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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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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4장 6절-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인간을 창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인즉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그러니까 말을 할 때는 ‘인간 대 인간’ 그렇게만 보고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창조의 목적에 둔 모든 충성봉사, 모든 언행심사, 모든 교육이어야 한다. 하나의 인간의 감정이 개입돼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말을 하면 안 된다.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향유를 머리에 들어 부었는데 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냐? 성경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우리의 구원목적으로 기록된 것임을 깔고 볼 때 인간을 만드신 그 분께서 창조의 목적을 놓고 말씀을 하신다는 면에서 ‘저가 내게’ 라고 하신 것은 여자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예수에게 한 것이 아니라 자타의 구원운동을 위해 한 것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말이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여자가 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행동은 허비 낭비가 아니라는 창조주의 말씀이다. 무슨 말이냐? 여자는 구원 안에서 실천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세상 육덩이 교회에서 예수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일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면서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한 이 성경구절을 붙이면 안 된다.
원리 원칙적으로 보면 각 교회마다에서 구원운동이 아닌 일을 하면 안 된다. 교회가 할 일은 구원운동이다. 교회가 구원운동을 떠난 하나의 사회적 종교적 운동은 복음운동이 아니다. 이건 주님의 구원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 잡아 제사를 드린 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대로 한 거지만 그들의 마음의 소원 목적은 딴 데 가서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양 잡아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뭘 해 주시리라’ 하는 육의 어떤 걸 생각하고 한 의식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다. ‘마음이 하나님과 먼 짓은 하지 말아라. 그건 꼴도 보기 싫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행동은 믿는 행동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하나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그는 좋은 일을 하는 거다’ 라고 하심은 예수님께 한 그 행동이 구원 안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말이다. ‘너희들은 육신의 가난을 메우려고 살지만 이 여자는 내 안에서 이룰구원의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약속된 구원 안에서 실천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이건 구원이다.
이 여자의 행동이 구원을 떠난 거라면 그들의 말처럼 허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인정을 해주는 것이다. 구원이 아니라면 아무리 천만금을 썼더라도 그건 인간 너희들끼리의 얘기지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는 거다.
이 여자는 구원을 위해 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그 실천이 향기가 나는 진액으로 여자의 마음속에 한 방울 한 방울 고여지고 있다는 것. 비록 몸은 깨어질 항아리지만, 죽어질 몸이지만 그 속에는 향유가 고여지고 있구나.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날 주님이 보시는 자기여야 한다. 이 말씀에서 자기를 봐라. 자기 속에 무엇이 고여지고 들어가느냐?
이제 마지막 길을 가는 예수님에게 최고의 아름다운 향기가 흠향이 된다. 이건 계:에 보면 금대접에 담겨져 올라가는 것이다. 금대접에는 가장 귀한 것이 담겨진다. 그러니까 가장 귀한 것이 뭐냐? 영원히 가고 변질이 되지 않는 것.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 뭐냐? 영원히 변질이 되지 않는 것.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속에서도 그 신앙심이 그 심성이 변질이 없는 것이 참 귀하다. 그런 의미로 성도의 신앙심성을 금대접으로 표현을 하는 거다.
7절: ‘너희 자신들도 가난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도울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마음만 먹으면 도와줄 수 있다. 마음이 없으니 안 도와주는 거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운동을 바로 하고 사는 여자의 믿음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으로 말을 했으니, 그렇다면 이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다 도와줄 수 있는 건데 너희들은 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들이 할 말이 있을까? 그들은 인간기준을 가지고, 인간기준은 선악과 먹은 기준인데 그 인간기준을 가지고 하는 말이니 그들이 실천을 했건 안 했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옥합을 깨뜨리는 그 사상은 은혜를 받아서 나온 행동이니 이것은 생명과를 먹은 사상이다. 그 성질이 그렇고 성격이 그렇다.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첫째는 너희들의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한다는 그런 물질에 매여 있는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는 진리신앙의 삶이 어떤 삶인지 구별 분별하라는 것이다. 영적인 면을 깨닫지 못하면 자꾸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지’ 하게 된다. 일반 세상 사람도 그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자타의 구원을 위한 말씀인데 물질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세 번째는 나는 언제 떠나도 떠난다는 것. 그러면 그냥 떠나는 거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일을 마쳐놓고 떠나는 거다.
이걸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계실 때, 활동하실 때 자기의 그걸 좀 쓰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께 향유를 바른 걸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후에는 부활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셔서 세마포를 다 벗어 제쳐놨다는 것은 죽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되는 거다. 사실 예수님의 몸을 세마포로 안 싸도 부활은 된다. 설령 길바닥에 누여놓더라도 부활은 되는 거다.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운동이 움직여 나갈 때의 얘기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그 시체에 향유를 붓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를 테면 부모님 살아계실 때 섬겨야지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건 허례허식이요 정말 악한 자식이다.
우리는 추도식은 과감히 중단하고 부모님 살아생전에 주 안에서 부모님 섬기는 걸 행동으로 실천을 하라. 부모님 섬길 줄은 모르면서 ‘제사하는 거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니 치워라’ 한다면 그 말이 먹혀 들어가겠느냐? 죽은 후에 한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거다. 죽으면 다 썩는 거다. ‘이건 사망적인 일이다’ 할 때는 기독자는 과감성을 보여야 한다.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마음속에 진리생명이 있을 때 하라. 그게 자기 열매다. 그 다음에 마치 선지자가 과부의 집에 있는 것처럼 진리생명이 자기 집에 있을 때 하라. 그러면 흉년이 그냥 지나간다. 다른 집은 굶어도 그 집은 하나님의 역사로써 진리로써 먹는 거다. 그런데 사람을 자꾸 의식을 하며 하니 거짓 종이고 사기꾼인데도 신처럼 받든다.
진리가 자기에게 왔을 때에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혼신을 다할 것이다. 이게 말이 쉽지 혼신을 다하는 여기에는 자기의 생명까지 내대야 하는 것이다.
이 진리가 세계 각처에서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한 채 세상이 마지막을 고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라고 하는데 만일 모두가 진리본질의 신앙이라면 표면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엄청난 강대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당은 한국에 다 모인 것처럼 됐다. 그러니 일반 이성마저도 제대로 된 게 아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를, 자기의 모든 노력 활동을 사는 일에, 사는 운동에, 살리는 일에 써야지 왜 죽어가는 것에, 죽은 것에 쓰고 왜 하나님을 심판을 받고 진노를 쌓겠느냐? 사람이 사고하는 게 어리석다.
8절: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얼마나 오래 계시겠느냐? 그리고 예수 믿는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으냐?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 것이고, 죽은 자기에게는 복음은 안 된다. 살아있을 때의 얘기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언제까지 이 땅위에 계시겠느냐? 또 우리가 이 땅위에 영원히 살겠느냐? 성령님께서 살아있는 자, 산 자에게 역사하시지 죽은 자에겐 역사가 없다.
그 여자가 힘을 다해 무엇을 준비했느냐? 향유를 준비했는데 300데나리온의 양이다. 이건 당시 노동자 10개월의 품삯이다. 말이 10개월이지 이 여자는 혼신을 다한 일생이다.
‘열’ 하면 세상 만수이기도 하다. 이걸 일생으로 죽 늘어뜨려 보는 거다.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하나님의 지공법 앞에 만족을 드린 삶인데, 이 만족성의 삶을 인간이 볼 때는 33년이지만 이건 3천, 3만 년으로 죽죽 늘어나는 거다.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드린 예수님의 그 정신 사상이 그 안에 다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그 정신 사상을 가지고 믿는 자는 영원히 무한히 연속이 질적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그러니 그 생애가 얼마나 빛나는 생애냐?
또 ‘왜 하필이면 33년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물론 ‘하나님의 주권섭리의 구원의 역사가 그 나이다’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는 거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66년도 될 수 있는 건데 굳이 33년인 것은 33년의 예수님의 육신의 나이는 최고로 젊음의 나이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런 젊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33년이라는 이건 그 박력 있고 생생하고 창조가 있고 힘이 있고 의롭고 한 아름다운 생애를 말하고 있으니,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영원히 가는 신령한 세계인 천국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거다. 그 젊음의 아름다움의 신앙의 질이 참 멋있다. 꽃으로 말하면 싱싱한 거. 고기로 말하면 아주 생생한 거.
우리의 신앙의 세계를 생각해 보면 빌빌거리는 게 무슨 맛이 나겠느냐? 이러면 조금 있으면 죽고, 죽으면 썩은 냄새가 풀풀 나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게 된다. 그러나 천국복음은 죽을 곳에 갖다놔도 사는 거다. 펄펄 뛰는 거다. 그 생동감 참 멋있다.
군대에서 젊은 사람들이 팔팔뛰고 있는데 자기는 빌빌거리고 있다면 그는 미래가 없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는 이치로 무장이 되는 그 충만 정말 생동감이 있다. 정말 멋있다. 그런데 앉으면 돈 얘기, 앉으면 옷 얘기, 앉으면 살림살이 얘기, 앉으면 큰 집 얘기, 앉으면 차 얘기, 그게 뭐냐? 우리교회 젊은이들은 그런 거 저런 거 마음속에 두지 말아라. 매일 매일 사는 게 말씀에 붙잡혀서 생동감 있게 살아봐라. 세상에서 주님의 정신을 가졌다면 하나도 겁날게 없는 거다. 네가 그 약속을 믿느냐?
우리교회는 젊은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그 정신을 살아생전에 나에게 달라고 하라. 그런 정신에서 결혼을 해서 자녀가 나오면 아이가 주님의 성정을 닮게 된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영원히 살겠느냐?
이 여자는 예수님께 혼신을 다한 자기 일생이다. 여자가 준비한 것 전부는 주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향유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건데 준비한 그걸 전부 주님께 드렸다. 참 향기롭구나. 교회에서 주일학교 돌보는 것도 참 향기롭구나. 그런데 귀찮다고 빠지고 게으르고 하면 그 교회가 바로 되겠느냐? 주님의 집이 바로 일구어지겠느냐?
예수님의 33년의 생애가 하나님의 지공법 앞에 만족을 드렸듯이 이 여자의 신행(信行) 전부는 주님을 위해 쓰여졌으니 신행이라는 이 속에는 노력도 시간도 투자도 마음 씀씀이도 소원도 목적도 다 들어있는 거다. 이런 마음으로 그 귀한 향유를 제일 귀한 최고를 위해서 부으니 이제 주님의 온 몸은 향기로 진동이다. 붓는 것도 잘 부어야 한다. 최고의 일에, 살리는 일에 부어야 한다.
‘내 장사를 위해 미리 준비했다.’ 이 말은 보통 사람처럼 말하자면 ‘내가 이제 죽어도 한이 없고 미련이 없다’는 뜻도 된다. 왜? 이제 내가 죽어도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구나. 주님이 마음 편하게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그 여자의 신행이다.
목사가 신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나와서 일반 사회 복지사업만 하고 있다면 이는 성경을 가지고 육신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돼버린다. 목사가 할 일은 영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이게 목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이다. 이성과 몸도 이룰구원으로 성화되게 해야 한다.
9절-11절: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기념을 한다는 것은 의인이요 옳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기념성은 일반 기념이 아니라 그 신앙이 그립고 그 신앙이 참 좋다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게 하는 그 기념이다.
이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즉, 성경이 가는 곳에서는,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진리본질이 되는 이룰구원이 있는 교회에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된다. 신앙의 질이 같아서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의 혼신을 다했는데, 여자란 연약성 정절성의 의미가 들어있다. 마음속에 오직 예수님만, 구원만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 마음속에 누구를 품고 있느냐? 젊은 학생들은 가수나 배우를 품고 있다. 그건 썩은 정신이다. 죽는 정신이다.
자기의 혼신을 다한 여자, 자기의 전 인격을 다한 여자,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자. 이 여자는 자기의 생을 다 깨어서 예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한 여자가 동냥을 하고 다니느냐?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여자가 거지로 나 앉겠느냐?
이 아름다운 여자는 성도의 대표다. 모든 성도가 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된다. 그 신앙의 질을 말하게 된다. 생명운동 진리운동 천국복음에 쓰임이 된 이 여자의 아름다운 신행을 지구 구석구석 성경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하게 된다. 이 시간에 우리교회에서도 이 여자를 말하고 있는 거다. 이 말씀 다음에 곧 가룟유다가 나온다. 이게 대조가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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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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