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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12: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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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51810945 |
성경말씀 : 마태복음 12장 9절~21절
설교제목 : 길을 내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마태 12:9~21)】
<개괄적인 성경 이야기>
여러 차례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를 읽는 마음은 곤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문자 그대로 믿자니 뭔가 찜찜하고, 기적 이야기를 모두 부정하자니 그것 역시 찜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호한 자세, 그냥 어정쩡한 태도로 성경의 기적 이야기를 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손이 마른 자를 고쳐주셨다는 기적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부정(否定)도 할 수 없고, 역시 적극적인 긍정(肯定)도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입장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기적에 대해서 논평하고 있는 마태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예수의 기적에 대한 마태의 논평입니다.
<마태의 논평 이야기>
예수의 많은 기적 사건에 대해서 보도하면서 마태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 하나는 예수께서 그 스스로 일으키신 기적 사건에 대해서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마태 12:15~16). 예수는 왜 그랬을까요? 또 마태는 왜 예수의 당부를 기록했을까요?
세상에 기적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선교 혹은 전도 차원에서 보았을 때, ‘기적 이야기’만큼 강력한 폭탄은 없습니다. 속된 말로 직방(곧바로)입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지요. 하느님의 능력으로 손이 마른 자를 고쳐주고,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병자를 기적처럼 고쳐주시고 나서는 “이 일을 절대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그의 친구 마태는 굳이 이 금지규정을 그의 책에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쯤에서 마태의 두 번째 논평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병자를 고친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태는 느닷없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이사야 42:1~4)】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마태의 관점은 예수의 기적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기적을 자랑하는 차원도 아니었고,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기독교의 교세를 늘리려는 차원도 아니었습니다. 마태의 관점은, 예수께서 병자들의 인생을 고쳐주시는 삶을 통해서 세상에 공의(公義)를 세우고자 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상한 갈대를 건강하게 하셨고, 꺼져 가는 등불을 다시 북돋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인심은 예수의 아름다운 정신과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즉시 꺾어버리고, 꺼져 가는 등불은 아예 짓밟아 버립니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 할 때, 수천명의 독일인 정신병자와 장애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위대한(?) 독일민족을 개량한다는 명분으로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왕따문제가 심각한데, 그 정신적 근원에는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고, 꺼져 가는 등불을 꺼버리려는” 죄된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 정치의 맥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하나 같이 약소국들을 착취함으로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의 결론>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위대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저주 받은 자, 죄를 지은 자, 천벌을 받은 자’로 낙인찍혔던 병자들과 함께 했고, 그 상한 갈대들과 꺼져가는 등불들을 온 몸으로 껴안으며 사랑했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의 질병을 고치실 수 있었던 힘은 ‘초능력’에 있지 않았고, ‘드넓은 사랑’에 있었습니다. 온 인류를 동일한 분량으로 사랑하는 ‘공평한 정의감’, 그것이었습니다. 그게 마태의 논평이었고, 저 역시 그 논평에 동의합니다.
<시 이야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 한편을 골라봤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오늘 마태가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의 상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길을 내시는 예수님을 따라서’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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