 줄 수 없고 흥미를 줄 수 없고 은혜의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변화를 주지 않는 옛날식 예배에 고리타분해 하고 따분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예배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 순서, 형식, 내용, 설교방식, 설교내용, 예배하는 공간 즉, 시각적, 청각적으로 영향을 주는 예배당 분위기 등 모두를 교인들 다수가 좋아하고 기호와기대에 맞게 예배를 무슨 축제처럼 가감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도 교인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정하고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도 교인들이 싫증나지 않게 하고 예배 찬양도 감정과 흥미에 젖게 하고 설교도 교인들의 관심에 초점을 두고 그들이 원하는 기대의 삶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해결이되는 것으로 선포되어지고 예배당 분위기도 사람들이 평안히 그리고 산뜻한 기분으로 예배하도록 어떤 예술 문화 공간처럼 거금 들여 꾸밉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간 예배의 모든 것이 사람들 중심으로 되어져 가는 변화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리가 만드는 자가 당착에 빠져 가는 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기되어 온 일입니다. 교회 수적 성장을 목적으로 달려온 우리 교회들에게 있어 봉착된 현상들인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교회들은 주로 기복적인 신앙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열정적인 교인들로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은 이제 먹고사는 걱정보다 좋은 환경, 좋은 문화, 수준 있는 삶이나 생의 즐거움을 찾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 오지 않게 되었고 모인 교인들마저 그런 신앙에 식상해함을 보이기 시작하자 교회들은 자구책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해 가는 시대와 사람들에게 부응하고 있는 성장한 교회들의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교파적으로 교리적으로 지켜오던 정통성의 기존 에배모범이나 경건을 중시하던 개혁주의 중심의 역사적 예배틀마저 쉽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 예배의 변화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 신앙은 사람들의 끝없는 요구에 한계를 느끼며 우왕좌왕하고. 그리고 이런 사람의 기대와 원함에 따르는 신앙적인 변화는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됨이요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멀어져 갈 뿐입니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흐려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할 예배가 중고등부가 열심히 하는 문학의 밤같이 되어가고 사람들의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분별 없이 허락하고 쉽게 변질시키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갈는지 요즘보면 답답할 뿐입니다.
요즘예배는 갈데까지 이제 다 간 것 같습니다.기독교방송에 나오는
대형교회 예배실황이나 특별집회 거기에 유명한 목사들 이건 완전히 멋대로입니다.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개그나 쇼맨쉽으로 원멘쇼하는자, 툭하면 예배시간인지 오락시간인지 세상노래 불러 제끼는자,
막말을 일삼는자,이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요 경건의예배를 불경건건하게
흐트려 버려 남을 실족케 하는 자들로 많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온자들을 예배당문만 밟고 가게 하는것입니다.그래도 여기에는 수많은 무리가 그런예배 좋다고 몰려옵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가칭교회가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속히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복음중심의 경건된 예배를
바르게 찾아가는데 전념해야합니다.
우리가 교회 된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 할 때 지어져 가는 예배당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경건되이 예배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예배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물잘 드리고 제사의식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습니다.
가령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했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시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고 말씀했습니다.
또 잠언서 21장 3절에 보면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했고, 또 미가서 6장 6-8절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으로 드리는 번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제사보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하고 바른 삶을 더 좋아하신다고 말씀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의식에만 치우쳐 제사만 드리면 그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다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배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요구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공예배요, 또 하나는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공예배는 성도 된 자들이 약속된 시간에 모여 예식적인 순서에 따라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예배는 공예배와는 달리 성도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합당한 모습으로서 하나님께 거룩히 드려져야 합니다.
이 예배에 대해 잘 말씀해 주는 로마서 12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했는데 원래 구약에서 제사 제물은 다 죽여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성도 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된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로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깨달아 천국의 새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로 부르신 합당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배당에 모여서 공예배만 드린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산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또하나의 심각한 예배 문제입니다.
오늘날 보면 신앙의 기준을 공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 자를 신앙이 좋은 자로 여기고 신앙의 성장상태도 주일 예배 한 번만 나오던 것에서 새벽 예배까지 나오게 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만큼 교회들이 오로지 공예배 중심입니다.예배도 모여 저들중심으로 치우치면서도...
요새는일요 교인이란 말이 생겨질 정도입니다. 일요일만 예배당에 나와 한번 예배하고 돌아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차원과 중심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을 말합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교인들이 삶에서 말과 행동들이 거룩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개신교 신도들이 천만어쩌구 숫자를 자랑하기도 하며 그렇게 기독교가 부흥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들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성도 된 자들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의롭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 제일 중심으로 서서 살려고 애쓰는 성도는 어디서나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저 예배당에 나와 자기 유익과 위로와 축복과 친교를 위해 모여서 공예배하는 자들만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모이면 교회가 성장했다 목회에 성공했다 말들 합니다. 그렇다면 참교회된 모습이 없는 그저 외형중심 사람중심 교회들만이 수두룩히 서있는 꼴입니다. 이게다 하나님을 통해 자기유익을 얻고자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었기때문입니다.이들이 기대는 지기유익과 기대에 있기에
예배도 그중심으로 간절할 뿐이고
더 나아가 삶의 예배는 거리가 먼것입니다.
아모스5:21~~24절을 보면,
"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성민들의 예배와 찬송을
외면하시겠다는 것과 그요인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모습과 삶에 하나님백성다운 의로로움이 없기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예배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살았다 하는 이름은 혹 가졌을지 모르지만 죽은 자라고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사데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행위의 온전함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계 3: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가 없는 교회의 표본으로서 성경은 우리에게 거울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가없는 중요한 요인은
공예배의 헛됨이 요인이며 오늘날
공예배가 타락했기때문입니다.
이방종교처럼 사람들이 필요로한 종교의식이나 행위처럼 예배가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 거룩하게 하고 온전케하는
순전한 복음의 가르침이 없기때문입니다.
공예배는 삶의 예배와 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해 구원받은 거룩한 교회 된 자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 영광을 돌리며 그 시간에 성령께서 진리로 교통하시고 인도하시는 가르치심을 통해 거룩한 삶의 예배로 연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며 온전함에 이르는 거룩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모여서 하는 공예배로만 살아 있다라고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씀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교회 된 성도들의 거룩한 모습과 삶에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진정한 교회 성장이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삶의 예배로 복음 안에서 개혁되어 가지 않는 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을 참으로 드러낼 수 없을 겁니다.
빌립보서1:11절에 이런 말씀이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의의열매는 그리스도로 의롭게된 성도들이 의인다운 거룩한 모습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바로 여기에 바로
하나님께 참영광이 되고 찬송이되는
참된 예배모습이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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