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2-400.jpg나도 할 말 있다 냐옹

(햇볕같은이야기시리즈17)

 

저자/최용우  

출판일/2016.10.31

출판사/교보문고 퍼플

분류/종교 기독교(개신교) 

크기/신국판 A5 153X225

페이지/318쪽

가격/11,900원

ISBN 978-89-24-043938

구입링크 https://c11.kr/016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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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최후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 토막 나옵니다. 그날 아침,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베수비오산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가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몇 가지씩 손에 쥐고 뛰기 시작합니다. 금괴, , 보물, 장신구, 자식들, 여자의 손... 그러나 마그마가 밀려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 쥐었던 것마저도 놓아버리고 살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뜁니다.

그 아우성 속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느릿느릿 걷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달리던 사람들이 그 태평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빈 몸이오? 그새 모두 불타버렸습니까? 더 잃을 것이 없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늘 이 시간에 이 길을 산책한다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다 가졌기에 더 가질 것이 없다오. 당신들에게는 이 시간이 환란의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한가로운 아침 산책 시간일 뿐이오.”

만약 내 생애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1년 동안 글을 썼습니다.

 

<추천사>

상강 지나 추수감사절을 앞에 둔 한 해를 갈무리하는 초겨울이다.

햇볕같은이야기의 주인공 최용우님은 내가 13년을 한결같이 지켜보고 있는 글쟁이다. 꾸밈없는 그의 외모와는 달리 그의 글은 재미있는 유머가 가득하고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는 직접 쓴 글과 퍼 올리는 유익한 자료들이 무궁무진한 보물창고이다.

먼저 이번에 햇볕같은이야기 시리즈 17번째 책 나도 할 말 있다 냐옹을 출간하게 됨을 마음 다 해 축하하며 기쁘게 추천사를 쓴다그는 <햇볕 시리즈> 17권과 <일기> 8, <시집> 12, <말씀기도> <경건묵상> <주보자료> 각각 10여 권씩 모두 70여 권의 책을 쓴 중견 작가이다.

인터넷 신문 햇볕같은이야기20년 넘도록 5635호를 발행하였고 홈 가족은 무려 14000명이나 된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홈페이지에서 그의 글과 자료를 목회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자료를 단돈 1원도 받지 않고 주님께 그저 받았으니 그저 나누어 준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료 하나 마음대로 못 쓰고, 저작권법이라는 것으로 글 한줄 가져다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때에 그는 본 홈페이지는 조건 없이 주고가신 예수님처럼, 조건 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 무단전재및 재배포 대환영!’ 하고 대놓고 광고를 한다.

최용우, 그는 외항선원으로부터 광부, 청소부, 제빵사는 물론, 여러 노동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삶과 신학, 그리고 깊은 수도원 묵상을 통해서 흐르는 생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을 축이며 해갈하도록 하는 소중한 분이다.

따라서 삶이 뒷받침 해 주는 생생하게 펄떡이는 글과 살아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행복한 일상으로부터 영계의 깊은 비밀에 이르기까지 만날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이자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보양식이다.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기독교식 피정의 집을 지어 사역에 지친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언제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하여 독자 여러분이 큰 유익을 얻으며 쉼과 회복이 있기를 바란다.

  쐐기골 양지 이상호 목사(공주세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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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통(通)

 

사람들은 번영과 형통(亨通)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번영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 많은 것이 ‘형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데, 가만히 보면 부자들, 유명한 사람들 그리고 지식인들 중에도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부(富)와 소유물 그 자체가 형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통은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형통은 영적 상태에서 반사되는 정신적인 평안과 행복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만사형통(萬事亨通)하길 바라십니다. 성경적인 만사형통은 돈, 교육, 명성, 그리고 쇠퇴해가는 육체에 기반을 두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서 온 것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경제적 형통은 주권적인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부유할 수 있고, 영리하거나 멍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족하며 여호와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 그 사람은 행복하고 형통한 사람입니다. 그 형통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의 명예와 재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형통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亨通)하리라’(여호수아1:7-8)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亨通)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한삼서1:2-3) 


2.가장 큰 사람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 이타(利他)의 삶을 사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은 이기적(利己的)인 사람으로서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그는 큰 사람이 아닙니다.
크다는 것은 뚱뚱하게 살이 찐 몸땡이를 가리킨다거나 가진 재물이 많아서 허리가 뒤로 휘어진 교만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품이 얼마나 크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1.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오직 자기 한 사람만 아는 좁쌀보다도 더 작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머리는 좋아서 정부의 관리가 된다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거나 특히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되는 일은 인류의 재앙입니다.
2.이 세상에는 자기와 오직 자기 가족만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경영자가 되어 돈을 모으면 돌고 돌아야 될 엄청난 돈이 순환되지 않고 그 가족에게 묶여서 대물림되거나 심각한 부익부빈익빈 상태를 만듭니다. 이는 국가적으로 재앙입니다.
3.이 세상에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이런 큰 애국자들이 있었습니다.
4.이 세상에는 한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보다 더 큰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매우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합니다. 인도의 ‘간디’나 남아공의 ‘만델라’ 같은 사람입니다. 
5.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구와 태양계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우주적인 일에 동참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3.한 작은 사건


세계선교저널 1월호에 수록된 <2013년 세계선교통계>자료를 보면 세계 60억 인구 중에 이슬람16억, 천주교12억, 개신교4억, 유대교 1억명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22:2)하고 명령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1.이삭 -이삭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 16억명으로 가장 숫자가 많은데,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젊고 힘이 쎈 이삭이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었기에 ‘이삭’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삭의 아들은 야곱이고 야곱의 후손 중에 ‘예수’가 와서 마치 ‘이삭’처럼 십자가의 대속 제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절’과 부활하신 ‘부활절’을 가장 큰 절기로 지키기에 ‘예수교(기독교)’라고 합니다.
2.이스마엘 -이스마엘 종교는 이슬람 16억명인데 2000년 이후에 기독교인의 숫자를 넘어섰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친 아들은 ‘이삭’이 아니고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그 독자(獨子)가 이스마엘이라는 것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매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대신 양을 희생시킨 날을 기념하는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축제를 엽니다. 성탄절은 상업주의로 물들어버렸지만 이슬람 축제는 아직까지는 종교적 색체가 더 강합니다.
3.아브라함 -아브라함 종교는 유대교를 중심으로 약 1억명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그 자체를 믿는 종교입니다. 이들은 탈무드를 중심으로 하는 지혜로운 민족으로 세계 자본의 5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작은 사건이 이렇게 엄청나게 커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4.경건주의(복음주의)


바람은 있으면서도 없습니다. 바람이 불 때는 있으면서도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있으면서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있으면서도 없는 분이 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면 하나님은 계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없는 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져버린 시대가 또 있었을까요?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버리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앙은 지금 17세기 경건주의(Pietism, 敬虔主義)운동과 19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根本主義) 신학에 포로가 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21세기에서 눈부시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의 의식과 수준은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혁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신봉하는 ‘정통주의’가 제도화와 고착된 교리화 때문에 죽어가면서 기독교를 점점 썩게 하자 17세기에 제2의 종교개혁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입니다.
경건주의는 마침 불어오던 계몽주의와 혼합되어 그 이후에 감정주의, 신비주의, 합리주의, 주관주의, 금욕주의, 정적(靜寂)주의, 신인협력주의, 천년왕국주의,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및 내세 지향주의 같은 온갖 변신 유닛이 되어 지금까지도 유통 되고 있습니다.
경건주의는 원래 처음 시작은 매우 근사하고 바람직한 현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1차 종교개혁의 전철을 밟아 변질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경건주의’라는 카테고리에 갇혀서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고착화 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경건주의는 복음주의의 뿌리이며 한국 기독교는 대부분 ‘복음주의’입니다.


5.근본주의(원리주의)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 라는 말은 16세기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주로 경건주의(복음주의) 성향의 교파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1차 종교개혁을 한 이후로 2세기가 안 되어 개신교는 개혁되기 이전보다 더 타락하게 되자 2차 개혁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이고, 경건주의(복음주의)가 타락하고 변질되자 19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 근본주의(원리주의)입니다.
근본주의란 성경에서 말하는 원래의 사실로 돌아가자며 1916년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기적’ 이렇게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으로 선언하고 신앙의 근본으로 삼은 보수주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교회’ 하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외치는 광신적인 전도가 연상됩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도방식’입니다. 이는 근본주의 중에서도 ‘급진적 근본주의’의 영향입니다. 미국 서부를 개척했다고 하는(사실은 점령) 개척주의자들이 세운 신학교에서 파송한 미국 선교사들과 그곳에서 공부하고 온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지요. 개척이 아니고 ‘설립’입니다.
성경은 ‘구원’ 한 가지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진리들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랑’입니다. 카톨릭에도 구원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견해가 개신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는 알고 보면 경건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작은 상자에 구겨 넣기에는 너무 크고 무한히 넓고 다양합니다.


6.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날 카톨릭에서 만드는 한 월간 잡지 기자에게서 원고청탁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원고를 쓸 자격이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카톨릭 잡지에 원고를 써줄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됩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은 카톨릭과 교류를 하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월간 잡지 묵상코너에 개신교 목사님의 글을 싣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글을 써주는 목사님이 없답니다. 교단에 속해있는 목사님들은 글을 쓰려면 아마도 큰 결심을 해야 할 겁니다. 저야 어디 눈치 볼 곳이 없으니 원고를 써 주었지요^^
초기 한국 교회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들어와서 학교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 의료활동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친일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진보적인 이들을 정죄하고 탄압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근본주의는 친일파로 청산 될 뻔한 위기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주의 뒤에 숨어 살아납니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사회선교를 공산주의 운동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보수성향의 근본주의 목회자들은 배타적, 전투적 속성을 가지고 친미, 반공집회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불통’이미지로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기독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입니다. 기독교는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타 종교를 대해야 합니다. 그들을 지옥에 떨어질 마귀의 자식들로 대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이웃으로 형제, 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배타와 독선 대신 용서와 관용으로, 폭력과 정복 대신 설득과 섬김으로 대해야 합니다.


7.그런데 왜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습니다. 조조할인을 받으려고 아침 일찍 갔는데 벌써 목욕탕에는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네요.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인데 다들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요?
직장에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간여기에 있을 리 없고 저처럼 밤새 야간작업을 하고 아침에 잠깐 굳은 몸을 풀어야 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알게 뭐야.
그런데 누군가 탕 속에서 정치이야기를 하네요. 그러자 친구인 듯 한 다른 사람들이 가세해서 한 참 동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주로 정치를 잘 못한다, 집값을 너무 떨어뜨려 놓았다, 일자리가 너무 없다...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종교이야기 까지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어쩌고 저쩌고 불교인들이 어쩌고 저쩌고....
가만히 듣다보니 이분들이 지금 하나님이나 부처님보다도 더 신분이 높은 분들인 것 같았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 실눈을 뜨고 보니 배도 볼록 나오고 남자들의 거시기도 축 늘어져 있고 이마도 까져있고 분명 사람입니다.
무슨 심판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치는... 경제는... 기독교인들은 ... 자기 잣대로 세상을 재면서 옳으니 그르니 염라대왕 놀이를 합니다. 참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귀를 후벼 파면서서 얼른 탕에서 나와 샤워기로 귀를 씻어냅니다. 씻어냈어도 다 씻기지 않아 이렇게 집에까지 와서 또 그걸 글로 쓰는 나는 뭐냐? 말이라는 것은 듣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우기는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때 닦으러 목욕탕에 갔다가 귀에 잔뜩 말 때를 묻혀가지고 와서 그걸 글로 쓰고 있네 참!
우리는 언제나 심판하는 말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고 으랏차차차차차 힘이 나는 말을 해야 합니다. (5118)


8.기다리는 마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나는 주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기다리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며,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사모합니다. (쉬운성경 시편130:5-6)
새벽에 깨어 책방에 와 좌정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은 고요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눈을 감은 지 1분도 안되어서 내 마음은 마치 쓰레기통을 뒤집어 놓은 듯 온갖 생각의 먼지(忿心)들이 바글바글 기어다닙니다. 고개를 흔들고 합! 기합한번 주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지만 오늘 새벽엔 유난히 정신을 못차리겠습니다.
새벽이 힘든 것은 어제 잘 못 살았기 때문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조용해지자 기어 나온 것입니다.
‘기도’는 기다림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照明)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오셔서 전원을 올려 불을 켜고 “자, 이제 나와 이야기 좀 하자” 하고 나를 마주보고 앉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방에 가득한 쓰레기들이 다 치워지기를 기다리십니다. 언젠가 주님은 ‘네가 나를 사모함보다 내가 너를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방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 언제든 들어오셔서 나를 만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 파수꾼은 어서 날이 밝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날이 밝아 세상이 환해지면 파수의 일도 끝나고 편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동쪽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데 내 마음이 급하나이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방해하는 내 마음에 가득한 이 분심들을 어찌해야 합니까?


9.영적 성숙과 인격


말(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첫 번째 표증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을 그냥 하는 것 같지만 말은 에너지(energy)입니다. 밖으로 나오는 에너지가 있고, 안으로 빨아들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도 밖으로 나오는 말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무척 힘들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말이 안으로 빨아들이는 말이라서 내 말을 쭉쭉 빨아 먹어버리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적당히 서로 내는 말을 해야 균형이 맞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빨아먹어 버리니 당연히 빨리는 쪽은 힘들지요.
긍정적이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말은 내는 에너지입니다. 적극적이고 성격이 밝은 사람은 주로 내는 말을 합니다. 반대로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고 거부하는 말은 들이는 에너지입니다. 성격이 소극적이고 어두운 사람은 주로 들이는 말을 합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받습니다. 거의 목사님들이나 기독교 사역자분들의 전화입니다. 저의 책을 주문하거나 아니면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거나 상담, 기도를 부탁하는 전화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숙한 분들은 말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낍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날마다 조명하는 분들은 확실히 말이 긍정적이고 밝고 내는 에너지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하면서 자신의 용건을 말하는 이런 분들과 통화를 하면 기분이 유쾌해지고 제가 에너지의 채움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말이 다르고 그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얼굴 안 봐도 전화통화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요즘엔 광고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070이나 02로 시작되는 전화는 안 받습니다.) (5120)


10.하나가 된다는 것


너무 오랫동안 운동을 쉰 것 같아 두툼하게 완전무장을 하고 금강 자전거길 10km를 걸었습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강가를 “눈 보라까 모라아찌는 바람찬 흥남부두예에 ~”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습니다.
걷다보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저녁노을이 강가를 붉게 물들이네요. 오랜만에 보는 저녁노을입니다. 한참씩 서서 갈대숲 사이로 붉은 해와 붉은 강을 무심히 바라봅니다. 물오리들이 금빛 물결을 가르며 강 한가운데로 지나갑니다.
제가 한 3년 정도 배를 타고 대양을 항해하면서 다닌 적이 있습니다. 3팀이 돌아가며 4시간씩 당직을 서기 때문에 중간 조에 해당하는 때는 브릿지에서 당직을 서며 몇 달 동안 계속 아침에 떠오르는 해와 저녁에 지는 해를 보았습니다.
그때 20년 넘게 배를 탔다는 분에게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되는 환상적인 황금노을에 대한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름과, 바람과, 기온과, 조수간만이 기가 막히게 일치해야 볼 수 있다는 환상적인 황금노을은 마치 거대한 불덩이 속에 둥근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것 같답니다. 하늘과 바다가 똑같은 색깔이어서 수평선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거대한 붉은 공간 한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태양이 떠 있다가 점점 그 크기가 작아지면서 사라져버리는 그 기가막힌 황금노을은 40년 등대지기도 두 세번 정도밖에 못 보는 진귀한 장면이라네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일부러 수평선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놀라운 장면을 직접 보는 행운은 저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노을이 질 때마다 그 아름다운 황금노을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내가 일치(一致)된다는 성경의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본적은 없지만 그 아름다운 황금노을 같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11.진짜를 알아보려면


오래 전에 길에서 목걸이 하나를 주웠습니다. 가운데 콩알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그 주위로 깨알만한 다이아몬드 12개가 박혀있었는데, 줄이 끊어져 누군가의 목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무리 들여다보고 만져보아도 이게 진짜 다이아몬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요. 그래서 보석상에 가지고 갔더니, 가운데 있는 큰 알은 큐빅(cubic)이고 주변에 있는 12개는 진짜 다이아몬드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기만 해도 그렇게 알 수 있나요?” 했더니 무슨 전자기계를 가져와 대보면서 “소리가 나면 큐빅이고 소리가 안 나면 진짜 다이아몬드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정말 큰 것은 소리가 났고, 작은 것은 소리가 안 났습니다. 만약 가운데 있는 것이 진짜라면 이 목걸이의 가격은 100만원이 넘을 거라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럼 깨알 다이아몬드 12개 가격은요?”
“한 개에 만원씩 쳐드리겠습니다.”
ㅠㅠ 12만원 받아서 짜장면 사 먹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썼습니다.
저는 처음에 길에 떨어져 있는 목걸이가 문방구점에서 파는 아이들 장난감인 줄 알고 발로 툭툭 찼습니다. 아내는 여자 목걸이라며 주웠습니다. 그리고 보석상은 척 보자마자 진짜 가짜 분별하여 가격을 매겨주었습니다. 똑같은 눈인데 목걸이를 보는 제 눈은 완전 ‘개눈깔’ 이었고, 아내 눈은 정상적인 눈, 보석상의 눈은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툭툭 건드려보고 아무런 가치를 못 느끼는 책입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성경은 그냥 ‘좋은 책’일 뿐이고, 비로소 성경은 성경의 가치를 알아보는 전문가의 눈 앞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저는 보석을 보는 눈은 개눈깔이지만, 성경을 보는 눈 만큼은 전문가의 눈이 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12.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요즘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어떤 여목사님 동영상을 한번 봐달라고 해서 봤더니 “꽐라꽐라 하나님께서... 꽐라 꽐라 꼬라꾸래이 말씀하십니다....” 방언을 하고 그 방언을 통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분이 한번 봐 달라고 해서 동영상을 보기는 했지만, 제가 아직 그런 분들의 영적 깊이를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어서 가타부타 뭐라고 평가할 자격은 없습니다. 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왜 직접 말씀하시지 ‘꽐라꽐라 꽐라 꽐라 꼬라꾸래....’ 이런 이상한 말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통역(?)해 놓은 말씀을 보니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고지식하게 하나님도 입이 있어서 사람처럼 말을 하는 어떤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으려고 고생을 합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속이는 사람들도 엄청 많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아셔야 합니다. 인간은 말과 입이 따로 분리가 되어서 입으로 말을 전달하지만, 하나님은 입과 말이 그냥 하나인 분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요한복음1:1)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만든 이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만든 이가 자신을 알려준 만큼만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말(言)하신다고 하면 어떤 언어로 말씀하시겠는가? 한국어? 영어? 헬라어? 꽐라꼬라꾸래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言)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 자신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言)을 귀(耳)로 들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꽃이 말(言)하는 소리를 귀(耳)로 듣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말씀 하시지 않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비밀한 방법으로 말씀하시고 우리의 영은 그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51243)


13.장막 성전 교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 후,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만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건축을 시작합니다. 500년간의 성막(聖幕)시대가 막을 내리고 성전(聖殿)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성전시대는 막을 내리고 교회(敎會)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두지 않고 다 무너뜨리심으로 성전시대를 끝내고 교회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거룩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모이는 물리적인 장소인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시대를 끝내버렸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막은 민족 유랑기때의 상징으로 성막에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할 때마다 함께 이동하였습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being)와 사역(doing)에 대한 내면적 예표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이루고 정착했을 때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면적 예표입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효용성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하는 것은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을 무시함입니다.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니고 ‘교회당, 예배당’입니다.
예수님 이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고 더욱 흥왕한 경우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건물을 짓는데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언제나 교회의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솔로몬이나 짓는 것이지 교회시대를 사는 우리가 따라서 ‘성전’을 짓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냥 솔로몬이 지어 놓은 화려한 성전 관광이나 갑시다. (5124)


14.형통원리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100배의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큰 복을 주시니 이삭은 부자가 되었고,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삭에게 양 떼와 소 떼가 많고 또 많은 종들을 거느렸습니다. (쉬운성경 창세기26:12-14)
신문을 봐도 텔레비전을 봐도 인터넷을 봐도 한결같이 “힘들고 어렵다”는 소리뿐입니다. 이삭이 살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이삭이 흉년을 만나 도저히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살 곳을 찾아 떠난 곳이 블레셋 땅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인 이삭에게 좋은 일자리나 좋은 땅을 내어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한 해에 100배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1백만원을 투자해서 1년만에 1억원을 벌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하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하나님의 형통의 원리를 따라 산 사람들은 환경을 초월하여 형통을 경험하였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통을 받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처음 마음이 변질되어 하나님이 주신 부요를 잘 못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많아서 그렇지 사실 하나님의 형통을 받아 부요를 얻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부(富)가 사악한 사람들에게 몰려 세상을 망가뜨리고 죄를 짓게 하고 공포에 빠뜨리는데 쓰여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부(富)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서 선한 일에 쓰여지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조금이라도 선한 일에 쓰여지는 것이 좋지요.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청빈’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성공이나 형통이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형통의 원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5125)


15.형통의식


어릴 적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영화 ‘캔디’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기억이 안 나고 주인공 캔디가 어떤 역경 가운데에서도 “다행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그 대사가 생각나네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그보다 더 힘들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캔디에게는 형통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형통의식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권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이 무슨 이름을 짓든 이름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작업을 아담이 계속하게 하셔서 아담이 무엇이든 그 말하는 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에게도 말로 창조하는 능력이 유전되었습니다. 부자들은 대대로 부자의 가문으로 대물림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 합니다. 그 부자들 사이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부와 성공의 비결’(시크릿)이라며 무슨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그것도 알고 보면 ‘말로 창조하는 능력’이야기입니다.
별거 없습니다. 형통한 사람들은 말로 ‘형통’을 외치며 형통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형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하십니다. 크게 열어야 큰 것이 들어오지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하도 입을 안 열기 때문에 ‘글로 적어라’고 합니다. 말로 못하면 적어라도 보아라. 원하는 것을 적어놓고 기도하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나의 것이 되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말이 마귀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세뇌가 되었는지 그 머리의 의식을 형통의식으로 바꾸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어찌 그렇게 ‘안 된다’는 말은 콩떡같이 믿으면서 ‘된다’는 말은 죽어도 안 믿는지. 형통하려면 지금 무심코 부정적으로 하는 모든 말들을 딱 반댓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됩니다. (5126)


16. 형통태도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채용과 인사담당을 하고 있는 분이 직접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대기업에 입사원서를 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실력이 거의 대소동이하기 때문에 스펙(Specification)이나 무슨 자격증 같은 것이 빼곡히 적혀있는 서류가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면접관은 면접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1초안에 그 사람의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합니다. 면접이 시작되고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바뀌는 비율은 10%도 안 된다고 합니다.
면접관의 눈에 그냥 딱 봐도 ‘합격’인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형통태도’입니다.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사람은 형통할 수밖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면접관은 사람을 선택할 때 실력을 무시하지 않지만 실력보다도 먼저 태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만사형통인 사람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바꾼 사람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모든 일을 되는 쪽으로 해석하고 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아무리 면접을 잘 보려고 준비하고 연습하고 대비를 해도 평소에 그 사람이 ‘형통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면접관에게 단 1초 만에 들통나버립니다. 그러니까 면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면접 시작이 아니라 평소 삶의 태도에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형통태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형통태도’ 로 살았는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형통태도는 신앙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념’을 믿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긍정의 힘’ 같은 것들이 모두 신념으로 ‘형통태도’를 취하는 이론들입니다. (5127)

 

17.형통적용


성경의 형통원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은 항상 변합니다. 원리가 ‘진리’라는 옷을 입고 있다면 방법은 ‘시대’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진리가 영원한 것처럼 원리는 영원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는 것처럼 형통을 적용하는 방법은 항상 변합니다.
우리나라 70-80년대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시골에서 도시로 인구가 무차별적으로 유입 될 때는 아무데나 십자가만 세우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공터에 천막만 쳐놓아도 교회가 되었고, 호랑이 탈 쓰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의 이동이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이다 보니 교회에 새로 오는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지 불신자들이 오는 게 아닙니다. 전도 전략이나 교회 개척의 방법이 70-80년대와 당연히 달라야지요. 안타까운 것은 어쩌면 그렇게 ‘교회개척’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개척은 예로 들었을 뿐이고, 교회 안에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데 헌옷 벗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하시는데 끝까지 헌 부대를 포기하지 않고 움켜잡고 있으니 참 난감한 일입니다.
앞 사람이 이미 내놓은 길을 따라가는 밴치마킹(benchmarking)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형통한 사람들은 형통의 원리를 새로운 방법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형통한 사람들은 이미 형통한 사람들에게서 형통의 원리를 배워 그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시대적 상황파악이 재빠르고 거기에 맞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창조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5128)

 

18.형통비밀

 

성경에 나오는 형통한 사람들은 형통 그 자체로 만족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것을 잘 사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명예나 권세나 부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형통하게 했습니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칼레시(市)’는 영국군에게 포위됩니다. 칼레시는 결국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항복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그러자 영국왕은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도시의 대표 6명의 목을 매 처형하라”고 명령합니다. 칼레시민들은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합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왕은 죽음을 자처했던 여섯명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그들을 살려줍니다. 이 사건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됩니다.
대체로 기독교국가가 많은 유럽에서 ‘부자’가 존경을 받고 긍정적인 것은 그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불문율로 여기고 자부심을 갖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신 것은 후손 대대로 물려주라는 뜻이 아니라 나누라는 뜻입니다. 형통의 비밀은 바로 그것입니다. ‘남을 형통하게 함으로 자신도 형통하게 된다.’
성경에 딱 나와 있습니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먼저 한번 대접을 하면 여러 번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창26:30) (5129)


19. 오늘 세례 요한은?


이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떤 시대인가? 이 시대는 아픔과 고통과 수고를 싫어하고 안락과 즐거움과 풍요를 위해 사는 시대입니다. 최고의 행복은 돈과 명예를 얼마나 얻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입니다. 적당한 안일주의, 나에게 피해가 오는 일이 아니라면 나머지 것들은 대충 눈감아 주는 무한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에는 날마다 수많은 폭행, 살인, 사기, 사고 소식으로 도배가 되어도 우리는 무심한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쯧쯧 말세야 말세, 주님이 곧 오시겠어. 안타깝기는 해. 하지만 나에게 저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삽니다.
시대의 아픔에 눈을 감은 종교는 당연히 시대의 외면을 받습니다. 기독교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할 때는 그 숫자가 3%도 안 되었지만 큰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야합하여 오히려 아픔을 주는 종교가 되었을 때, 그 숫자가 25%라 해도 아무 힘이 없는 무기력하고 지탄받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시대의 한 복판에 서서 ‘외치는 소리’였던 요한은 참으로 신실한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낸 사람이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이 난 자 중에 그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을 만큼 큰 사람이었지만 그는 권력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고 참지 못하여 세례 요한처럼 ‘외치는 소리’ 어디 있습니까?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습니까?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하라, 이 독사의 새끼들아!” 회개하라는 말을 똑바로 듣지 못하고 ‘까는 소리’라며 이를 가는 사람들 ‘회개’가 무슨 양파입니까? 까게. 나는 세례 요한이 아닙니다. 한때 세례요한을 꿈꿨지만, 어느새 나는 시대의 야합자요 독사의 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엉엉웁니다. (5130)


20. 정직 회복


도산 안창호 선생은 “거짓이여 너는 이 민족을 망친 원수로다.”고 한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나라는 지금 위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인 도덕적 위기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양심의 상실과 부정직이 정상처럼 보이는 비정상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직이 밝게 빛날 때가 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정직해야 하는가? 정직은 성도의 의무입니다.(고후13:7) 또한 하나님이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시25:8)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정직하신 분이시기 때문에(사26:7) 정직한 자를 기뻐 하사,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잠2:7) 거짓된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잠12:22, 잠19:9)
정직하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자유함의 기쁨은 손해보다 훨씬 큽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26:7)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정직하게 살면 당장에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 같으나 후손에게 복이 있습니다.(시112:2)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보다 ‘정직’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천만금을 물려주는 것보다 낫습니다. 부모에게 돈만 물려받은 개망나니 같은 자식들이 갑(甲)질을 해대면서 얼마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얼굴을 바로 뵈올 수 있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뿐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11:7) 정직함으로 하늘이 열리고 세상이 밝아집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정직하여라’ 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정직은 평생 행복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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