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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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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st888 |
주제 아디아포라의 한계
성경 : 갈5:13
제목 : 아디아포라의 한계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아멘.
보편적 진리는 가부를 물을 일 없이 성경적으로 따라야 하는 바를 규정된 진리로 디아포라(diaphora)라고 합니다. 가령 예수님의 사활(死活)을 부인한다든가 하는 자유로운 해석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황 무오설이나 마리아 승천설 같은 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규정된 진리 외에 가령, 예배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성도가 어떻게 옷을 입고 집을 짓고 살까? 이런 것들은 규정된 바가 없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결정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으나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拘束力)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로마)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려 했고 칼빈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은 폐기돼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교에는 로마교적 잔재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디아포라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에서는 성경과 성령의 조명을 받아 분별력을 발휘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R.B.카이퍼(1886-1966, 화란계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이며 목회자)는‘성화된 상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래서 <아디아포라의 한계>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려 합니다.
1. 속죄 받은 영혼의 자유를 먼저 확신해야 함
신앙인으로 바로 살아가는 표현을 하려면 먼저는 스스로 복음을 통한 영적 자유의 평강을 맛보아야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기쁨을 얻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 들어가 기쁜 맘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듯이 먼저는 내가 복음의 혜택, 영혼의 평강을 얻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롬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본문 갈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언약의 성취는 예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주어집니다. 본문에 이어,
갈5:18 ‘..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중생한 영혼이 되면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이 되시고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욥35:6-8 ‘6.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사람이 가진 선이나 악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2. 상식과 형제를 위하여 아디아포라의 절제
그렇다면 나의 영적 자유함, 구원의 기쁨과 생명의 삶을 나눠야 하겠는데 어떤 형식으로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성도의 문화생활 부분입니다.
1)진리와 성령으로의 삶이 상식을 포함한 태도로 표현
성령의 감화가 강하게 나타날 때 절제 없이 그냥 표출만 하면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더 비약되면 교주까지 되는 일이 생깁니다. 혹은 규모 없이 반사회적인 행위로 비판받을 종교인으로 낙인찍힐 위험이 생깁니다.
성령의 사랑이라 하면서 윤리를 예사롭게 취급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사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폄하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고전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성령님은 삶의 표현에는 지혜롭게 하십니다. 물론 일상 문화생활에서는 상식적이고도 품위를 지키며 규모 있고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2)신앙이 연약한 형제를 위한 자유의 절제
신앙은 영생신앙이 있고 성숙해져 가야 하는 성화(聖化)적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지켜나갈 태도는 연약한 성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 갈5:13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만 한다기 보다 규모 있게 사랑 가운데서 서로 섬기는 자세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장 16절 이하에서 성령으로 사는 것은 절제함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장 갈5:22-23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전8:10-13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전10:23-24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울은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며 구원을 이뤄가는 열심을 다해 남에게 종이 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는 이런 중심을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 연약한 형제를 위해 겸손의 미덕을 발휘해서 규모 있게 행동하는 처신으로 무리 없는 은혜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표현이 나에게만 도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함을 알고 신앙양심의 자유로움의 아디아포라에 대한 절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하며 온전한 신앙생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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