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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1:9-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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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http://cafe.daum.net/st888 |
주제 계시 받은 요한의 정황
성경 : 계1:9-11,17
제목 : 계시 받은 요한의 정황
계1:9-11,17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 아멘
10가지 계시를 말하고 일곱 여덟 가지만 맞아도 신령하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라면 다 맞아야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자들이 예수님의 예언과 종말의 날짜를 예언했습니다. 모두 거짓입니다.
우리가 받은 말세의 계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세에 있을 [계시를 받은 사도요한의 정황]을 살피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증언으로 유배 상태
사도요한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아 유배지로 왔는데 어느 때인지는 확증하기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성의 파멸이 있기 전이라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라고 추정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 시기가 언제이든 본 계시록의 근본된 복음적 가치나 미래 있을 예언을 이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사항은 사도요한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범죄인들(정치범이나 종교인들)을 보내는 밧모 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밧모라 하는 섬’, 밧모는 송진이란 뜻으로 그래서 소나무가 많아 밧모 섬입니다. 터키의 쿠사다시(kusadasi)에서 약 60키로, 아테네에서는 약 250키로 지점에 있습니다. 밧모 섬 정상에요한의 기념 수도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계시를 주시는 일은 일상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되 큰 핍박을 받는 자에게 주십니다. 지금도 남달리 주께서 함께 하시는 영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한국 교회사만 해도 주의 영적 음성을 받고 영감이 충만하던 시절은 환난기였습니다. 배부른 80년대 이후로는 형식에만 치중하여 신령한 영음이 부족한 시절이 왔습니다.
누구나 핍박을 받을 때 간절하여 영감이 넘쳐나고 영적 음성을 들을 때가 많았습니다. 핍박도 없이 그냥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서 듣겠다는 자들이 있는데 불건전한 생각입니다.
2. 주의 날에 받은 계시
사도요한은 유배지에서도 늘 묵상하는 생활이 연속된 것을 봅니다. 어느 ‘주의 날’에 특별히 성령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부활일인 주일에 이 계시록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계시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재확인하고 세상의 악에 대처하는 신앙 정신을 주어 승리케 하기 위함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제 친구 중에 하나는 중학교 때 교회를 다녔지만 나중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20대 후반에 황달병이 있었지만 이란으로 돈벌이 갔다가 병이 악화되어 결국 목숨을 잃었는데, 죽는 순간에 알라신을 부르면서 우상을 들고 주문을 외우더라고 합니다. 내가 20대 초반에 처음 예수 믿고 전도를 했을 때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말하기를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아주 무섭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본문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요한은 주의 날에 계시의 말씀을 얻었습니다. 주일은 그래서 예배에 말씀(예언)이 중심을 이루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일의 예배를 무시하고 은혜를 얻겠다는 것은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주일에 교회당에 출입을 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맘을 주께 드리기 위함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일찍부터 주일에 모여 예배를 했습니다(고전16:2). 주일은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완성된 예배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막16:2;눅24:1;요20:19;행20:7).
대부분의 신자들이 처음 예수 믿게 된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을 빼먹고는, 그러니까 예배에 불성실한 신자가 은혜를 체험할 기회는 희박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성령님의 감각을 얻을 길이 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3. 사도 요한이 받은 은혜들
사도요한이 말씀 증거로 인해 밧모 섬에 정배 보내어졌지만 여기서 받은 신령한 은혜는 개인적인 수양의 정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1)성령의 감동을 얻었습니다
사도이든 목사든 성도이든 성령님의 감화 감동 없이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성령님이 감화하셔야 배운 대로 신앙생활에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의 날에 묵상 중에 성령이 또 감화했습니다. 이런 감동은 아주 특별한 감동이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에 큰 감동의 시간도 생깁니다.
2)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팔소리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주의 음성입니다. 나팔은 구약시대 백성을 모으거나 절기 혹은 전쟁을 예비할 때 불었습니다.
출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민10:20,겔7:14,33:6,레23:24)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
마24: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전15:51-52)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배 중에 스피커 소리를 크게 해서 들려준다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게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 가슴으로 크게 울림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요한은 영적인 귀가 열려 그렇게 들었다는 말입니다.
3)말세 계시를 써서 전달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11절에서 아시아 7교회에 요한이 듣고 본 바를 모두 써서 보내는 메신저 역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큰 은혜가 됙 행복한 일입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신약에는 이 말씀을 받아 롬10: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요4: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되어 큰 기쁨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합니다. 사도요한은 말세 계시를 받고 우리 모든 형제에게 전할 수 있는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달의 사명은 기쁨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4)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된 은혜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지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미리 보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재림하실 주님을 먼저 보게 된 요한은 17절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했습니다. 그 거룩하신 영광의 주를 뵙고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겸손해지고 말았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무엇을 봤네 하면서 자기 자랑과 함께 교만한 모습들이 보통인데 요한은 엎드리는 겸손을 보였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자는 겸손해집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받은 은혜는 우연찮게 얻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 증언하며 핍박 받는 중에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를 입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과정에 받는 환난은 오히려 더욱 신령해질 수 있는 기회로 알고 잘 인내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냥 신비한 경험만을 위해 기도하거나 간절한 것은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고 그 자체가 불건전한 신앙입니다. 마귀가 예수로 변신하여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혼이 망가지는 수가 생깁니다.
사도요한이 다시 오실 주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된 것은 단지 주님을 보기 원하여 기도하다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증언의 생활 중에 핍박 받아 여기 밧모 섬으로 유배당해 온 후에 주일에 묵상하며 홀로 예배하는 중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직 주를 위해 증언하고 헌신 봉사하는 가운데 살다보면 주의 말씀이 큰 나팔소리처럼 맘에 울림으로 들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날을 위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적어도 주일마다 예배를 정성있게 드리며 온전히 주를 따른다면 개인적으로 필요한 영음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의 울림을 얻고 또한 남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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