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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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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6.7.3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 |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잠시 후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해서 지나갔고, 그도 역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내려가 치료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예식을 집행하는 중심부였습니다. 그래서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아서, 사람들은 여리고로 내려다녔습니다. 여리고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여리고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서 예루살렘에서 팔아 돈을 벌어 지갑을 잔뜩 채워 여리고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강도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덮쳐서 때리고 돈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간 사람은 장사꾼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제사장이 종교적인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리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강도에게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율법의 준행자인 제사장은 상당히 고약한 얼굴로 교훈을 전하고 그대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다음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그는 꾸짖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주고 꾸짖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리저리 여행을 하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개라고 부르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외국에 정복당해서 포로로 잡혀갈 때, 포로 잡혀간 그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순수한 유대인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위해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해준 것입니다. 당시 광야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기름이나 포도주를 상비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피부에 기름을 칠하고, 포도주는 상처난 곳에 병균이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의 옷을 찢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감아 묶어 주고,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집은 오늘날 호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가서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내가 돌아올 때 돈이 더 들었으면 그 길에 돈을 더 갚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 없이 선을 행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2. 누가 선한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을 한다’ ‘레위인 같은 의식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도 의식주의자도 아닌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강도 만난 이웃을 꾸짖으며 심판하고 지나갔습니다. 율법은 법이니깐 법을 어기는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법의 안경을 쓰고 사람을 쳐다보기 때문에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꾸짖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3절로 5절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꾸짖는 이유는 율법을 자신이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론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잘났고, 상대방은 잘못됐고 나쁜 사람이라며 결점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이웃만을 살펴서 꾸짖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미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의식주의자는 성전의 의식과 예식을 잘 지키고 행하는데 주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요사이에도 형식주의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교회에서 모든 행위는 다 따라서 행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이 형식주의자인 것입니다. 내용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레위인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강도떼를 만나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비난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 의식주의자들은 내용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내용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레위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인정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내용으로 보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과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형식과 의식 속에 있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함은 율법과 의식을 다 이룬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율법을 가지고서 평론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타락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보시는 선한 일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훌륭한 설교, 천사 같은 웅변, 탁월한 지식,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위선자이며, 그 말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엄격한 판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설교를 하고, 천사 같은 웅변을 하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며 존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내용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을 소개받을 때 보면 어느 대학을 나와 어디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서 대단한 경력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력에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제로이며, 아무 가치도 없고, 무용지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크게 하고 전력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사이 중동에서 일어난 종교가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4. 참 사랑의 모범
참 사랑의 모범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에 쓰러져 버림받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린 이 사랑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한 종교가 아닌 용서와 회개를 하게 도와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자꾸 남을 흉보고, 남을 얕잡아 보고, 남의 잘못을 욕하고, 자기가 대단한 신앙인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만 있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제2의 기회를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한 번 시작해보는 거다”라며 재생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성전으로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녀를 잡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결점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고, 결국에는 버림받게 만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무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깨너머로 글을 본 사람들이 돌을 놓고 그대로 다 도망을 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저들의 감춰진 죄를 손가락으로 적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 돌로써 때린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돌에 얻어맞아야 될 것이라고 알고, 모두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그 여자를 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어 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 짓는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개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 터이니 그렇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조금만 잘못하면 교회법을 동원하든지 국가법을 동원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위대한 일을 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계신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줘야 된다. 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회개를 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변화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지고,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지고, 내년에는 금년보다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이웃의 잘못을 비평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도움을 베푸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덮어서 그 사람이 재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까? 시퍼렇게 율법의 칼날을 세워서 심판을 내린다면, 그곳은 도살장이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자기도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심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제2의 기회를 가지도록 용서를 해주고 힘을 돋우어 주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써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독생자가 인생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자기의 고통을 끝까지 당하고 청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회개하고 재기하기 위해서 주께 나오면 주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으로써 주님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아무리 죄악이 가득찬 곳에 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자는 주님이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재기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그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고 눈에 티가 있는 이웃을 정죄하느냐?” 과장하게 말씀한 것이지만 내 눈에 들보 같은 잘못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심판을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언제나 희망을 주는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교회로 잘 이끌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사람을 새 사람 만들 수 있는 처소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여 성령님을 경배하고, 믿고, 따라 나가면 성령님은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님은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모여서 주께 감사하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여서 훌륭한 변화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충실한 성도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죄악이 만연한 이 땅에 예수님 보혈의 사랑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상처받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위로자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무엇보다 이 땅에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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