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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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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안다면 그분에게 최고의 사랑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곧 유일한 헌신과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다는 말은 수학적으로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매우 독특하며 그 영광과 위엄과 거룩함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고도,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최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가요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마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 즉 육체적 사랑이고, 두 번째는 필레오 즉 감정적인 사랑으로 친구사이의 의리와 같으며, 세 번째는 아가페 곧 무조건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에로스나 필레오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인 아가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나 감정으로 파악되는 사랑이 아니고 영으로 파악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고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이해할까요? 여러분 십계명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큰사랑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랑은 우상숭배와 같기 때문에 거절하십니다. 여러 가지 사랑 중에 하나를 드리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다른 어떤 것을 능가하는 거룩한 사랑은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나에게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줄 수 있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아가페의 사랑을 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이후에 가장 많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열 두 사도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아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또한 그의 단순한 성격상 그가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살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진실한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에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예고하신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인데 먼저 예고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용감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도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얼마나 굉장한 축복의 말씀입니까? 베드로는 굉장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직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여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충성스럽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즘 영화계의 7주 연속 흥행1위를 하고 있는 친구라는 영화가 신기록을 깨고 있다고 하는데 친구의 의리 필레오의 사랑…베드로는 지금 주님께 의리의 사랑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향한 충성과 의리가 참 사랑인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만찬을 거행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나아가고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한번 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했던 몇일 전의 그 고백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의 가슴을 깊이 찔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나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와 같이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내팽개치지 않을지 자신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목에 칼이 들어올 때 내가 주님을 배신하진 않을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순수한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는 가장 사랑하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는 것..어떻게 가장 충성된 제자가 이럴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믿은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신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더 믿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베드로처럼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 착각을 언제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부인하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믿는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철저히 부패한 인간이여 그러한 자신을 위해 주님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환상이 깨어지지 아니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섬길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서 주님이 목숨을 버리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입니다. 자신을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야 만이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평소에 충성하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기 때문에 심각한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새벽닭이 울 때 마다 베드로는 울었다고 합니다. 내가 믿고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배신할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 받겠습니까? 하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힘들어 할 때…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주는 상처는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배신할 때보다 더 큰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이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서 목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중보하지 않으셨더라면 베드로도 가롯 유다와 같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것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책감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건 간에 주님께 나아가면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되 우리가 죄를 지은 것 만큼 당신을 사랑하길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은 죄 값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헌신하게 되어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를 죄를 자백하고 또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도 우리의 죄책감을 치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은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증명되는 삶이 나타나야 참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향한 사랑으로 네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다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큰 사랑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회개는 더 큰 죄책감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랑을 요구함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본을 보면 사랑이란 동사가 특이합니다. 첫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이에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서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그가 차마 아가페로 대답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가 친구의 우정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이 물으셨을 때 ‘그럼 네가 나를 필레오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아가페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친구에게 주는 사랑만큼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최고의 사랑을 드릴 수 없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수준을 낮추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드릴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므로 나를 사랑하는지 증명해다오’ 라고 하셨습니다. 참 사랑은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 마음속에는 섬김에 대한 부담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부담감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형제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남을 진정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사랑하고 있느냐?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냐?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삶 속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섬기라.’ 주님의 이 요구에 정직하게 답변해 보는 아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요한복음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안다면 그분에게 최고의 사랑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곧 유일한 헌신과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다는 말은 수학적으로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매우 독특하며 그 영광과 위엄과 거룩함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고도,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최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가요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마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 즉 육체적 사랑이고, 두 번째는 필레오 즉 감정적인 사랑으로 친구사이의 의리와 같으며, 세 번째는 아가페 곧 무조건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에로스나 필레오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인 아가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나 감정으로 파악되는 사랑이 아니고 영으로 파악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고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이해할까요? 여러분 십계명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큰사랑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랑은 우상숭배와 같기 때문에 거절하십니다. 여러 가지 사랑 중에 하나를 드리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다른 어떤 것을 능가하는 거룩한 사랑은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나에게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줄 수 있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아가페의 사랑을 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이후에 가장 많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열 두 사도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아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또한 그의 단순한 성격상 그가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살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진실한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에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예고하신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인데 먼저 예고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용감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도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얼마나 굉장한 축복의 말씀입니까? 베드로는 굉장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직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여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충성스럽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즘 영화계의 7주 연속 흥행1위를 하고 있는 친구라는 영화가 신기록을 깨고 있다고 하는데 친구의 의리 필레오의 사랑…베드로는 지금 주님께 의리의 사랑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향한 충성과 의리가 참 사랑인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만찬을 거행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나아가고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한번 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했던 몇일 전의 그 고백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의 가슴을 깊이 찔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나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와 같이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내팽개치지 않을지 자신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목에 칼이 들어올 때 내가 주님을 배신하진 않을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순수한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는 가장 사랑하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는 것..어떻게 가장 충성된 제자가 이럴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믿은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신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더 믿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베드로처럼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 착각을 언제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부인하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믿는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철저히 부패한 인간이여 그러한 자신을 위해 주님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환상이 깨어지지 아니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섬길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서 주님이 목숨을 버리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입니다. 자신을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야 만이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평소에 충성하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기 때문에 심각한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새벽닭이 울 때 마다 베드로는 울었다고 합니다. 내가 믿고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배신할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 받겠습니까? 하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힘들어 할 때…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주는 상처는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배신할 때보다 더 큰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이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서 목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중보하지 않으셨더라면 베드로도 가롯 유다와 같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것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책감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건 간에 주님께 나아가면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되 우리가 죄를 지은 것 만큼 당신을 사랑하길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은 죄 값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헌신하게 되어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를 죄를 자백하고 또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도 우리의 죄책감을 치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은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증명되는 삶이 나타나야 참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향한 사랑으로 네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다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큰 사랑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회개는 더 큰 죄책감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랑을 요구함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본을 보면 사랑이란 동사가 특이합니다. 첫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이에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서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그가 차마 아가페로 대답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가 친구의 우정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이 물으셨을 때 ‘그럼 네가 나를 필레오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아가페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친구에게 주는 사랑만큼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최고의 사랑을 드릴 수 없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수준을 낮추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드릴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므로 나를 사랑하는지 증명해다오’ 라고 하셨습니다. 참 사랑은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 마음속에는 섬김에 대한 부담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부담감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형제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남을 진정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사랑하고 있느냐?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냐?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삶 속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섬기라.’ 주님의 이 요구에 정직하게 답변해 보는 아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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