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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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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4장 10절-16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 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 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 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가룟유다는 예수 믿기 전부터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한 사람이다. 그걸 예수님이 아신다. 그걸 고쳐주려고 불러서 교훈을 주시는데 그게 영 안 고쳐진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그게 영 안 고쳐진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도 고치라고 계속 빙 둘러서 말을 해도 영 안 고쳐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귀니라’ 그런 표현도 하는 거다.
가룟유다가 마귀라서 마귀가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마음이 처음부터 돈을 사랑하고 좋아하면 갖가지 죄악을 행할 수 있는 사단 마귀에 시험에 걸려서 얼마든지 이용물이 되고,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 자기의 목숨 끊고 죽음에 이르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사람을 몰라본다. 부모를 몰라본다. 인간 맛이 없어진다. 내외간에도 돈이 가운데 끼이면 내외간의 맛도 없어진다. 나중에는 헤어지자고 하게 된다.
결혼할 때 시집 혹은 친정집에서, 특히 시집에서 ‘뭘 해 오너라’ 절대로 그러지 말아라. 그게 결혼이 깨질 수 있는 시초다. ‘뭘 해 왔느냐?’ ‘뭘 해 와야 된다.’ ‘왔는데 아무 것도 안 해 왔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거 싹 버려라. 그거 사람 못 쓰게 만들고 자식에게 저주를 안겨주게 되는 거다. 그렇게 해서 헤어지는 게 보통 많은 게 아니다. 그게 선악과 먹은 정신 사상들이다. 그게 사람이 망하는 거다. 예수 바로 믿으려면 그것부터 싹 뜯어고쳐라.
자식은 예수 믿어서 옳은 정신이 들었는데 부모는 ‘뭘 해 와야 한다’ 하면 그게 누구와 살라는 거냐? 아내와 남편이 인생길을 개척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이리 걸리고 저리 걸리고, ‘오너라. 가너라’ 하고.
진리는 살리는 운동이다. 잘못 된 걸 바로 고치는 거다. 구약시대에 보면 아무리 자기 아버지가 왕이라도 그 아버지가 산당 짓고 주상 세우고 한 걸 자식이 왕이 되면 다 때려 부순다. ‘뭘 해 오고’ 하는 그게 일종의 산당들이고 주상들이다. 이건 사람 망하는 거다. 그런 면에는 강력하게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린다. 안 그러면 못 살린다.
신앙 면에서 그 면에는 바로 하라. 그리고 인격적인 면에서 성질이나 가치판단이나 성격적으로 안 믿는 사람보다 지혜로워야 한다. 저질이면 안 된다. 사람이 바꿔져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모범이 돼야 하고, 모범이 되려면 희생이 들어가야 한다. 희생이 없이 말만 하는 사람은 정말 못 쓴다.
그리고 아내는 믿는데 남편이 안 믿는 경우에는 남편에게 탁탁 하면 부러져 버린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건데 그렇게 하다가 자기가 평생을 짐이 될 수가 있다. 활을 만들 때 한꺼번에 휘면 안 된다. 좋은 악기를 만들 때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다. 뜨뜻한 불에 쬐이면서 서서히 휘는 거다. 그러니까 지혜를 써야 된다는 말이다. 안 그러면 자기가 어리석어서 일을 만들고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한다.
그런 일이 없도록 지혜를 많이 얻고, 또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도 이치와 지혜가 분명히 나와야 한다. 이치가 없으면 그건 감정이고 사람의 성질이다. 이치의 사람이 돼야 한다. 또 편견을 가지지 말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공의로우면 그 사람은 반듯한 사람이다.
가룟유다의 말을 듣고 그들은 돈을 주기로 약속했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찾는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자기가 한 일 끝에 자기에게 어떤 죽음이 올 것을 알고 있을까? 그걸 아는 게 지혜다. 무턱대고 저질러 놓는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구나’ 하고 아는 것.
예수님 진리 즉,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곧 구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다는 건 하나님의 자녀요, 이건 신의 역사다. 즉 성령님의 역사다. 그런 것과 상관이 없는 정신이 누구냐? 가룟유다다.
그러니까 구원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과 상관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거나 사는 것은 교회적으로 말하면 돈 중심으로 예수를 믿는 거.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이런 돈 중심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 그 다음에 노후대책으로 목사를 하는 것. 그러니까 목사가 되려는 것이 노후대책을 하려고 목사가 되는 것. 그 다음에 일당 받는 재미로 목회를 하는 것. 사례비 받는 재미로 목회 하는 것. 그건 직장이다. 그 속에는 돈이다. 돈 맛을 보고 목회 하는 것. 목사들이 생각할 게 많다. 일반 평신도 같으면 부자 되려고 예수 믿는 거. 이게 다 한꺼번에 들어가는 거다.
예수를 바로 믿다보면 부자도 될 수 있고, 시대적 일기적인 면에서 가난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가난한데 자기 집만 부자로 되면 그게 하나님이 축복인줄 아느냐? 아니다. 그 날로 죽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난하고 자기만 부자라면 나눠먹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믿음이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자연스런 일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믿음에 붙이면 안 된다.
예수님이 부자청년보고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줘라’ 한 그게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니라 그게 창조의 목적이므로 자연스런 일이다. 길에서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으면 신앙이기 때문에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안 세우고 그냥 지나가는 어른이 있다면 누가 봐도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겠느냐? 일반에 속하는 건 자연스런 것이다. 거기에는 신앙을 붙이지 말라. 안 믿는 사람은 물질욕심이 돼서 그런 걸 모른 척하는 거지만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인간이라면 그건 자연스런 것이다.
목사님들, 특히 여자목사들 중에 내가 많이 봤는데 십일조를 내기 싫어서 자기 집에서 목회를 하는 자도 있다. 속이 들여다보인다. 왜 그런가 하니 자기가 목회를 하면 일가친척들이 자기 교회에 나오니까 그 일가친척 중에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그들이 십일조를 하면 그게 얼마냐? 말하자면 그런 욕심으로 목회를 하는 건 가룟유다의 돈 정신이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은 마귀가 보낸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손을 잡게 돼 있다.
가룟유다의 돈 정신을 가지면 사람 꼴이 안 된다. 너와 나 사이에 ‘돈 돈’ 하면 사람 꼴이 안 된다. 돈 욕심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귀지 말아라. 큰일 난다.
그리고 돈 얘기가 나왔으니 일가친척이라도, 부모형제라도 이미 분가가 됐으면 성경에 있듯이 보증 서지 말아라. 나중에 네가 알몸이 될 수도 있다. 보증을 서려면 그걸 각오하고 서라. 보증을 서더라도 그만한 각오나 책임을 질 것 같으면 하라. 안 그러면 형제간이라도 대 원수가 된다. 돈 때문에 사람을 잃는다.
그러니까 물질에 대한,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말아라. 있을 때 연관을 짓고, 없을 때는 ‘나를 안 도와주나’ 하는 것은 몹쓸 마음이다. 하루 세 끼 먹고 건강하고 남의 집에 빌리러 안 갈 정도면 된다. ‘안 도와주나’ 하는 마음은 시험에 드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자기가 고통스러워지고 남과 원수를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있으면 돕는 거고 없으면 못 돕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 작정헌금 하지 말라.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하는 거다. 그 때 그 때마다 ‘예스나 노’를 하면 되는 거다. 시험에 걸리는 마음을 품지 말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라.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함부로 맹세를 하고 말을 해서 얼굴이 똥이 됐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다. 아니다’ 하고 그 때 그때마다 하면 된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게 자기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기의 몸은 주님의 몸이니 지혜롭게 건강하게 건사를 잘 해서 남에게 피해가 안 되도록 해야 한다. 미리 손을 쓰면 될 일을 자기의 고집 때문에 크게 만들어서 타에게나 교회에 피해를 주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지혜롭게 해야 한다.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돈을 좋아했다.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사람노릇을 바로 못하고 영원히 씻지 못할 영원히 큰 죄 짓게 된다. 그걸 고쳐서 그렇게 안 되게 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예수님이 불러서 따르게 한 것이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꿔지도록 하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를 보면 가룟유다는 아예 처음부터 지옥 갈 불택자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부른 마음과는 반대가 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침 받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올 것이니 그 때 슬쩍 하려고 했는데 가만 보니 그건 없고 예수님이 전도하시는데 따라다니려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고, 집에도 못 가고 있고, ‘떡을 나눠줘라’ 하는 심부름만 시키고,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 ‘바다를 건너가라’ 하고서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게 해서 물을 먹이고 하니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맨날 ‘영이다. 영에 관한 말이다’ 하고만 있으니 가룟유다 입장에서 보면 모인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싶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모이면 내가 큰 예배당을 짓고 헌금위원을 맡아서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전하시더라.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더라’ 했는데 그 일이 뭐냐? 그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게 하는 일인데, 만일 ‘예수 믿고 1년만 교회에 다니면 부자 된다’고 한다면 아마도 예배당에 가득 차고도 남을 거다. 그런데 진리의 교회에서는 맨날 ‘영인성장, 하나님 성품, 참 사람’ 하고 있으니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안 나오는 사람도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은 ‘복 복’ 하는 데로 가는 거다.
믿는 사람이던 안 믿는 사람이던 사람이 안 만들어지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면 누가 그를 좋아하겠느냐? 귀신들리기 딱 좋다. 귀신이 가난한 사람만 들리느냐?
가룟유다의 입장에서 3년 동안을 예수님을 따라다녀 주었으면, 3년 동안 그 교회에 앉아 주었으면 세상 밥이나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할 텐데 그건 아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고 하니까 가룟유다로서는 난감하다. ‘예수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 하니까, 물론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도 있지만, 가룟유다가 그 말을 듣고 ‘이거 안 되겠다. 나도 올라가서 살아갈 대책을 세워야지’ 한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의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이 참 많은 거다. 돈 때문에 마음속에서 핵폭탄처럼 터질라 말라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란 분이 자기들의 눈에 가시다. 왜? 자기들의 속을 쿡쿡 찌르니까. 자신들을 책망하고 바른 말을 하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식자들이라고 하고, 회칠한 담이라고 하고, 썩은 것이 들어있는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하며 자꾸 바른 말을 하니까 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에 가시다.
그들의 입장에서 들을 때 예수님이 율법에 거스르는 말을 하고, 말을 할 적마다 자기들의 마음을 쿡쿡 찔러대고 하니까 예수님에게서 약점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시험을 걸어도 예수님이 걸려들지는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말을 막히게 하니 속에서 열이 난다.
또 예수님으로 통해서 이적기사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그리로 ‘우’ 모이고, 자기들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가고 있다. 신문에 보니까 어떤 목사가 지하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교인들이 자꾸 근처의 큰 교회로 가니까 그 목사가 남의 교회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이건 가룟유다와 큰 차이는 없지 않느냐?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사람들이 항상 줄줄 따르고, 성전 안에서 교인들의 편리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비둘기를 파는 대제사장들의 상을 예수님께서 둘러엎으시면서 ‘이 강도들아’ 하며 회초리를 만들어 내리치니 다 도망을 간다. 장로들이 서기관들이 대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돈 계산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장사치들이라.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그 안에 다 들어있는 자들이다.
이런 자신들에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외식자들아, 화 화 화가 있으리라’ 하니 ‘어떻게 하면 저 예수를 죽일까’ 하고 큰 고민거리다. 예수가 죽기 전에는 잠이 안 온다. 이럴 때 어떤 교인 또는 어떤 종 또는 어떤 목사를 만나면 당분간이나마 자기들의 일이 잘 풀리겠느냐?
이럴 때 가룟유다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울까? 그래서 가룟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고, 가룟유다는 ‘어떻게 하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기회를 찾는 거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목사 모르게, 교인 모르게, 하나님 모르게 어떻게 한 번 죄를 짓느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는 사람은 그게 죄인데도 죄인 줄을 모른다. 사람이 어리석고 깨닫지를 못하면 죄를 짓고도 죄인 줄을 모른다. 일반 의학적 지식도 그렇다. 모르면 자기가 먹고 죽을 것을 잔뜩 먹는 거다.
12절-16절: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한다. 첫 날 양 잡는 날이 된다.
제자들이 묻는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합니까?’ 유월절은 애굽에서 탈출한 날,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해방이 된 것이다. 그 의미는 노예에서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예로 살면 안 된다. 무슨 노예냐? 죄 아래, 세상 아래, 물질 아래 사는 이게 노예다. 노예로 살면 안 된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깨닫는 것도 노예수준의 미련한 상태로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은 깨닫고 이치가 밝아야 주인이 된다. 그래야 다스릴 수가 있다. 그게 예수 믿는 효력이 들어가는 거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면 뭐가 있다고 하는 걸 미리 아신다. 안 가봤어도, 약속을 안 했어도 미리 아신다. 우리들의 마음도 미리 다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다. 왜? 자기 마음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를 수가 있다. 그런데 조금 영리하면 자기가 자기 마음을 안다. 그러나 남은 자기 마음을 모른다. 남이라도 그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는 것을 봐서 ‘아, 저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가는구나’ 하고 알 수 있다. 그게 성령님에 감화된 사람이다. 그게 사도들이고 그런 거다. 성령에 감화된 종들이다. 그래야 바른 인도를 한다.
예수님은 미리 아신다. 당신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만들고, 사람의 오각의 오감성을 만들었으니 모르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미리 아신다. 제자들은 유월절 예비할 곳을 걱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미리 아신다. “너희 둘은 성 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져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주인을 만나서 ‘우리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면 잘 꾸며진 다락방을 보여줄 것이다. 거기서 예비하라”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걸 그대로 가지고 와서 보면 누구의 마음 그것도 일종의 다락방이다. 우리의 몸은 항아리라면 항아리다. 항아리 속에 어떤 물이 채워졌느냐? 어떤 소원 목적이나 어떤 사고방식이 자기 속에 채워졌느냐? 그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누구의 다락방이라는 이름은 없으나 추측컨대 예수님께서 그의 방을 쓰겠다고 했으니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그런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그리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늘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왜? 물을 길으러 가는 걸 보니까. 이건 우리가 신앙하는 속성을 표현하는 거다. 그 다음에 청철한 사람이다. 방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 구원이 귀한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음이 넓고 큰 사람이다. 다락방을 준비한 사람이 그렇다. 마음이 넓고 지혜롭고 눈치 빠른 이 사람은 사랑 덩어리다. 이게 하나님 앞에 마음이 넓고 큰 사람이다.
어떤 성도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해 향유를 제공했고, 앞에서 봤고, 어떤 성도는 큰 다락방을 제공하고, 본문에서, 어떤 이방인들은 수만리 밖에서 예수님을 찾아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제공한다. 별을 따라와서. 이게 지금 하나님의 역사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보여 봐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어느 외국에서 건 어디서 건 나를 위해서 적당하게 뭘 어떻게 할런지 하나님은 아신다.
그런데 3년 동안 따라다니던 가룟유다는 그 무엇을 제공은 못할망정 자기를 영원히 구원해 주고 자기를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줄 그 분을 하루 일당에 팔아먹는다. 그러니까 가룟유다가 일을 저지른 것은 한 순간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영원히 간다. 그런 우리 인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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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김경형목사님의 마가복음 설교 남은 부분은 궁극교회 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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